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비로운별 Apr 19. 2021

그놈의 돈이 뭐라고

눈치 보며 꾸는 꿈

폰 가장자리에 노란색 불빛이 일렁이며 책상에 진동을 울린다. 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출금 알림.


현재 내 나이는 빠른으로 치면 스물다섯, 법적으로 따지면 스물넷. (빠른 년생이지만 이 악습은 하루빨리 사라져야 했다) 지금도 아직 젊다고 할 수 있는 이 나이지만 당연하게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예전과는 달리 얹혀 산다는 느낌이 스스로 강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아직 대학교 3학년, 휴학은 발전과 여가의 시간이 아닌 오로지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만 강제적으로 했고 바로 복학했다. 사실 어쩌면 달콤한 휴학이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고 해야겠다.


아직 부모님께 충분히 손을 벌릴 수 있는 시기이지만 다음 학기부터 등록금까지 내가 내기로 하면서 이제 집에 얹혀사는 것 말고는 통신비, 자기 관리 비용 등 내가 살면서 드는 대부분의 비용을 내가 부담한다.




우리 집에서 온 가족이 모일 때는 드물다. 아빠가 집에서 먼 타지에서 근무하셔서 명절에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일 년에 보는 날을 손에 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이런 손에 꼽는 날들을 애타게 기다리진 않았다.


마침내 온 가족이 모였던 날은 늘 돈 얘기뿐이었다. 그래도 자식들 들을까 조심히 말한다는 모양새였긴 했지만 호기심과 장난기 많던 초등학생 소년은 이를 들으며 더 이상 용돈을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고, 이 소년은 점점 자라며 집의 재정 상황을 스스로 알게  모든 것을 돈과 연관 짓는 애늙은이가 되었다.


"신발? 그거 다 돈이야~", "연애를 왜 안 하냐고? 그것도 다 돈이야~ 나 밥 먹을 돈도 없는데 무슨..."


이렇게 반강제적이고도 자발적으로 시작한 경제적 독립은 스무 살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시작됐다. 미성년자라는 족쇄를 풀어헤치고 아르바이트 구직이 자유로워진 나는 스스로 돈을 벌어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그렇게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돈을 벌었고, 통신비부터 교통비, 자기 관리 비용, 이제는 드디어 학비까지 독립을 선언하면서 어느 정도 금전적 부담을 덜어드렸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했다.


하지만 이는 내 착각에 불과했다. 점점 평화를 찾아가는 듯했지만 코로나19로 아빠의 실직이 잦아지면서 그놈의 돈타령은 끊이질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동생은 돈이 생기기만 하면 써대고, 한 동생은 학원을 다녀도 형편없는 성적이었는데 계속 학원에 보내달라며, 태블릿을 사달라며 떼를 쓴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껴있는 나,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공무원을 알아보라는 아빠의 말은 어쩌면 빨리 집에 보탬이 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학비를 이제 내가 내겠다는 말에 안도하는 듯했던 엄마의 표정은 더 빠른 경제적 독립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지금 내가 나 좋다고 꿈을 꾸는 것이 아닌, 공장에 들어가서라도 집에 보탬이 되는 것이 맞을까.


보통 가난은 대물림된다고 했던가. 마냥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부모님은 내게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 걸까. 갖가지 생각이 다 들면서 오늘도 나는 눈치를 보며 꿈을 꾸고 있다.


도대체 그놈의 돈이 뭐라고.

작가의 이전글 우리만의 사진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