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커피를 마신다. 가끔 차를 마시기는 하지만 언제나 습관적으로 커피를 찾는다. 특히 아침에 커피를 못 마신 날이면 하루종일 숙제 못한 학생마냥 전전긍긍이다. 이제는 커피를 줄여야 하는 나이가 되어서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정말 소중한 한 잔이다. 언제까지고 커피 마시지 말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애주가 또는 애연가에게 의사가 건강을 위해서 금주와 금연을 권고하면 그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꽤나 크다고 들었다. 나에겐 아마도 커피가 그런 기호식품일 것이다. 못 마신다고 큰일 나지 않지만 너무나 큰 상실감을 안겨줄 기호식품.
내가 커피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3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 가까이 같은 반 급우가 살아서 친구가 되었었다. 우리 집은 작은 아파트였고 친구는 널찍한 가정주택이었다. 딱 봐도 꽤 부유해 보였다. 학용품이나 옷차림이 근사했었고 게다가 예뻤다. 나는 같이 공부하자는 친구말에 기꺼이 그 집에 드나들게 되었다. 시험기간에 친구집에 가서 공부를 했는데 친구 엄마는 흔쾌히 공부하다 가라고 말씀하시고 외출하시곤 했다. 나중에 친구에게 들었는데, 나는 공부 잘하는 친구라고 엄마에게 소개해서 나의 방문을 허락받았다고. 나는 그리 공부 잘하는 애는 아니지만 그 친구보다는 성적이 좋다는 핑계로 친구 엄마의 호감을 얻었나 보다. 다행히 "느이 아부지 뭐 하시니?" 같은 질문은 받지 않았다. 친구집에선 친구방에서만 놀았다. 공부보다 더 많은 수다가 있었으니 놀았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하긴 그 친구는 공부보다는 다른 것들, 예를 들면 연예인이나 친구 오빠들, 특히 성당 오빠들에게 더 큰 관심을 보였었다. 나와는 관심사가 달라 결국 속 깊은 친구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나중에 꽤 이른 나이에 나이차 좀 나는 사람과 결혼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을 뿐 우리의 인연은 짧았다.
그런 시험기간 어느 날 그 친구는 내게 커피를 내어줬다. 나에게 커피란 어른들의 음료여서 학생인 우리들에겐 금기식품으로 알고 있었기에 적잖이 당황했었다. 그러나 그 애는 잠 안 오게 하는 거니까 시험공부할 때 좋다며 권했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일탈행위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황홀하다니!!!"
일탈의 맛은 황홀지경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 믹스커피의 첫맛은 금기를 깨는 쾌감과 더불었기에 더욱 근사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커피의 세계에 입문했다.
그 친구는 또 하나의 황홀경을 내게 안내해 주었는데, 그것이 "영웅본색"이었다. 어느 날 비디오를 하나 같이 보자며 내 손을 이끌었는데, 그때의 충격은 아마도 내 평생을 갈 것이다. 그렇게 사춘기에 접한 홍콩누아르의 첫 작품이 영웅본색이 되었다. 나는 비디오가 뭔지도 모르는 촌년이었고, 그 아이는 오빠가 둘이나 돼서 어른들의 세계를 꽤 빨리 접하는 막냇동생이었다.
그 비디오도 작은 오빠가 대여해 온 것이라 했다. 그 비디오를 보고 나서 펄떡거리던 심장의 고동소리는 지금도 기억날 듯하다. 정말 충격적으로 아름답고 슬펐다. 지금 돌이켜 그 영화를 생각하면 실소가 나오지만, 감성지수가 폭발하던 그 시절에 그 영화는 어린 영혼을 울리기에 지나칠 정도로 장렬했었다. 그 뒤로 많은 영화들을 보았지만 그 시절 만났던 영웅본색만큼 날 충격에 빠뜨린 영화는 없지 싶다. 영화가 훌륭해서라기보다 그 시절 내 감성이 그러할 때 딱 그런 영화를 만났기 때문일 거다. 내게 추천할만한 영화를 꼽으라면 다른 영화들이 떠오르지만, 가장 충격적이었던 영화를 꼽으라면 바로 이 비디오판 영웅본색이다.
그러면서 그 당시, 왜 세상엔 내가 모르는 황홀지경이 이리도 많은 건지, 이 친구가 아는 세상은 도대체 얼마나 더 다채로운 건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때 그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요즘에 나는 모카포트 커피나 필터 커피 또는 캡슐커피를 번갈아 이용한다. 카페는 잘 가지 않는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 조카를 보니 요즘 한국에서 카페는 평범하고 익숙한 장소가 된 듯한데, 나에게는 낯설고 익숙지 않은 곳이다. 나는 젊을 때 주로 술집에 갔던 것 같은데... 하하.
카페는 안가지만 믹스커피는 그 친구의 안내를 기점으로 아주 익숙한 음료가 되었고 학교 근무하면서는 더욱 없으면 안되는 음료였다. 그러다 독일 생활하면서 믹스커피를 잊어가다가, 마트에서 독일 믹스커피를 발견하였다. 어머! 얘들도 이 맛을 아는 건가?
가끔 달달한 믹스커피가 생각날 때가 있다. 하늘이 꾸리꾸리하거나, 부슬부슬 비가 내리거나, 괜히 심사 요란한 날엔 믹스커피 한 잔이 땡긴다.
그렇게 홀짝거리며 마시다 보면 , 이쑤시개 이에 물고, 구멍 숭숭 난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건치를 자랑하며 웃던, 선글라스 낀 주윤발 아저씨의 미소가 떠오른다. 그 빛나던 미소가 참으로 애잔했는데.
우리의 빛나던 청춘도 이제 영화처럼 빛바랬다.
믹스커피를 즐기던 청춘들도 이제는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시는구나.
내게 어른들의 세계로 안내해 준 그 친구는 어른으로 사는 걸 즐기고 있을까? 잘 살고 있기를.
영웅본색은 이제 나의 추억 속에서만 상영될 것이다. 이제사 다시 보면 그 시절 그 느낌을 잃어버릴 것이 분명하니까. 세상엔 추억 속에만 남겨두어야 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믹스커피는 달달하고 쓸쓸하고 애잔한 맛이다. 영웅본색을 보았던 과거 소녀였던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