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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해담 Nov 14. 2022

히카루의 달걀

뭉글뭉글 달짝지근한 날달걀밥

그릇을 손에 들고 냄새를 맡는다. 희미하게 생선 냄새가 나지만 싫은 냄새는 아니다. 노른자의 진한 맛과 동물성 유지의 고급스러운 단맛이 섞인 듯한 절묘한 향이다.
숟가락으로 노른자를 건졌다. 혀 위에 올리고 핥듯이 맛본다. (중략) 매끈매끈 푸딩 같은 부드러운 감촉과 은근한 단맛, 노른자가 녹으면서 코로 빠져나가는 담백한 향까지 모두 탁월하다.
_모리사와 아키오, <히카루의 달걀> 中


귀찮음을 많이 타는 편이다.

다들 그렇게 산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정도가 조금 심하다. 빨래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청소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심지어 나가지 않는 날은 며칠 씻지 않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가끔은 이대로 살면 정말 인간 이하가 될 거야, 생각하며 대청소에 임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청소를 할수록 혼돈의 방구석이 되어가는 걸 보며 좌절하고 만다.


설거지를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면 어떻게 되는지 본 적도 있다. 주제가 음식이니만큼 식욕 떨어지게 할 상세한 묘사는 하지 않겠다. 어쨌든 나 스스로도 생활에 있어 게으른 편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다.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아무리 게을러도 잠은 오고 배는 고프다. 학생이던 당시, 가난한 대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가난한 대학생이라 오히려 뭔가를 먹을 기회가 찾아오면 놓치지 않았다. 청소는 하지 않아도 동전을 박박 모아 떡볶이 한 접시를 사러 나가기도 했고, 늦은 밤 술을 마시러 가자는 부름에도 사준다는 한 마디에 배를 채울 기회라며 후다닥 뛰쳐나가던 나였다.


주린 배를 채워주는 고마운 것들이 있다. 고향에서 종종 보내주는 레토르트 식품이나 몇몇 반찬들이 그랬고, 밥 먹으러 오라는 친구들의 부름이 그랬다. 그리고 달걀을 사는 날도.


달걀은 참 착한 재료다. 한 판을 사들고 오면 한동안은 걱정이 없다. 단백질에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해 건강에도 좋다. 달걀말이, 스크램블 에그, 라면에 넣어 먹어도 든든하고 죽으로 끓여먹어도 맛있다. 그뿐인가? 냉장고의 묵은 재료를 썰고 달걀 볶음밥을 하면 고소하고 풍부한 맛이 입안 가득 들어찬다.


프라이를 부쳐 밥에 비벼 먹으면 공수는 적고 맛은 일품이다. 매콤 달콤하고 짠기가 느껴지는 고추장에 들기름(개인적으로 참기름보다 들기름을 더 좋아한다.), 프라이를 슥슥 부치면 나물 없이도 괜찮은 비빔밥 맛이 난다. 간혹 씹히는 맛을 살려주는 기름진 참치를 섞어주면 정말로 맛있는 비빔밥 완성이다.


그러나 달걀로 만드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간단하고 맛있는 요리는 자취생의 친구, 게으른 자들의 광명이라 불리는 간장 계란밥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간장 계란밥에 관한 추억이 있다.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쉽게 즐길 수 있던 음식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간편하다. 계란말이처럼 타버릴까, 눌어붙을까, 속이 제대로 익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음식들처럼 손을 많이 타지도 않는다. 원하는 대로 구워서 밥에 얹고 간장과 참기름을 뿌린다. 그리고 비빈다.  쓱쓱 비빌 때의 소리는 귀를 즐겁게 하고, 입에 넣으면 짭짤하고 고소한, 달걀 특유의 향과 눅진한 노른자와 향긋한 간장이 밴 밥알의 향연. 아무리 귀찮은 걸 싫어하는 사람이라 해도 쉽게 해 먹을 수 있다. 설거지 거리가 적게 나온다는 것도 장점이다.


어렸을 때 먹었던 엄마의 달걀밥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참기름 대신 마가린을 넣어 간장과 달걀을 함께 잘 비벼준 달걀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큰 뒤에 내가 직접 해보니 느끼하기만 하고 맛이 없다. 대체 어떤 비율로 비벼야 하는 걸까, 여전히 내가 가진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다.


한 번은 달걀 프라이를 만드는 것조차 귀찮아 날달걀을 그대로 밥에 넣고 비빈적이 있었다. 생각보다 부드럽고 맛있었다. 세기의 대발견이라는 생각을 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이런 식의 달걀밥이 정석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히카루의 달걀>을 읽고는 한동안 날달걀 밥에 푹 빠져 살았다. 흰자는 분리해 굽고, 노른자만 밥 위에 얹어 쪽파를 뿌린 뒤 들기름을 둘러 먹기도 했다. 달걀밥 전용 간장이라는 것을 사서 먹기도 했다. 먹을 때마다 노른자의 진한 맛이, 따스한 밥을 녹진하게 감싸고 죽처럼 훌훌 넘어오는 부드러운 감촉은 한 그릇을 비우고도 다음 한 공기에 손이 가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리고 먹을수록 책에 나오는 궁극의 달걀밥이라는 것이 궁금해졌다. 책의 모델이 된 가게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먹기 위해 일본에 간다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행위 아닌가. 그렇다고 무턱대고 품질 좋은 달걀을 생산한다는 양계장에 찾아갈 수도 없다. 그렇게 궁극의 달걀밥이 머릿속에서 잊혀갈 즈음, 인터넷에서 보았다. '궁극의 달걀밥'을 만들어준다는 기계를.


물론, 궁극의 달걀밥을 한 번 먹어보겠다고 해외 배송을 시키지는 않았다. 놓을 자리를 찾을 수도 없고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웠다. 대신에 나는 근방의 가게에서 2천 원짜리 거품기를 구매했다.



흰자와 노른자를 솜씨 좋게 분리하고, 흰자를 거품기로 몽실몽실한 모양이 될 때까지 잘 휘저어준다. 갓 지은 밥 위에 구름 같은 흰자를 올린다. 마지막으로 꼭대기에 동그란 노른자를 톡 올려준다. 간장을 뿌리고 잘 비벼 먹는다. 일련의 과정은 그냥 날달걀밥을 먹거나 프라이를 부쳐 올리는 것보다 조금 더 귀찮다. 하지만 맛은 여전히 좋았다.


그냥 날달걀밥과는 다르다. 죽처럼 묽고 진득한 식감이 사라진다. 대신 조금 더 포근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혀끝을 맴돈다. 특별히 대단한 맛은 아니다. 하지만 소박하기에 꾸준히 손이 가는 맛이다. 눈을 번쩍 뜨게 하지는 않아도 계속해서 찾고 싶은 맛, 궁극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여전히 달걀 프라이를 반숙으로 부쳐 더운 김 나는 흰 밥 위에 턱 얹은 뒤, 간장과 참기름을 뿌려 비벼 먹는 쪽을 선호한다. 여전히 마가린과 밥의 비율을 알지 못해 마가린 간장 계란밥은 느끼하기 일쑤다. 여전히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날이면 대충 달걀을 까넣고 날달걀밥을 마시듯이 먹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먹을 때마다 어렸을 때 간장계란밥을 먹었을 때의 일들이 떠오르고, 아파서 입맛이 없어져 투정을 부릴 때 엄마가 비율 좋게 비벼준 마가린 간장 계란밥이 떠오른다. 아마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이에 얽힌 다양한 추억을 가지고 있겠지.


추억은 주로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잔잔함 하고 따스한 시간들이 모여 사람을 만든다. 떨어진 기력을 추켜올리고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추억과 그것이 깃든 음식은 사람을 웃음 짓게 만든다. 아마 그런 것을 보고 궁극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중식 뷔페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뷔페에 환장했다. 배가 터져 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아도 종류 별로 다 먹어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몸을 일으키고, 접시에 한가득 원하는 음식을 퍼담아 오는 기분이란!


중식 뷔페에 가기로 한 당일, 나는 임지연(친구, 가명)과 함께 뷔페로 향했다. 함께 뷔페 탐방을 하기로 한 남명신(친구, 가명)은 이미 먼저 와있었다. 길이 조금 밀리는 바람에 약속했던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장난스러운 사과에도 남명신은 관대하게(당시에는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ㅇㅇㅇ님"이라는 말과 제스처가 유행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남명신은 이 사과를 진저리 치며 싫어했다.) 이를 받아주었다.


중식 뷔페라 해서 단순히 짜장면과 짬뽕, 탕수육 정도를 생각했건만, 눈앞에 있는 다채로운 음식의 향연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찢어지게 부른 배를 잡고 뷔페와 다른 층에 있던 서점으로 배를 꺼뜨리기 위한 여정에 나섰다. <히카루의 달걀>은 그곳에서 만난 책이다.


밥을 그렇게 양껏 먹고도 음식이 나오는 소설에는 눈이 돌아갔다. 이따금은 진짜로 먹는 것보다 활자로 먹히는 이야기가 더 맛깔날 때가 있다.


내용은 단순하다. 관광지로 쓸 수 없을 만큼 내세울 것 없는 산골짜기의 호토하라 마을, 그곳에서 품질 좋은 달걀을 생산해내는 무상(무민을 닮아서 무상이라고 한다.)이 마을의 부흥을 위해 마을 깊숙한 곳에 날달걀밥을 세워 대성공을 거두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날 정도로 위기감이 없다. 장사가 잘 되지 않을라 치면 어디선가 우연히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물론 그 행운이 무작정 얻어걸리는 것은 아니다. 선천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잘 믿는, 누군가에 관한 순수한 애정과 선의를 지닌 무상의 곁에 그를 돕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 생긴 기적인 것이다.


순수한 선의는 좋은 미덕으로 여겨지지만, 이를 지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선하게 사는 것보다 양심에 잠깐 눈을 감을 때 사는 것은 훨씬 수월해진다. 끊임없는 반복 작업을 하다 보면 이거 하나쯤은 조금 대충 넘겨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 훨씬 편한 일이듯. 선한 사람으로 살며 자신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 것들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가끔은 혼자 손해를 다 떠 앉는 것 같아 보고 있는 나로 하여금 답답함을 자아내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그래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이잖아."

'조금만 대충 살아, 화도 내고 뭐라고 해. 아무도 뭐라고 안 해. 다 그러고 살아.' 하는 내 말에 그이들은 늘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하지 않으면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니 한다고. 타인의 잔실수가 반복된다고 화를 내는 것보다 조용히 다시 가르쳐 주는 것이 좋을 거라고.


돌이켜 보면, 나 또한 그런 이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왔다. 처음 맡은 업무에서 실수했을 때 냉소와 면박으로 일관하는 이들만 가득했다면 나는 아마 지금의 나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을 돕는 사람이 없었다면 내 주변은 조금 더 싸늘하고 힘든 공간이 됐을 터다. 세상은 그렇게 타인의 온기를 바탕으로 흘러간다.


착한 것이 호구 잡히는 것이라는 말이 정평인 세상에서 나는 얼마나 나를 지키며 살 수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최대한 많은 것을 좋게 생각해보려 한다. 불편해도 조금은 참아보려 한다. 나도 분명 누군가에게 그런 선의를 받았을 테니까. 불편은 내가 받았던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 생각하려 한다. 꼭 보답받지 않으면 어떠랴. 내 마음이 떳떳한 것으로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일 텐데.


아마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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