나는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다. 한결같이 교회를 다닌 건 아니었지만 현재는 꽤 성실한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다. 그 사실을 딱히 숨기는 편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종교에 관한 토론장이 펼쳐질 때마다 나는 자연스레 종교 쪽 토론자로 앉혀지곤 한다. 나는 이게 싫다. 토론장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종교 얘기가 나오는 자리는 대부분 술자리이며, 그곳은 제대로 토론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종교, 특히 한국 교회는 물고 뜯고 씹을 수 있는 거리가 넘쳐난다. 내가 속한 곳이 안주거리가 되고, 나 또한 강제로 대변인이 되어야 하는 상황은 썩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날 안주는 필요 없다.
신이 있다고 생각해?
보통 주제를 꺼낸 사람이 물꼬를 튼다. 나는 욕받이가 되지 않기 위해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돌리려 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생각보다 곳곳에 있다. 다른 크리스천이 미끼를 물면 공격이 시작된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데 신이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멘탈 약한 애들이나 신을 믿는 거 아니야?’ 진짜 최악의 공격이다. 더 최악은 이 대화를 받아 열심히 얘기를 이어가는 사람이다. 이후에는 종교의 부패 사례를 끌고 와서 이것이 너네가 말하는 신이고 종교냐며 공격한다. 조금씩 양상이 다를지 모르지만 대개 이런 레퍼토리다.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리고 여전히 많은 술자리에서 이와 비슷한 잡담이 펼쳐지곤 한다. 그렇게 열띤 잡담을 10분~20분 정도 즐긴 후에 슬며시 다른 얘기로 넘어간다. 딱 안주거리용 대화다.
물론 종교와 신의 존재에 관해 각 잡고 토론해보라고 해도 이길 자신은 크게 없다. 현대 논리학에서 존재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으면, 존재 증명의 책임은 주장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저명한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갑론을박 되는 문제를 내가 명쾌하게 증명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이기고 지는 것과는 별개로 종교에 관한 건설적인 토론은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철학이나 다른 학문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꽤 즐거운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토론은 승패보다 토론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작금의 종교(한국 교회)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건설적인 토론 주제로 적합하지 않다. 이미 혐오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혐오가 있으면 상대방과 제대로 된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 사실을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아도, 정치를 통해 우리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충분히 알지만 조금 더 살펴보자. 패거리 심리학이란 책에는 ‘집단의 탈 인간화’라는 개념이 나온다. 인간에게 동일한 정서 자극이 주어지면, 혼자 받는 것보다 무리 지어 받을 때 훨씬 강하게 받는다고 한다. 긍정적인 정서이든 부정적인 정서든 말이다. 그렇게 집단으로 격화된 감정은 내집단을 제외한 외집단을 쉽게 탈 인간화 시킨다고 한다. 쉽게 말해 외집단을 보고 지능도 낮고 맘껏 비난해도 상관없는 존재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 사회엔 상대 집단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충(벌레)이라는 표현이 아주 난무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이미 교회라는 집단도 비종교인에게 탈 인간화가 된 것처럼 보인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상식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나는 유신론자인 동시에 크리스천이지만 무신론자부터 불가지론자의 입장을 존중한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아. 이러이러한 이유로 신은 없으며, 나는 나를 믿어’ 이렇게 말한다면 나는 그와 그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신을 믿지 않아. 교회 다니는 사람은 신을 내세워 돈을 끌어 모으는 사이비일 뿐이야’라고 한다면 전혀 상대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만 진리라고 여기는 그 모습이, 맹목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과 무엇이 다를까.
하지만 그 모습을 인정하진 않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보편적으로 보면 타당하다고까지 여겨진다. 그 부정적 이미지와 혐오는 교회가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목사들의 범죄와 막말,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 사찰에서 찬송을 부르는 비상식적인 기독교 단체 등의 모습은 종교가 심각하게 부패했다는 증거이며 비판받아 마땅하다. 아니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래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자.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신과 종교인가. 아니면 신과 종교를 악용해 가치를 훼손한 사람들인가. 우리는 비난할 대상과 문제를 제대로 짚어야 한다. 세월호 사고에서 해경의 대처에 문제가 있다고 해경 자체를 없애버린 것처럼, 뭉뚱그려 비난하는 태도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종교 단체의 부패를 신과 종교와 결부시켜, 그 존재를 부정하는 건 정말 옳은 태도인가.
물론 올바르게 봐주길 원한다면 교회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이 시대의 종교인은 크나큰 숙제가 있다. 그 숙제가 끝나기 전까지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건설적인 대화의 장은 마련되기 어려울 것이다. 침묵하고 적극적으로 자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 종교를 혐오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을 때가 오지 않을까. 그때서야 입을 열어야 할 것이다. 신과 종교, 그리고 기독교가 지닌 가치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