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이 없다면?
그날은 이상한 아침이었다. 마감 압박을 주던 디자인팀 과장님이 꿈에 생생하게 나오기도 했고, 평소 피곤한 아침과 다르게 싱그러운 느낌이 든 아침이었다. 손으로 침대 위를 쓱 훑어 패드를 찾은 후 투둑 건드려 시간을 확인했다. 08:01. 이런 ㅆ, 욕할 틈도 없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씻으면서 지각을 면할 최소 출발 시간과 그날 입을 옷을 생각했다. 내가 이토록 재빠른 인간이었나 새삼 깨달으며 어제 퇴근하면서 던져둔 가방을 그대로 챙겨 집을 나섰다. 살짝 젖은 머리를 휘날리면서 지하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개찰구 근처 전광판을 보니 막 지하철이 도착하고 있었다. 대기 4분짜리 지하철을 피한 것에 감사하며 계속 달렸다. 간신히 지하철 문을 통과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정신을 달랜 뒤 에어팟을 귀에 꽂았다. 1초 뒤 띠링하고 청량한 소리가 울려... 야 하지만 끝내 조용했다. 가방을 열어보고 뒷주머니를 확인했다. 핸드폰이 없었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되돌아가면 100% 지각이었다. 나는 닥터스트레인지가 된 것 마냥 여러 가지 미래를 동시에 보려고 노력했다. 업무에 이상이 있는지, 저녁 약속이 있는지 등 하루 일정을 훑어보았다. 동시에 집으로 돌아가 사수에게 전화한다거나, 면피용으로 가까운 응급실을 가는 것도 생각했다. 그 모든 생각을 마친 나는 다음 역에서 내리지 않았다. 지각 뒤처리보다 피시 카톡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생각을 마쳤지만 여전히 정신은 없었고 심장은 두근거렸다. 그래도 귀에서 에어팟은 빼지 않았다. 다음 역을 알려주는 전광판을 멍하니 보면서 출근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지각을 하지 않았고,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 핸드폰 때문에 중요한 업무를 망쳤다든가 하는 불상사는 없었단 얘기다. 평소보다 조금 더 기민한 태도로 업무 연락을 미리 카톡으로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디지털 디톡스로 힐링을 느꼈다든가 하는 일도 없었다. 폰으로 할 수 있는 건 PC로도 다 할 수 있었다. 달랐던 점을 굳이 꼽자면 출근길이 불편했다? 정도다. 나는 평소 출퇴근할 때 주로 유튜브를 본다. 하지만 그날 지하철에선 전광판만 멍하니 봤다. 길을 걸을 땐 시선을 살짝 아래로 깔고 걸었다. 시선 둘 곳이 없었다. 아, 역시 핸드폰이 있어야 편하다.
시선에 대해 생각했다. 지하철에서 내가 봐도 편했던 건 전광판, 광고, 노선도 그리고 내 핸드폰(그날은 없었지만)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끊임 없이 시선 둘 곳을 찾았다.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 의식하는 것이 실례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몸은 부대끼지만 서로를 의식하는 것이 실례인 지하철이 새삼 신기했다. 신기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당신들에게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나에게도 제발 신경 쓰지 말세요. 그건 서로를 의식하지 않는 매너였다. 불편하고도 예민한 그런데 오지랖도 넓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생긴 상식일 거다.
허락된 것만 보는 것이 매너이고 상식인 세상이다. 어느 날, 그런 금기를 깨고 퇴근길에 사람들을 슬쩍 둘러보았다. 인스타, 카톡, 유튜브 등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다. 핸드폰을 쳐다보는 걸로 각자의 공간이 완성된다. 정말이지 시선과 의식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상이다. 다행히 나도 오늘은 핸드폰이 있다. 복잡한 생각을 이내 그만두고 유튜브로 눈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