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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Park Jul 19. 2021

아무것도 아니고 싶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린 시절 친구들과 담론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마 불가능할 거란 입장이었던 듯해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어쨌든 생각이니,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죽어야 하고 반대로 살아있는 한 우리는 계속 생각의 굴레에 갇혀있다.. 뭐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과도 비슷하네요.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종전에 말한 대로 우리는 살아있는 한 필연적으로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땐 어떡해야 할까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가까운 무념無念의 경지에 다다르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무념무상, 불계지주라는 단계를 오랜 수련을 통해 다다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요, 당장 나를 괴롭게 하는 상념과 수심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데.




서구에서 쓰이는 말의 'no, non, ne, nein' 등의 부정부사는 고대 인도 유럽어의 '부정'을 뜻하는 개념, '밤에 흐르는 물'의 모호함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오랜 옛날에는 깜깜한 밤을 밝은 바다의 움직임이 끝나고 어두운 바닷물이 땅으로 흘러와 생기는 현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뭘 봤니?"라고 물으면 "물(न, na)만 보았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만 보았다"는 대답은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도 유럽어의 물을 상징하는 '나, na'라는 음소에서 '아니다'라는 부정부사 'no, non'이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에도 '아니'라는 부정은 인도 유럽어처럼 밤에 흐르는 물을 상징하는 표시:

로 나타내었고, 이후 산스크리트어의 부정부사 'na'가 그리스어 'né'가 되고, 라틴어로 'ne, non'이라는 부정부사가 된 것입니다.




저는 종종 서해바다를 찾습니다. 그것도 저녁때가 한참 지나서 조명도 다 꺼지고 찾는 발걸음도 없어진 그때에. 수평선과 하늘의 경계가 무뎌져 없고 다만 오롯이 빈 것으로 바라보는 자들을 눈멀게 하는 그 거대한 자유의 초상을. 경기만의 바다는 밀물 때 가득하고 썰물 때 아득합니다. 이곳의 빛은 어둠과 대척을 이루지 않습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지 않고 어둠이 빛을 걷어가지 않습니다. 빛과 어둠은 지속되는 시간의 가루들을 서로 삼투시켜가면서 교차되는데, 그 흐름 속에 시간과 공간은 풀어져서 섞여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빛이 공간 속을 드나드는 모습과 바닷물이 시간 속을 드나드는 모습이 닮아 있습니다. 이 흐름 속에서 시간과 공간, 어둠과 밝음, 채움과 비움처럼, 사람이 세계의 골격으로 설정해놓은 개념들은 스스로 소멸합니다. 그 깨달음은 문득 자유롭습니다.


부두까지는 육지와 인공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도보로 드나들 수 있지만 시야 너머까지 갯벌이 펼쳐져서 뚝방길로 걸어가는 보행자의 모습은 외해外海로 걸어 나가는 베드로의 모습과 같습니다. 보행자는 땅의 저항을 받아서 앞으로 나가지만, 갯가로 다가오는 보행자의 시야는 갯벌의 무한감에 빨려 들어가서, 발바닥 밑 땅바닥의 견고함은 문득 증발합니다. 멀거나 큰 풍경마저 보이지 않고, 기어이 보려는 자의 시선은 아득한 저편 연안에 닿지 못해 방향을 잃습니다. 그러면 꼭 나 자신도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일들 사이의 공백, 그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허무의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 자기 초월적이고 자기부정적인 경험에 대해서 불문학자이자 번역가인 길해연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래 걷다 보면 생각이 없어진다. 특히 혼자서 오래 걷다 보면 나 자신이, 생각이 없어지고 시선만 남는다. 사랑하기에 더없이 적당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짐을 진 듯 허랑한 상념과 잡감에 사로잡힌 나에게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무無의 모습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나를 침식하는 불안과 근심을 압도하며 풀어헤쳐버리는 그 거대하고 아득한 공허를 기억하기로 합니다. 시원始原에서 불어오는 듯한 바람과 별빛을 허파꽈리가 뻣뻣해지도록 들이마시며 그것으로 채워진 만큼, 속에 있던 외로움을 내뱉을 수 있었습니다. 외로워본 사람들은 압니다. 가장 외롭다고 느낄 때 무심코 바라본 밤하늘, 나의 이름을 안다고 말하는 작은 별 하나가 이 땅의 다른 어떤 불빛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나의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그들을 그리워하는 시간이다. 그리워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고, 아무 말도 없이 내면으로 고독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채사장, <열한 계단> 중



참조: 한동일, <라틴어 수업>. 김훈, <자전거여행>. 길해연, <마음은 천천히 그곳을 걷는다>. 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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