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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새 Dec 19. 2022

불혹의 취미 생활

미혹에 의미를 두고 정성을 다하는 것

불혹.

나이 40세를 이르는 말.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공자가 40세에 이르러 직접 체험한 것으로,
《논어》〈위정편〉에 언급된 내용이다.



십 대에 공자식 '나이 나누기'를 배웠을 때, 마흔은 마치 세상을 다 산 나이처럼 느껴졌었다. 

어느새 불혹을 넘겨 몇 해를 살아보니, 슬프게도 공자식 정의가 자꾸만 수긍이 간다. 

무엇인가에 정신없이 미혹되기가 힘들어져 버렸다. 하고 싶은 일도, 가고 싶은 곳도, 갖고 싶은 것도 쉬이 타오르지만 더 쉽게 꺼져버린다.

불혹.

무엇에도 미혹되기 힘든 나이.

그래서 안정적이고 평탄하지만 핵노잼이 되기 쉬운 나이.


예전에는 새해가 되면 거창한 목표를 세우곤 했다. 

친구, 시험, 진학, 취업, 승진, 연애, 결혼, 임신, 출산 등의 삶의 거창한 단계들이 내 앞에 놓여 있었고, 나는 그것 중에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골라 목표로 삼으면 되는 거였다. 

시간은 굉장히 타이트하게 흘러갔고, 날마다 시간의 밀도가 높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앞으로 달려갔던 것 같다. 그러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 오면, 나름대로 정리란 것을 하고 새로운 목표가 기다리는 새해로 넘어갔었다.


지금은 뭐랄까 시간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다사다난 하지만 쉽게 미혹되지 않으므로, 체감상 시간의 밀도가 낮아진다. 

아직은 그럴 나이가 아닌 것도 같은데, 그냥 그렇다.

분명히 바쁘게 지내고 있음에도, 나의 시간은 어딘가 헐렁하고 힘이 빠져 있다. 




올 한 해, 내내 나와 함께 했던 건 취미 생활이다.

코로나 팬더믹으로 몇 년째,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열풍이라는 골프.

나도 그 열풍에 제법 열심히(라고 하기엔 조금 더 열심히) 참여 중이다.

수년 전에 골프채도 마련하고, 레슨도 받아놨지만, 도무지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골프라는 운동(이 안될 것이라는 편견마저 더해서)이 이제 내 생활에 제법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족 스포츠'가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많은 골퍼들이 자식들과 함께 가는 라운드를 꿈꾼다. 4~5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성격(이 경기중에 고스란히 나온다!)을 재확인하고 돈독하게 시간을 보내기에 골프만 한 운동이 없다. 숨을 헐떡이며 땀을 빼는 운동이 아니다 보니, 늙어서도 계속할 수 있다. 골프는 늙어가시는 부모님과도 커가는 자식과도 함께하기에 꽤나 괜찮은 운동이다.


미국에 사는 장점 중에 하나는 (물론 골프를 치는 측면에서) 골프가 그다지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골프장에 캐디라는 존재도 없고, 체력이 허락한다면 카트도 타지 않고 골프를 칠 수 있다. 내가 자주 가는 동네 골프장의 평일 라운드 비용은 $55이다. 걸어서 치면 $37만 지불하면 된다. 심지어 아이들의 골프 비용은 더욱 싸서, 시간에 따라서는 아이 몫으로 $10 미만의 골프피를 내기도 한다. 평균 한 번의 라운드가 4시간 반 정도 소요되니 시간당 들어가는 비용이 그렇게 크지 않다. 게다가 넓은 땅 덩어리를 갖고 있는 나라라, 우리 집에서 30분 이내에 있는 골프장만 해도 10개쯤은 되는 것 같다. 한국의 세련된 편리함을 포기하고 사는 대신, 골프를 즐기는 것은 여기서 누릴 수 있는 제법 괜찮은 장점 중에 하나이다.


골프는 18개의 작은 홀에 골프공을 넣는 것이 목표인 운동이다. 몇 번을 쳐서 들어가도 상관이 없다. (물론 너무 많이 쳐서 시간이 지체되면 경기에 지장이 있어 적당한 수준의 정확성은 가지고 필드에 나가야 하긴 한다.) 18개의 작은 홀에 골프공을 넣기까지, 나의 전체 타수를 줄여가는 것이 골퍼들의 목표이다. 

물론 타수가 적은 골퍼가 그 그룹의 승자가 되는 것이지만, 아마추어 골퍼들에게 동반자의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타수이다. 내 타수가 어제보다 오늘 줄어든다면, 기분 좋게 경기를 마무리할 수 있다. 나는 초보 골퍼로서 골프의 매력을 여기서 느낀다. 오롯이 '나의 숫자'와 약속하고, '나의 숫자'와 싸울 수 있다는 심플한 점이 나를 올 한 해 골프와 함께하게 했던 원동력이다.




이게 정말 뭐라고 올 한 해 골프와 함께 울고 웃었다. 

많이 걷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쓸 때 없는 생각들을 내려놓고, 순간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내 몸을 들여다보고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다른 운동들도 시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불혹의 나이에도 무엇인가에 오랜만에 미혹되어 좋았다.


2022년을 시작하며 세웠던 나만의 골프 목표가 있었다.

한 번은 꼭 두 자리 타수를 만드는 것. 

매번 근처에 머무르면서도 결국은 아직 못 이룬 나의 목표. 

소소한 이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고 세상에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너무 잘 안다. 아니, 나에게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나를 미혹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불혹의 취미 생활에는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미혹에 의미를 두고 정성을 다하는 것은

핵노잼으로 살고 싶지 않은 삶에 대한 나의 예의이다.




한해를 2주 남기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동네에서 가장 쉽다고 하는 골프장을 예약해뒀다. 

내년에도 여전히 골프에 미혹되어 나만의 숫자와 싸우기 위해서.

2023년의 숫자를 설정하기 위해서.

2022년의 마무리를 위해.

무엇보다 사십대의 나를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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