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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Park Sep 15. 2022

슬픔에 빚지다

갚을 순 없어도 잊어선 안 되는 일들이 있다고

저는 소설이나 수필 같은 문학을 즐겨 읽습니다. 사실 거의 그런 책만 읽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선 편식이 꽤 심한 편인데 바라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인 듯합니다. 부자가 되는 법을 위해서도, 교양 함양을 위해서도 아닌 바로 타인의 슬픔을 알기 위해 읽습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꼭꼭 씹어 읽습니다.




대학생 시절, 노숙자들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봉사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가지게 된 결정적인 순간이 있는데, 같이 일하던 봉사자 한분이 저한테 물어봤습니다. "노숙자 봉사에 관심이 많으세요?" 그래서 제가 "네. 아무리 바쁘더라도 적어도 한두 달에 한 번쯤은 찾아가려고 노력합니다." 대답했더니 그분이 "그러면 여기 있는 노숙자 중에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예요?" 이렇게 물어보는 겁니다. 뒤에서 내리치는 죽비와도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노숙자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제 열정과 시간을 쏟는다고 했지만, 정작 그분들과 인격적인 관계는 쌓지 못했던 겁니다. 애초에 그럴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습니다. 노숙자들의 삶이란 다 똑같은 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나와는 마음을 맞대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삶의 부분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지레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의 질문은 제 미숙함을 단박에 허물었습니다. 내 몽매로 인해 미처 보지 못했던 그들의 삶의 뒷면을 돌려 보이는, 마치 병자를 눈 뜨게 한 예수의 침 같은 당언입니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살고 있는지, 살고 싶은지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채로 사랑하려고 했던 제 미숙함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교만하고 후안무치한 일인 줄도 몰랐던 제 어리석음입니다. 제 부끄러운 모습을 오래 간직하고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알면 사랑한다


"제게는 소박한 신념이 하나 있습니다. '알면 사랑한다'는 믿음입니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미워하고 시기한다고 믿습니다. 아무리 돌에 맞아 싼 사람도 왜 그런 일을 저질렀어야 했는지를 알고 나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 심성입니다. 동물들이 사는 모습을 알면 알수록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은 물론 우리 스스로도 더 사랑하게 된다는 믿음으로 이 글들을 썼습니다."라고 사회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저서의 서사(序詞)를 적은 적이 있는데 이 문단이 오래 마음에 감돌았습니다. '알면 사랑한다'는 말을 뒤집어 말하면 '사랑하려면 알아야 한다'가 될 것이고, 앎이 선행되지 않은 형태의 사랑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영화에 관해 적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다 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의 문이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강철로 된 그 문을 연다."라고 쓰고 이렇게 말합니다. 인권에 대해 이미 충분히 섬세한 사람들이 이 섬세한 영화를 보고 자신이 그동안 더 섬세했었어야 했다고 자책하는 일이 벌어지기보다는, 다 알기 때문에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보면 좋겠다고.


장애인, 노숙자, 노인, 어린이 등 못하는 일이 하나씩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더 큰 무능력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입니다. 저들은 늘 도움이 필요한 '객체'라고 생각했던 나의 선입견을, 굳게 닫힌 마음과 사고의 강철문을 밀어젖혔던 건 바로 이야기를 통해 보고 알게 된 그들의 삶과, 그들의 눈으로 본 내 모습입니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고, 더 알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믿음과 나는 단순히 주는 사람, 그리고 저들은 받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던 내 주체 의식이 사실은 내 결함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오래지 않습니다.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라는 말도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신형철, 2016)


문학의 기능들 중에 위로라는 것도 있다는 데에도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전달하는 것이 문학의 더 본질적인 기능이며, 공감이니 감동이니 위로니 하는 감정의 작용들은 부수적이거나 보조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저 역시 그렇다고 해야 할 텐데, 그러나 이는 인식의 영역과 감정의 영역이 별개라는 전제 아래에서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만약 그 둘이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이라면, 감정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도 인식의 영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요.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더 과감히 말하자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입니다.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문학에서 그렇고, 인생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픈가 라는 질문을 자문하고는 하는데 그저 단순히 잘 살고 잘 먹는 사람보단 잘 살리고 잘 먹이는 사람이 되고 싶고, 또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의 삶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삶이란 가장 형편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타인의 삶에 자그마한 빛이라도 비치려 한다면 그 삶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제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합니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합니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려면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알게 되면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마리안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선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이유도 그러합니다. 자기 민족을 멸시하고 모욕했던 유대인이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것을 본 순간, 통쾌한 감정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에게로 손길이 향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과 그것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능력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치명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손 내밀고 귀 기울일 것입니다. 그 고통을 알겠어서, 차마 못 본 체 도망칠 수 없어서, 무슨 일이라도 할 것입니다.




사람은 한자로 사람 인(人) 자에 사이 간(間) 자를 써서 인간이라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 간극을 가까이하는 것이 인간다운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간극 사이의 인력(引力)은 같은 성질을 가진 동류의 슬픔끼리의 것이고 결국 슬픔을 통해 연대하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이들의 인력(人力)입니다.


내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은 나의 슬픔에 공명하는 타인의 슬픔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의 슬픔에 기대어 삶의 무게를 나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 또한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 저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그렇게 서로 빚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늘로 우물을 파는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톺아가며 읽습니다. 스스로 떠올릴 수 없는 슬픔이라면 다른 이의 목소리를 빌려서라도 들으려 합니다. '기억함'이 아닌 '기억됨'에서 오는 슬픔이라 할지라도 한 자라도 더 알아야 한 치라도 더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므로 인간이 배우기에 가장 어려운 것과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입니다.


인간은 가능하면 직접 겪지 않고 알고 싶어 한다. 우리가 부지런히 책을 읽는 것은 그 때문이다. 표류하지 않고도 표류하는 게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거의 모든 변변치 못한 고생을 사서 한다는 것이 요즘 같은 세상에서 어리석은 일일지 모르지만, 내 안에서는 아주 조금이나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이 형편없어진다는 경고가 늘 울리고 있다.

소노 아야코, <타인은 나를 모른다> 중




참조: 최재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김연수, <시절일기>, <소설가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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