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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해담 Nov 10. 2022

나일퍼치의 여자들

달콤 짭짤한, 잘못 건드리면 비릿한, 청어 메밀

이 청어 메밀은 가격은 세지 않은데 비린내도 없고 면발의 쫄깃함까지 쇼코의 입맛에 딱 맞는다. (중략) 뜨겁고 달콤 짭짜름한 국물을 마셨다. 흘러내리는 국물을 타고 목에서 가슴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 맛을 몸이 만끽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_유즈키 아사코, <나일퍼치의 여자들> 中


조합을 쉬이 떠올릴 수 없는 음식들이 있다. 김치와 초콜릿, 레몬과 햄버거, 그리고 생선과 메밀국수가 그러하다.


나는 따끈한 온메밀을 쉽사리 맛볼 수 있는 의령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소바 먹으러 가자!" 한 마디가 던져지면 그때부터 입안이 간질간질하고 추위에 떨던 위장이 한층 요동을 쳤다. 자그마한 가게에 둘러앉아 나오길 기다려 받아 든 큼직한 그릇은 앞에 두는 순간부터 온몸이 푸근해지는 느낌마저 주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젓가락을 집어 들고 호호 불어가며 큼직한 그릇의 내부를 싹싹 비워내는 전투를 치르는 건. 간간하게 뱃속을 덥히는 육수, 씹으면 씹을수록 구수한 향을 풍기는 면발, 면을 씹는 중간중간 악센트가 되어주는 고기 고명. 담백한 한 그릇을 비워내고 부른 배를 두드리다 보면 어른들은 근처의 떡집에서 파는 망개떡을 쥐여주곤 했었다. 묘한 향을 풍기는 망개떡을 쫀득쫀득 씹어주면 그날의 외식은 훌륭한 모양으로 마무리되었다 볼 수 있겠다.


그렇다. 내게 있어 온메밀은 고기와 궁합이 좋은 음식이었다. 따끈따끈하니 담백한 육수에 잘 어울리는 거칠거칠한 고깃 조각. 꾹꾹 씹다 보면 느껴지는 기분 좋은 만복감.


그런데 생선이라니? 담백한 국물 위에 생선이 올라간단 말인가. 비릿하지 않을까. 하지만 괴음식이라고 생각하던 김치피자탕수육도 굉장히 맛있지 않았나. 이것도 맛있을까, 괜한 짓 말고 그냥 먹던 메밀국수나 먹을까. 호기심은 머릿속에 박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상상이 가지 않는 조합은 내 손을 바지런히 검색의 열의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당장 갈 수 있는 곳은 근방의 청어 우동을 판다는 집이었다. 어쩌면 비슷하지 않을까. 마침 먼저 퇴사한 이들과의 저녁 식사가 있던 날이었다.


"우동 먹으러 가자. 여기 맛집이래. 점심시간엔 줄도 서더라."

"그래, 나도 가보고 싶었어."

"나도."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나는 교묘해졌다. 싫다고 하면 어떻게 설득할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지인들은 별 다른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식사에는 반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이 그들의 머릿속에까지 확고하게 박혀있었음에도 웬일이래, 한 마디 없이 신나게 무엇을 먹을지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이제 와서 생각하건대, 퇴사한 이들을 굳이 회사 근처로 불러들인 것은 지겨운 풍경을 또 봐야 한다는 질척하고 우울한 기분을 안겨준 것과 다름없는 행위였다. 군소리 없이 따라준 이들에게 이제야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다.


아무튼 우리 셋은 씩씩하게 우동집으로 향했다. 지인 둘 중 누구도 청어 우동을 시키지 않았다. 그런 것도 있어? 하는 반응을 보일 뿐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만 먹어보면 그만이었으니까. 됐다. 이제 드디어 먹어볼 수가 있다. 나는 기대감을 눈에 띄게 드러내며 앉아있었다. 그리고 이내 문제의 청어 우동이 자태를 드러냈다.


"오."

내 첫마디는 그러했다. 숱하게 사진으로 찾아봐 알고 있는 비주얼이었건만, 실제로 접했을 때와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큼직한 그릇 위에 생선이 있었다. 튀김도 아닌 조려낸 생선 하나가 통째로 풍덩 담겨있었다. 새로운 음식에 대한 도전 정신이 들끓는 나였고, 어지간한 해산물도 전부 먹어본 나도 이 미묘한 비주얼 앞에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충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짜는 젓가락을 생선 도막 위에 가져다 대면서 시작됐다. 부드럽게 부서지는 생선살, 의령 소바를 접했을 때와 비슷한 슴슴한 국물의 향기. 입으로 넣은 순간 퍼지는 짭쪼름하고 달큰한 맛의 향연. 익숙한 맛은 아니었으나, 비려서 못 먹겠다, 하고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훌륭했다. 극심하게 달아오른 내 기대감을 넘치도록 충족시켜주지는 못했으나 이 정도면 합격점을 줄 수 있는 맛이었다.


문제는 이쯤 되니 진짜 청어 '메밀'을 먹어봐야겠다는 나의 마음이었다. 새로운 시도를 즐기지 않는 언니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굳이 지인을 불러 먹으러 가고 싶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밥 먹고 집에 들어가 늘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탓이었다. 결국, 나는 혼자를 택했다.


혼밥을 잘하는 척 하지만, 사실 나는 혼밥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다. 뭔가를 먹겠답시고 밖으로 외출을 하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게다가 밥을 먹으며 휴대폰을 봐야 하는지 그냥 음식에 집중을 해야 하는지, 아무렇게나 먹어도 상관없을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편이기도 했다. 심지어 서울은 24시간 내내 배달을 시켜 배를 채울 수도 있는 곳이다. 왜 굳이 굳이 밖으로 나가야 하나. 생각하는 내게 있어 이 청어 메밀을 먹어보겠답시고 굳이 굳이 지하철을 타고 먼 곳까지 가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갔다. 굳이 굳이 청어 메밀을 먹어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주말을 반납하고 일어나 터덜터덜 지하철을 타고 청어 메밀 한 그릇을 향해 갔다. 우동보다 맛이 없으면 눈물을 흘려버리겠다, 생각까지 하면서.


"혼자요."

한 명이요, 하면 되는 것을 쭈뼛대느라 혼자를 강조하고 말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다음에는 한 명이라고 말하자, 괜히 입속말로 중얼대며 안내해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청어 메밀을 주문했다. 가격도 보지 않았다. 보면 가슴이 아파질 가격이라는 것은 이미 수 차례 딸깍거린 검색을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오."

두 번째 청어와 면발의 조합을 본 내 첫마디는 또 이러했다. 면발이 달라진 것 외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한 입을 먹었을 때, 이 또한 내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젓가락을 갖다 대면 부슬부슬 떨어지는 청어 살의 맛은 여전히 좋았다. 콧김을 내뿜을 때마다 뜨습게 느껴지는 향기도 좋았다. 배릿한 느낌조차 없는 구수하고 따끈한 육수와 달콤 짭짜름한 청어 살의 조합은 찰지지 않고 뚝뚝 끊어지는 메밀 면의 감촉을 보완해주는 완벽한 짝꿍이 되었다.


한 젓가락을 먹고 숨을 내쉬면 은은한 메밀의 향이 나고, 또 한 입을 먹으면 조화로운 맛이 혀끝을 부드럽게 감싼다. 홀린 듯 한 그릇을 비우고 짭짭 입맛을 다시며 생각했다. 아, 이거 과메기랑 비슷하구나. 하긴, 과메기도 청어로 만드는 거니까.


청어 메밀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메뉴는 아니다. 접하려 해도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왠지 모르게 망설이게 되는 메뉴다. 그러나 한 번쯤은 먹어볼 만한 조화가 담긴 한 그릇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실망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타인의 설명이 아닌 내 혀끝으로 탐해야만 알 수 있는 맛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메밀국수는 그 자체로는 단백질을 섭취할 수 없는 음식이다. 이에 지혜를 짜내어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할 방도를 찾은 것이 청어 메밀이다. 햇볕에 잘 말리고 간장에 살짝 조려낸 생선을 얹어내는 것. 그로 인해 맛을 더하고 부족한 영양소를 충족한다는 것. 일견 괴상해 보이는 조합에도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이토록 쉬이 상상할 수 없는 조합들이 있다. 보고 겪어온 길이 다르기에 어쩔 수 없이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게도 그런 인연들이 있다. 첫인상을 보고, 스쳐 지나가는 말투와 장면들을 보고 이 사람 나와는 맞지 않겠구나, 누군가의 파편만을 보고 선을 긋던 시절의 내가 있었다.


하지만 때때로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있다. 단편적인 조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맞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누군가의 어색한 태도가 사실은 낯을 가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마음에 들지 않던 언행이 사실은 나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건넨 좀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마 그런 것들로 계속해서 타인을 배제했다면 나는 내 친구의 웃는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나를 향한 배려가 얼마나 깊은지, 그가 던지는 농담들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영영 몰랐을 것이다.


누군가의 역사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모습은 순간의 판단으로는 절대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 타인과의 관계는 포장지로 잘 싸여있는 선물 상자 같다. 풀어보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어떤 것.


아마 나 또한 누군가에겐 그러한 모습으로 보였을 테다. 누군가의 배려와 인내를 통해 타인과 가까워졌을 터다.


이따금은 겪어봐야 안다. 먹어보지 않고는 맛을 상상할 수 없는 음식처럼.




[나일퍼치의 여자들]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인 유즈키 아사코의 작품이고, 처음 읽었을 때 그녀의 작품 중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작품에 나오는 두 주인공은 어울리지 않아도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언제나 부모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자란, 대기업 나카마루 상사 식품 영업부 소속의 시무라 에리코와 무엇이든 편하면 그만이라 생각하며 대강대강 살아가는 주부 블로거 마루오 쇼코. 에리코는 쇼코가 운영하는 <넙치의 불량 마나님 일기>의 팬이다. 틀에 박히지 않은 참신함과 자유로움에 매료된 에리코는 우연한 기회에 쇼코를 만나게 되고, 자신을 팬이라 소개하며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우정이 시작된다.


여기까지는 유즈키 아사코 특유의 여성 간의 우정을 다룬 작품처럼 보일 수 있다. 그녀는 여성들의 우정, 인간관계 사이의 미묘한 지점과 고민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이고, 언제나 따스한 우정으로 작품을 감싸 마무리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나일퍼치의 여자들]은 다르다. 너무 달라도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이상에 독단적으로 타인을 끼워 맞추려 하는 에리코는 쇼코와의 만남 또한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재단하고 불안해하며, 자신의 기대감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쇼코에게 분노마저 느낀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을 향해간다.


도무지 정상이라 부를 수 없는 에리코의 행동과 정신머리는 읽고 또 읽어도 언제나 경악을 자아낸다. 사람과 사람 관계 사이에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못하고 알고 지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이들에게 턱없이 높은 잣대를 들이댄다.


관계는 천천히 쌓아 올려야 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는 각자 넘지 않아 줬으면 바라는 선이 존재한다. 선을 넘어버린 순간, 누구도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선을 훌쩍 넘어버리고 그 사이를 뒤섞으려 하는 에리코의 모습은 어쩐지 기괴하게까지 느껴진다.


처음처럼 가벼운 관계를 지속해갔다면, 두 사람은 꽤나 괜찮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쇼코도 에리코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하기도 하니까. 시간을 들이고 들여 조심스럽게 다가갔다면 둘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넘어버린 선은 이질적인 색으로 섞여 되돌릴 수 없어진다. 투명한 물 한 컵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처럼.


사람에 대한 배려를 갖추고 선을 넘어가지 않게 조심히 대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 또한 새벽 분위기에 취해서, 술에 취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누군가의 선을 넘나든 적이 있었다. 누군가 내가 알고 있는 당연한 상식을 모른다고 해서 웃으며 놀려댄 적도 있었다. 반대의 경우도 겪어보았다. 그리고 반대의 입장에 섰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지난 길들이 부끄러워지게 됐다.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누군가와 깨지기도 다시 붙기도 하면서 관계를 이루는 방법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자신만의 수족관에 갇혀 자신에게만 옳은 잣대를 들이대며 상대가 자신에게 맞추어 주기를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는 있지만 나는 아직도 완벽하지 않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여전히 어렵고, 낯선 장소에서 어색하지 않은 척하려 입을 열다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이 또한 웃으며 넘어가 주는 이들이 있기에 또 한 번, 또 하루 조용히 성장해갈 수 있었다.


누군가의 허물은 가끔 관대하게 넘어가도록 하자.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남이 모른다고 해서 인상을 찌푸리고 날카롭게 가르치려 들지 말자. 나도 언젠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관계가 제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조바심을 내지 말자. 친밀해질 관계는 어떤 계기로든 친밀해지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누군가의 세계를 받아들일 때 나의 시야 또한 넓어진다.


관계란 그렇게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우며 또 재미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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