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drew Park May 08. 2022

슬픔의 수용성

내가 넘는 건 산이 아니라

슬픔은 수용성水溶性이라서 물에 녹는다고 합니다. 다른 노폐물들과 같이 땀이나 눈물과 같은 형태로 배출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슬픔이 차오를 땐 실컷 격한 운동을 하던지, 한바탕 울어재끼고 나면 한결 나아집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 눈물샘을 짜낼 힘도 없을 때에는 따뜻한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 오랫동안 서 있으면 어느 정도 슬픔은 녹아 떠내려갑니다.




저는 자주 산에 갑니다. 산에 갈 때마다 종종 주변 사람들이 묻곤 하는데 도대체 산에서 뭘 하냐는 겁니다. 이것저것 둘러대곤 했지만 정작 하고 싶었던 대답은 역설입니다. 뭘 하지 않으려 산에 가는 것에 가깝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닌 무슨 생각을 하지 않으려 가는 것.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이 모든 것의 존재 의의는 그것의 부재로 증명됩니다. 좋은 요리사는 무언가를 넣을 줄 아는 사람보다는 무언가를 넣지 않을 줄 아는 사람에 가깝고, 좋은 사상가는 무언가를 생각해낼 줄 알기보다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을 줄 아는 사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할 땐 무엇을 하며 사는지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하지 않으며 사는지 고민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배움이 부족한 탓인지 홀로 있을 때면 내 생각에 스스로 짓눌릴 때가 많습니다. 어느 설교자는 영적인 삶, 즉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기 위해선 자기 자아를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있다고 했는데, 알면서도 아직까지도 자아에 힘없이 휘둘려 다니곤 합니다. 자기 삶의 고갱이를 쥐어쥐지 못하고 그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삶, 내 삶의 엑스트라로 살아가는 삶이란 비참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영적 침체의 주된 문제점은 우리가 '자아'에게 말을 하는 대신 '자아'가 우리에게 말하는 데 있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의 불행은 우리가 '자아'에게 말하는 대신 오히려 '자아'의 말을 듣는 데 있습니다. 자신을 다룰 줄 아는 것은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기술입니다. 자신을 장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
자아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자아에게 덤벼드십시오. 자아를 책망하십시오. 야단치십시오. 권면하십시오. 자아에게 격려하십시오. 자아의 말을 듣다가 기운을 잃지 말고 주저앉지 말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실을 자아에게 상기시키십시오. 


마틴 로이드 존스의 말처럼 내 자아는 조그마한 불편이나 장애물도 삶의 동맥에 긋는 자상처럼 왜곡된 모습으로 투영시킵니다. 스스로 범람하는 끊임없는 무기력함과 절망과 두려움에 질식할 것 같은 때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나의 삶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 볼일 없는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삶이란 원체 그런 놈이기 때문이죠. 삶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살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 누구나 현재 일어난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 일을 대하는 방식으로 고난을 겪게 된다고 폴 트립은 쓴 적이 있는데 같은 책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상황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도 압력을 가한다. 고난은 우리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우리 안에 안정되게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고난의 이유를 알기 위해 고심하느라 마음을 지키키위해 싸워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린다." 삶이 나를 속이려들 때에는 다시 마음의 고향으로 회귀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이란 제 삶의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싸움터이자 내면의 중심을 다잡아주는 영적인 장소입니다. 


삶이 나를 덮치려 할 때, 그럴 때마다 산은 그 품을 내게 도피처로 내어주었습니다. 




손은 비누로 닦고 마음은 흙으로 닦는 것 같습니다. 


하루 일과 후 더러워진 몸을 비누로 씻어낼 수 있는 것처럼, 일상의 바닥에 들러붙은 삶의 침전물을 닦는 건 바로 흙과 바람입니다. 자연에서 얻는 위로는 그대로 에너지가 됩니다. 언어와 달리 가공되지 않은 상태의 좀 더 원초적인 형식의 위로입니다. 사람의 말은 항상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소연이나 위로도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의 의미란 지극히 자의적인 것이기에 서로 가닿을 때마다 틈을 만듭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심정으로 공허한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보려 사람에게 기대곤 하는데 사람이 줄 수 있는 위로란 한참 모자랍니다. 서로의 마음의 상처에 정확히 들어맞는 위로의 말을 건네기엔 우리는, 또 우리의 말은 너무나도 불완전합니다. 자연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언어를 통해서가 아닌 우리의 마음과 공명하는 방식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눈에 물이 들 것만 같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 후의 우리의 마음은 분명 전과 어딘가 달라져 있습니다. 대지는 꽃으로 웃는다던 시인 레이첼 카슨의 말처럼 땅이 온 지천에 여봐란듯이 웃음꽃을 만개하고 있는 5월의 봄날에 다시금 깨닫습니다. 손발에 흙 묻히고 사는 재미와 복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자주 우리는 잊곤 하는지.  




어떤 산에 가던지 꼭대기에 올라서면 꼭 내가 살던 동네를 찾아보려 합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누군가가 해준 이야기인데,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가장 힘든 점은 바로 일터와 쉼터가 구분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하는 곳에서 쉬고, 쉬는 곳에서 일하는데에서 오는 그 괴리감이 일상의 구분을 허물어 버린다고. 쉼터에서 일 생각을 하고, 일터에서 집 걱정을 하는 삶은 제가 감당하기엔 아직 버겁습니다. 


쉼터에서 일터로 출근하고 퇴근하는 그 순간 우리의 뇌는 스위치를 켜고 끈다고 합니다. 회사로 향하는 길은 집에서 했던 걱정들은 모두 불이 꺼지고 회사에서의 자아가 눈을 뜨는 그 순간입니다. 그래서 일터와 쉼터의 공간적 배경을 분리하는 그 물리적 거리와 간극이 사람들의 자아를 분립시키고 교환하는 마음의 스위치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두려움이 우리의 삶을 흔들 때 마음의 중심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도피가 아니다. 그것이 영성이다.


바로 그 심리적 분리감입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나의 집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습니다. 내가 껴안고, 나를 짓누르고 괴롭게 하던 그 문제들은 얼마나 얕고 사소로울까요. 위의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저에게 등산이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자기 해방의 방식입니다. 생각한 대로 살지 못하고 삶에 휩쓸려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때 마음의 영점을 잡아주는 것은 바로 내 발로 걸어 올라온 이곳입니다. 저 멀리 새끼손톱보다도 작아 보이는 내가 사는 동네가 큰 위로가 됩니다. 마치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내 발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양파를 썰다가 눈물이 나와버려 나도 모르게 펑펑 울어버렸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한결 기분이 나아져서 문득 생각해보니 힘들다는 말을 숨기고 산 기간만큼 힘들 때 울어본 기억도 나지 않는답니다. 그러고선 스스로 되뇌었다고 합니다. 힘들고 우는 법도 모르겠을 땐 종종 양파라도 썰어야겠다고.


앞으로 양파를 썰 일이 많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에서 밥을 끓여 먹고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나희덕, <속리산에서> 전문



참조: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류시화, <마음 챙김의 시>. 마틴 로이드 존스, <영적 침체>. 폴 트립, <고난>


작가의 이전글 슬픔의 불공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