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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넘기 Mar 30. 2023

시간의 선물

-<그리고, 또 그리고>를 읽고


도서관에 만화만 모아 놓은 서가가 있다.

<그리고, 또 그리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또 그린다고?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인가 싶어 책을 훑어보니 그림에 대한 만화였다.




자전적인 만화로 작가의 그림 인생이 담겨있었다.

고등학교 때 다녔던 화실이 작가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화실 선생님인 히다카는 '나의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스승이다.




고등학교 그림 동아리에서 하하 호호 웃으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즐거웠던 하야시.

순둥 한 미술 선생님은 하야시의 그림 실력을 칭찬만 해 준다.

자신이 나름 잘 그린다고 생각했던 하야시는 자신의 그림이 엉망이라는 히다카 선생님 말에 충격을 받는다.



히다카 선생님은 죽도를 어깨에 메고 아이들을 가르친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생선뼈를 그리라고, 할아버지에게는 휴지곽을 그리라는 히다카 선생님.

자신에게도 같은 그림을 계속 그리라는 히다카 선생님이, 이 화실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진 하야시는 배가 아파서 집에 일찍 가야겠다고 거짓말한다.



살았다며 도망가려는 찰나 선생님이 뛰어나온다. 하야시 엄마에게서 데리러 오지 못한다는 전화를 받았다며 하야시를 업고 버스 정류장까지 간다. 1시간 간격으로 오는 버스를 기다려 주기까지.


하야시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일 또 그리러 오라는 선생님의 말에 다음 날 다시 화실에 들어선다.


화실에서 반복해서 데생을 하고, 선생님은 계속해서 '그려라'라고 말한다.

매일 꾸준히 그리면 잘 그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야시는 객관식 문제 푸는 법을 섭렵하며 입시 시험을 준비하고, 그 방법 덕분에 좋은 점수를 받게 된다.

문제라고 생각했던 필기시험은 잘 풀렸지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실기 시험에 걸려 넘어진다.




당연히 붙을 거라고 생각했던 대학에 떨어지고, 그냥 지망했던 대학에 겨우 붙는다.


그런데 겨우 붙은 대학도 마음 편히 들어가지는 못했다.

여러 날 걸리는 실기시험을 위해 학교는 입시생들이 묵을 숙소를 정한다.

입시생들은 숙소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친해지며 함께 합격하기를 기원했다.


실기시험이 있던 첫날, 처음 보는 석고상에 당황한 하야시는 석고상이 밋밋하다고 생각하며 근육을 우락부락하게 그려 넣는다. 입시생들이 함께 저녁을 먹는데, 모두가 그 석고상을 처음 봤다고 말하는데 한 명만 자신은 입시 학원에서 한 번 그려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하야시는 석고상에 대해 알려달라고 자신의 게 요리를 다 주겠다며 부탁한다. 알려준들 데생 실력이 갑자기 좋아질 리 있겠냐며.


 그 말에 그 석고상은 소년상이기 때문에 근육이 두드러지면 안 되고 잔잔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어렵게 입을 뗀다. 다음 날 실기 시험은 전 날 그림을 이어 완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야시는 어제의 그림을 지우고, 새롭게 그린다. 1차 실기 시험 결과 자신은 합격, 알려준 사람은 불합격이었다. 자신이 집요하게 물어봐서 알려줬는데, 그랬기 때문에 저 사람은 떨어지고 자신은 붙은 건 아닌지 하는 죄책감을 느낀다.




파란만장한 입시가 끝나고,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이 되었지만 왜인지 붓을 들 수가 없다.

그리라고 말하는 히다카 선생님이 없는 데다 놀 일은 얼마나 많은지.


미대 입시가 어려워 5 수생도 흔했지만 그림에 집중하는 사람만큼 그림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수업에 빠지고, 과제도 내지 않았다.

술 마시고, 노래방에 가며 부모님이 보내준 생활비를 다 쓰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술 마시고, 노래방 가고의 반복.




나는 꿈이 있는 사람은 방황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원하는 사범대에 들어가고, 기똥차게 방황을 했던 내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주인공의 모습에

우습게도 크게 위로받았다.





만화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만화는 한 장도 그리지 못한 채 4년의 시간이 흐른다.


부모님은 졸업하면 고향에 돌아와 취업하라고 야단.

마침 히다카 선생님이 근처 사립학교 미술교사 자리가 생겼다며 와서 선생님을 하며 계속 그림을 그리라고 한다.




무거운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온 하야시.


선생님을 찾아뵈니 그 자리는 다른 연줄을 가진 사람이 차지했다며 화실에 나와서 그림을 그리라고 한다.


듣기 싫으면서도 듣고 싶었던 그 말에 끌려 예전처럼 화실에 나와 그림을 그리게 된다.




선생님의 부탁으로 다른 학생을 지도하면서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생님은 하야시에게 입시생들을 가르치라며 월급을 준다.




하야시 덕분에 생긴 개인 시간에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고, 도자기를 굽는다.


하야시에게도 도예를 가르쳐 주고, 함께 마당을 꾸민다.


느리지만 따뜻한 시간은 하야시 아빠가 하야시를 전화국에 억지로 취업시키면서 끝난다.




선생님은 하야시에게 전화국에서 일하고 밤에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기를 권한다.


계속해서 그리라고. 매일 그려야 한다고. 그래서 자신과 2인 전을 열자고.




하야시는 전화국 안내원이 너무 하기 싫었고, 화실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전화국과 화실에서 받는 돈을 모아서 고향을 탈출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동시에 드디어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만화를 그리는 종이, 펜도 모르고 어릴 적부터 동경하던 만화 잡지사에 기고한 만화는 3등을 수상한다.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4년의 시간에는 만화를 한 컷도 그리지 못했지만

낮에는 전화국, 밤에는 화실에서 일하고 잠을 줄이면서 그려야만 하는 환경에서는

등단할 만한 만화를 그려낸다.




드디어 선생님에게 화실을 쉴 구실이 생긴 하야시는 선생님에게  만화가로 등단하여 상금을 받았고, 후속 작품을 위해서는 시간 확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선생님이 누구던가?

선생님은 원고를 가지고 와서 그리면서 틈틈이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한다.

하야시는 그것을 따르고.

(덕분에 하야시는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만화를 그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선생님에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지 못하는 하야시는 나와 닮았다.

만화에서는 자신이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해 에둘러서 좋게 말하는 성격이 싫다고 표현한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을지 모른다며.




그 부분을 읽으면서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하야시가 신기했고,

그것이 내게도 있는 약점이라 공감이 되었다.




2년 동안 전화국에서 일하고, 만화가로 등단한 덕분에 하야시는 고향을 떠날 수 있게 된다.

얼마 동안 떠날 거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하야시는 머뭇거리며 6개월 정도라고 말한다.

머릿속에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면서도.




오사카에서 동료 만화가와 어울리며 만화의 세계에 대해 배운다.

적절한 재료와 마감 맞추는 방법, 피 토하는 마감의 현장도.



그렇게 만화가가 된 하야시는 선생님을 잊는다.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암에 걸렸고, 4개월 정도 산다는 얘기를 듣는다.

돌아와서 화실을 이으라고.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감상에 젖어 화실을 이어받으리라 결심을 하는데,

화실에는 선생님의 제자들로 벅적하다.




선생님은 치료를 거부하고, 끝까지 그림을 그린다.

제자들은 선생님의 지시대로 작품을 정리한다.




하야시는 만화 마감에 맞추기 위해 선생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사카행 비행기를 탄다.




그렇게 마감에, 또 마감에, 또 마감에 시달릴 때 걸려온 전화 한 통.

선생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장례에 찾아온 선생님들의 제자들이 화실에 모여 선생님을 회고하던 중이었다.

최근에 작품전을 열었던 제자가 입을 뗐다.


선생님이 자신의 작품전에 휠체어를 타고 왔었다고.


즉흥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자신에게 선생님이 들리지 않지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고.


"그려라."




그 말에 모두 울음이 터진다.




미련할 만큼 그리라고 말했던 선생님.

매일 꾸준한 훈련을 하면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던 선생님.

입시에 떨어진 아이에게 내일부터 화실에 나와서 일 년 동안 매일 그림을 그리면

다음 입시에는 어느 대학이든 갈 수 있다고 말했던 선생님.


작가는 미대에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난다.

후배였지만 연상이었던 그녀에게는 완벽에 가까운 이상형이었던 남자를.


자신이 고향에 돌아갔을 때에도 장기연애를 했다.

남자친구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오사카에 자리를 잡자 남자친구도 오사카에 취직을 했다.

마감에 허우적댈 때 남자친구가 도와주기도 하며

바쁘지만 달콤한 날을 보낸다.


하지만 더 큰 성공을 위해 도쿄로 떠난 하야시.

남자친구도 응원해 준다.

도쿄에 적응한 하야시는 새로운 남자와 빠르게 결혼하고, 이혼한다.

그 사이 생긴 아이를 기르면서 쓴 만화가 대박을 치면서

만화가로 성공하게 된다.


이 부분이 짧게 만화로 처리되어 있는데, 마음이 아팠다.




작가의 솔직한 이야기에 공감하고, 웃고 울면서 본 만화다.




아이에게 말한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면 돼. 시간을 들인 만큼 잘하게 될 거야."

정작 나는 꾸준히 시간을 쓰지 못하면서 입은 살아 있다.


내게 계속해서 쓰라고 했던 글쓰기 선생님도 생각났다.




선생님이 있다는 것, 하야시처럼 평생 마음에 품고 흠모할 선생님이 있다는 것.

힘들 때 쫓아갈 어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될까?




그래서 나도 쓰기로 했다.

쓰고, 또 쓰고.


머뭇거리지 말고, 그저 쓰고 또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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