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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Park Aug 05. 2021

슬픔이 물밀다

삶이 늘 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누군가가 오래전 해준 이야기인데 마음에도 옷이 있다고 합니다. 내 마음에 꼭 맞는 옷을 찾는 것은 내 몸에 꼭 맞는 옷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합니다. 내 마음보다 옷이 작으면 숨이 막혀 지쳐버리고, 내 마음보다 옷이 더 크면 그냥 쏙 하고 빠져나가 버리게 됩니다. 그러다 가끔 내 마음에 꼭 맞는 옷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꼭 맞는 옷을 찾은 느낌은 향긋한 차를 마신 뒤 혓바닥 뒤쪽부터 은은히 올라오는 기분 좋은 잔향처럼 자뭇 오래 스며듭니다. 그런데 가끔씩 마음이 변할 때가 있습니다. 눈치채지 못한 채 마음이 점점 자라거나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사람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변했다고 탓하며 말이죠.


오래 지나고 나서 느낀 점은, 우리네 마음이 그렇게까지 변덕스럽다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건 이상합니다. 때에 따라서 자라기도, 줄어들기도 하니까요. 전에 누군가 추천해서 들어본 노래 구절에 갸우뚱하다가도 한참이 지난 후 들어보면 내 마음에 쏙 들기도 합니다. 전에 만난 누군가의 첫인상이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다가도 나중에 생각해보면 좋은 인연이었다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하루에도 수천번씩 바뀌는 게 사람 마음이거늘,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제법 깨달아집니다.


조금은 낙관적인 태도를 가져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원체 줏대 없는 놈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삶의 관계들 사이로 여유가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학교나 일터에서 사귄 친구나 동료가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인가 보다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똑같거나, 냉면 주문할 때 둘 다 오이를 빼 달라고 할 때나 어떤 날 입고 온 셔츠와 바지의 색이 똑같을 때. 괜스레 생각이 나서 이것저것 챙겨주기도 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놀러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관계가 깊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레 변해가는 서로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라는 나무처럼 그 줄기가 내 쪽으로 기울 때도 있고, 반대로 멀어질 때도 있습니다. 물론 그 변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좋게 바라보고 응원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말했듯이 사람 마음이란 건 자기도 모르는 겁니다. 가끔 전과는 달라진 모습에 실망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해서 밥을 살 때도, 생일선물을 사줄 때도 아끼지 않았는데 자꾸 계산대에서 신발끈을 만지작 거리는 모습을 보며 고민이 많아집니다. 열심을 다해 서로를 동기부여하며 밤낮으로 같이 붙어서 일했던 일터의 파트너가 불꽃을 잃어가는 모습을 볼 때도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그 이의 탓도 아니고, 나의 탓도 아니고 그냥 각자의 삶의 방향대로 흘러간 것임을 기억하기로 합시다. 인연이라면 나중에 또다시 가까워질 순간이 찾아올 것임을.




인간이란 손님이 머무는 집,
날마다 손님은 바뀐다네.
기쁨이 다녀가면 우울과 비참함이,
때로는 짧은 깨달음이 찾아온다네.
 
모두 예기치 않은 손님들이니
그들이 편히 쉬다 가도록 환영하라!
때로 슬픔에 잠긴 자들이 몰려와
네 집의 물건들을 모두 끌어내 부순다고 해도
손님들을 극진하게 대하라.

새로운 기쁨을 위해 빈자리를 마련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어두운 생각, 부끄러운 마음, 사악한 뜻이 찾아오면
문간까지 웃으며 달려가 집안으로 맞아들여라.
거기 누가 서 있든 감사하라.
그 모두는 저 너머의 땅으로 우리를 안내할 손님들이니.

잘랄루딘 루미, <여인숙> 전문


루미의 시는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분은 어땠는지, 마음속으로 어떤 손님이 찾아왔는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잠자리를 구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지내다가 떠난 고마운 손님이었는지, 이불이 더럽다고 화를 내느라 밤새 잠들지도 못하다가 급기야 집을 부수기 시작했던 난폭한 손님이었는지. 태풍이 분다고 강물의 방향을 거스르지는 못한다는 말처럼 우리의 마음속으로 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우리는 언제나 우리일 뿐, 그 손님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속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기꺼이 맞이하기를. 그가 어떤 사람이든 화를 내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말기로 합시다.


오랜 타지 생활을 마치기까지, 저의 삶에도 수많은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때로는 조금 더 오래 머물기를 바랐던 기쁨의 순간이 있었고, 때로는 내게서 빨리 떠나기를 바랐던 슬픔의 나날이 있었습니다. 어떤 기쁨은 내 생각보다 더 빨리 떠나고, 어떤 슬픔은 더 오래 머물렀지만, 기쁨도 슬픔도 결국에는 모두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들은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손님들일 뿐이니, 매일 저녁이면 내 인생은 다시 태어난 것처럼 환한 등을 내걸 수 있으리라는 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오든 마다하지 않았으나,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도 또 일어난 뒤에도 여인숙은 조금도 바뀌지 않듯이.


삶의 오르막 내리막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현인들이 미리 알았고 또 우리가 알게 된 삶이란 그런 겁니다. 밑도 끝도 없이 들이미는 주먹 같은 거죠. 피할 새도 없이 날아오는 주먹은 맞으면 아프지만, 가끔 열어보면 작은 선물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커피맛 사탕이라던지 네잎 클로버 같은 거요. 눈 감을 새도 없이 들어온 주먹을 피하려다 넘어져 손바닥이 다 까지거나,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명치 부여잡고 바닥에 무르팍 대고 꺽꺽거릴 때. 그럴 땐 시나트라 형님이 that's life~ 하고 노래한 것처럼 삶이란 게 그런 거라고 눈물 한 방울과 함께 쿨내나게 넘겨버리면 되는 겁니다.




피터 위어 감독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극 중 주인공 '존 키팅' (로빈 윌리엄스 분)이 한 유명한 라틴어구가 있습니다. Carpe diem, 영어로는 'Seize the day', 흔히 '오늘을 살아라' 혹은 '현재를 즐겨라'라는 말로 번역되고는 하는데 사실 이 말은 로마의 유명한 시인 호라티우스 Horatius (B.C. 65 ~ 8)의 송가頌歌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시구입니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오늘을 붙잡게,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고.


인간은 오늘을 산다고 하지만 어쩌면 단 한순간도 현재를 살고 있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과거의 한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때와 오늘을 비교합니다. 미래를 꿈꾸고 오늘을 소비하죠. 기준을 저쪽에 두고 오늘을 이야기합니다. 그때보다, 그때 그 사람보다, 지난번 그 식당보다, 지난 여행보다 어떤지를 이야기합니다. 나중에, 대학 가면, 취직하면, 돈을 벌면, 집을 사면 어떻게 할 거라고 말하죠. 아마도 지나간 날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내일은 불명확하고 오늘은 이야기하기 애매한, 그런 생각이 반영되었을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유학생 시절 무렵의 일들은 무슨 전생의 일들처럼 까마득합니다. 혼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야 그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떠오를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때 괴롭고 힘들고 고민스러웠던 일들은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물론 뭐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는 기억나지만, 고통이라는 건 실제적인 아픔이지 머릿속 기억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인지 되살아나는 감각들은 모두 좋았던 것들뿐입니다. 감각적으로 우리는 고통에 훨씬 더 쉽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지만, 당시에는 세상 전부인 것처럼 나를 괴롭히던 그 고통은 하루만 지나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즐긴 것들은 평생을 가니까, 가능하면 그런 일을 더 많이 해야겠습니다. 크레타 섬에서 책의 화자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한 것처럼 행복한 순간에 행복할 것. 그 행복을 마음껏 음미하고 맛볼 것.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인 듯싶습니다.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 (이따금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 크레타 섬에서 나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불행하게 사는 것도, 과거에 메여 오늘을 보지 못하는 것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0대 청소년에게도, 20대 청년에게도, 40대 중년에게도, 70대 노인에게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때이고 가장 행복해야 할 시간입니다. 시인 호라티우스와 키팅 선생의 말은 내게 주어진 오늘을 감사하고 그 시간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보내라는 속삭임입니다.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복을 보장할지 장담할 순 없지만 오늘을 행복하게 산 사람의 내일이 불행하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카르페 디엠, 오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살아가다 보면 슬픔이 물밀듯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 생긴다고 해서 자신이나 다른 이를 탓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사실 이 슬픔이라는 놈은 기쁨과 같이 밀물과 썰물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왔다가 가버리고는 하는 녀석입니다. 그 조수간만의 차이, 기쁨이 물밀고 슬픔이 물써는 만큼, 딱 그 정도만 우리네 삶에도 여유를 덧댈 수만 있다면 우리의 마음속으로 기쁨과 슬픔이 맘껏 드나들어도 개의치 않을 만큼의 여백이 생겨지지 않겠습니까? 기쁨이나 슬픔, 둘 중 어느 것에도 메이지 않고 그들은 단지 여인숙을 찾는 손님임을 기억하기로 합니다. 점잖은 손님이던 성질 더러운 손님이든 간에 극진히 대접하는 여인숙 주인의 모습처럼 어떤 하루던, 그게 슬프던 기쁘든 간에 최선을 다해 행복하며 살아가기. 매일 행복할 수는 없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현재를 즐길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삶이 늘 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운율은 있다. 생각의 궤적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주기성이 마음의 경험을 지배한다. 거리는 가늠되지 않고, 간격은 측량되지 않으며, 속도는 확실치 않고, 횟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도 되풀이되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주나 지난해 마음이 겪었던 것을 지금은 겪지 않으나 다음 주나 다음 해에 다시 겪을 것이다. 행복은 사건에 달려 있지 않고 마음의 밀물과 썰물에 달려 있다.
(...)
사람은 삶의 주기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거나 늦게, 너무 늦게 깨닫는다. 왜냐하면 경험이 쌓여야 알 수 있는 문제이며 누적된 증거가 없는 탓이다. 삶의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주기성의 법칙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어떤 것이 지속되리라는 희망이나 두려움이 없어진다. 젊은 시절에 위대한 성취를 꿈꾸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삶은 너무나 길어 보이고, 너무도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삶에 필요한, 삶이 가져야만 하는 그 모든 간격 - 열망과 열망, 행동과 행동 사이의 간격, 잠을 위해 멈추는 시간들처럼 피할 수 없는 멈춤들 - 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는 셰익스피어의 구절에 더 미묘한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마음에 평화가 있으리라.

기쁨은 우리에게 오는 길에 이미 우리를 떠난다.
우리의 삶도 차고 질 것이다.
우리가 현명하다면 삶의 리듬에 따라 깨고 쉴 것이다.


앨리스 메이넬, <삶의 리듬> 중




참조: 한동일, <라틴어 수업>. 리처드 라이트, et al., <천천히 스미는>.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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