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병을 앓을 너'를 키울 예정인 나'를 위한 기록
아이가 어릴 때, 인간은 네 살까지 그 인생에 할 효도를 모두 몰아서 해버린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귀엽고, 그래서 그렇게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었는데, 올해 한국 나이로 열 살이 된 우리 집 어린이를 키우면서 나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열 살은 원래 이렇게 아름다운 나이었었나.
나의 열 살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본다.
십 대라고 부르기에도 뭣한 그 시간에 대해 이렇다 할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3학년 몇 반이었는지, 누구와 가장 친했었는지, 무엇을 할 때에 가장 행복했는지, 학교가 끝나면 뭘 하고 지냈었는지... 별로.. 기억이 나지 않아서 당황스럽다.
얼마 전부터 아이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6시 50분에 알람을 맞춰두고 스스로 일어난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옷이 있는 방으로 가서 그날 입을 옷을 골라 갈아입고, 다시 침대로 들어가 내가 자기를 깨우러 오는 7시 15분까지 조용히 오디오북을 듣는다.
"아침이야. 일어나~"
커튼을 걷으며 아침 인사를 하는 내게 아이는 싱긋 웃으며 인사한다.
"굿모닝!"
어느새 비어있는 자신의 시간에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적절하게 스스로 배치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아이를 보면 언제 이렇게 컸나 싶다. 여전히 연필은 신기하게 잡고 쓰지만 노트 빽빽이 쓰인 반듯한 글자를 보면 더 이상 '연필 똑바로 잡아'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밥 빨리 먹자. 피아노 숙제는 다 했니? 오늘은 머리 감아야지? 등의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지만, 그뿐이다. 아이는 이제 혼자.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성실하고 무던한 아이이다.
주말에 캠핑을 가서도 토요일 아침에 zoom으로 진행하는 한국학교 수업을 들어가야 한다고, 아이는 2시간을 차 안에서 혼자 수업을 듣는다. 음악회에 다녀오느라 늦게 들어온 날, 성당 주일학교 숙제를 미리 하지 못했다며 아이는 자정이 다되도록 성경을 읽고 흐트러짐 없는 반듯한 글씨로 내용을 요악한다. 수업에 들어가지 못해도 되고, 숙제를 하지 못하는 날도 있는 거라고 이야기해줘도 소용없다. 아이에게 제일 하기 싫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고작 '머리 감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내 몫은 그저 성실함도 약간은 타고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원래 열 살은 이런 것인지 아닌지 나는 영원히 알지 못한다. 외동아이를 키우는 일의 장점 중에 하나는, 내 아이가 가진 고유의 흐름을 '정상'으로 받아들이고 '비교하지 않음'이다.
열 살은 원래 이렇게 그림 같이 아름다운 나이인걸까.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두려움에 빠진다.
조금 더 먼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친구들에게 들은 무시무시한 사춘기라는 병에 대해서 미리 공포를 느낀다. 내 아이에게 무시무시한 그 병이 2,3년 내에 찾아온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적어도 그림자 정도는 미리 보여줘야 내가 충격을 덜 받을 텐데. 앞서 생각한다.
사춘기 아들을 키우고 있는 친구에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춘기병에 대해 주워들은 지식을 총집합시켜) 어쭙잖은 위로와 조언을 건넬 때면 그녀가 하는 말이 있다.
"그ㅈㅅ은 원래 그랬어! 어릴 때부터 뭐 하나 쉬운 게 없었어!!"
분노에 찬 그녀의 대답은 진심이다.
그러면 나는 더 큰 두려움에 빠진다.
원래 그랬다는 그 녀석의 엄마, 내 친구, 도 대 혼란에 빠져 하루하루를 힘들어하는데.
이렇게 달콤한 비현실 세계에 있다가 병적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될 나의 충격은 얼마나 클 것인가!
그래서 충격에 휩싸여 방황할 '근미래의 나'를 위해서 생각날 때마다 너의 선행과 아름다움을 기록해 두려고.
이름도 거창한 '제목을 정하지 못할 너의 전기'이지만.
그래서 이 매거진을 쓰기 시작한 거다.
근미래의 나와 혹여 먼 미래의 너를 위해서.
딱히 치밀하지도 못하면서 계획 세우기는 즐겨하는
이것은 내 병이다.
너의 병을 맞이할 나의 병이
지금 미리 애쓰고 있다.
[ 표지 사진 출처 ] incognitoartists.com/blog/the-calm-in-the-storm-of-uncertain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