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에 남편과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하지 못하고 감염되고 말았다. 재택근무를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지인 가족과 돌아가며 아이를 돌봐주는 과정에서 지인의 아이로부터 감염이 되어버렸다. 바이러스 감염이 무서워서 학교를 보낼 수 있는 아이들을 억지로 집에 두고 힘들게 온라인으로 수업을 시켜가며 지켜온 것이 무색하게도 학교에 가지 않는 지인의 아이가 감염이 되었고, 나는 그 아이로부터 옮고 말았다.
지인의 확진 소식을 듣고, 지인의 아이와 같은 날 우리 가족도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그때까지는 아무런 증상도 없었던 터라 이번에도 다행히 무사히 넘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검사를 받고 온날 저녁부터 나의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열로 시작된 열이 38.5도가 넘는 고열로 이어졌고, 열이 나다 보니 몸에 기운이 없고, 어지러워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가벼운 목의 통증과 함께 기침이 동반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는 목이 타들어가는 통증은 없었지만 잦은 기침과 숨 쉴 때마다 폐에서 느껴지는 시림 같은 것이 있었다.
'확진'을 받고 나니 보건당국으로부터 추적조사를 위한 전화가 왔다. 어떻게 감염이 되었고, 누구로부터 옮았으며 가지고 있는 증상과 증상이 나타난 시기 등을 물었다. 아는 선에서 최대한 정성스럽게 답을 했고, 지금 보건담당이 해줄 수 있는 있는 것은 나의 증상을 팔로 업하며 증상이 심해지면 응급실로 가라는 조언밖에 없었다. 하긴 캐나다에서 이 정도 일로 입원을 바랐던 건 좀 오버이긴 했다.
내가 확진이 되었다는 소식을 엄마에게 전했는데, 엄마는 동생에게, 동생은 아빠에게 전달을 해서 한국에 있는 온 가족들이 난리가 나버렸다. 타이레놀 제일 센 놈으로 겨우겨우 버티며 잠을 자고 있는 사이 카카오톡은 불이 나고 있었다. 아빠, 엄마, 연락도 잘 안 하는 동생에, 올케까지 걱정이 가득한 메시지들로 시끌거렸다.
일단은 제일 답답하게 걱정하고 있을 아빠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나 걱정을 하셨는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빠는
"야이 바보야. 어쩌다가 그래 됐니?" 라면서 막 우신다.
엄마에게도 말하지 말걸 괜히 후회를 했다. 딸내미가 코로나에 걸렸더니 아빠는 어디서 그런 정보력을 동원했는지 온갖 약들과 각종 음식들, 쉽게 낫는 방법까지 다 찾아서 일러주신다. 나이를 이렇게 먹어도 아프면 걱정해주는 부모님이 계신 것에 감사하면서도 괜히 걱정을 끼쳐드린 것이 죄송해서 가벼운 감기 같다는 말로 안심시키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3일간 열심히 앓으면서 남편의 지극정성인 수발을 받았다. 남편은 나와 본인의 밥, 그리고 아이의 밥까지 3명의 밥상을 따로 차려야 했다. 격리 중인 방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남편의 밥하는 소리와 설거지하는 소리를 들으며 참 미안하면서도 그리고 고마우면서도 정말 편한 마음이 들었다. 꼭 십 년 전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받는 것처럼.
그렇게 나만 편하고 넘어갔으면 아프긴 했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을 텐데 따라쟁이 남편은 결국 나로부터 코로나 바이러스를 옮아버렸다. 평소에도 아프면 열이 잘 나는 남편은 감염이 되었음을 느꼈던 순간부터 열이 무섭도록 올랐다. 39도가 훨씬 넘는 열에 맥이 풀려버린 남편은 내가 격리하고 있던 방으로 들어왔고, 아직도 바이러스 놈과 열심히 사투 중이던 나는 남편의 수발을 위해 거실로 나오고 말았다.
방 두 칸이 채 되지 못하는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을텐데 처음엔 남편의 확진이 조금은 얄밉게 느껴지기도 했다. 항상 내가 아프면 따라 아프고 마는 사람이라 편하게 맘 놓고 아프게 놔두지도 않는다며 책망하는 말도 서슴지 않으며 결국엔 둘이서 끙끙 앓으면서 열심히 싸웠다. 창문도 없는 좁은 방 안에서 아빠, 엄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갇혀 있는 아이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우리는 철저하게 몸이 아프다는 이기적인 핑계로 각자 더 불쌍하다며 울고불고 싸웠다.
그렇게 결론도 승자도 없는 싸움을 며칠간 반복하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고 싸움을 접었다. 아니 싸울 기운도 남아있지 않아서가 맞는 말인 것 같다. 좁은 집안에서 두 명의 확진자와 아이가 버티어 내려면 마음이라도 좀 편해야 했다.
2주간의 격리기간 동안 증상은 호전되었다가 다시 심해졌다가를 반복했다. 후각과 미각까지 모두 잃어버린 우리는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맛이 똑같은 신비한 경험을 하기까지 한다. 아이라도 잘 먹이려고 불고기를 볶는데 맛있어 보이는 연기를 직접 맡아도 아무 냄새가 나지 않았다. 고기의 식감은 느껴지지만 달달한 불고기의 맛은 전혀 모르겠더라.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미각과 후각의 상실이 거짓말이 아닌 것에 놀랐다. 그렇다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진 않았지만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젊은 우리의 신경을 마비시킬 만큼 대단한 놈 이것은 확인했다. 살면서 미각을 잃어본 적이 없었던 우리는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감을 주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온몸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미각과 후각이 돌아오는 것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기억하고 있는 맛과 일치함을 느끼게 된 것은 거의 두 달 가까이 지난 후였으니.
캐나다는 확진 후 증상과 무증상에 관계없이 2주는 필수로 격리를 해야 한다. 확진을 받은 날부터 2주가 되는 날 증상이 없다면 추가 검사 없이 일터로 돌아갈 수 있다고 안내를 했다. 어차피 검사를 해봐야 6주간은 확진으로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국 뉴스에서 봤던 것과 달리 'negative' 검사지 없이도 나 스스로가 괜찮다고 생각하면 일터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일을 꼭 해야 하는 사람들은 몸이 조금 힘들어도 일을 갈 수밖에 없고, 거기서 감염자는 더 늘어나게 되는 악순환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캐나다 국민의 50프로 이상이 2차 접종까지 모두 완료하였고, 내가 살고 있는 온타리오 주는 2차 접종까지 마친 비율이 70프로를 넘어가고 있다. 국민들이 말을 잘 듣는 편이라 백신 접종율도 높고 마스크도 잘 쓰며 락다운이든 셧다운이든 하지 말라는 것은 최대한 하지 않는다. 물론 델타의 성행으로 다시 확진자수가 올라가고는 있지만 돌아오는 9월 개학을 맞아 백신을 접종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와 제재가 강해지고 있다.
12세 이상 (2009년생 이상)은 모두 접종 대상인 데다 개학을 하는 학생들 중 12세 이상이 접종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일주일에 한 번은 코로나 증상이나 확진자 접촉에 관계없이 코로나 감염 여부를 검사해야 한다고 하니 귀찮아서라도 접종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2주간 고생하면서 처음엔 솔직히 무서웠다. 캐나다 병원시스템상 당장 입원할 수도 없고, 따로 약을 처방해주지도 않기에 뉴스에서 무섭게 보도했던 것처럼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아 죽기라도 할까 봐. 한국에 있던 가족들과 친구들도 그것을 제일 걱정했던 것 같다. 한국처럼 바로 병원을 갈 수 있는 환경이 그리웠던 순간이다. 그리고 얼마나 한국이 좋은 나라인지도.
하지만 아파서 일을 가지 못한 우리 부부가 나라에 신청한 정부 보조금을 받고 나서는 또 마음이 흔들렸다. 일주일에 450불 (한화 40만 원 정도)를 최고 4주까지 신청할 수 있다. 우리가 격리 때문에 쉬었던 2주 동안 나라로부터 받은 돈은 총 1800불 (한화 165만 원) 정도가 된다. 물론 평소에 버는 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긴 하지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복지의 국가라 국민들이 굶거나 돈이 없어서 아파 죽거나, 또는 갈 곳 없게 만들진 않지만 양날의 검처럼 낙후된 의료시스템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캐나다에 살면서 평생을 고민해야 하는 문제일 테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변이에 변이를 거듭하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에 역사에 남을 무서운 바이러스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것이 이제 끝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무한히 나타날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비해야 할 시점임을 알고 있다.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기후변화와 무섭게 위협하고 있는 지구의 더위 증상까지, 우리가 한국에 살던 캐나다에 살던 무시하고 넘길 일은 아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