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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군가의K Sep 17. 2020

가을엔 지옥발라드

바야흐로 발라드의 계절

얼마 전 회사 동료와 아침 인사를 나누다 ‘처서매직’이라는 말을 들었다. 확실히 공기가 차가워졌다며 덧붙인 그 단어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 무슨 스마트폰 개봉기에 등장하는 ‘그립감’ 같은 단어란 말인가? 조금은 귀여운 그 말에 지난했던 장마를 뒤로하고 다가오는 가을에 대해 생각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따뜻한 라떼를 마시기 시작하는 그 계절이 오고 있는 것이다.


발라드를 듣기 가장 좋은 계절은 언제일까? 한여름에도 주기적으로 캐롤을 들어줘야 하는 나는 그런 계절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에도,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듯한 여름에도, 시원한 밤공기에 잠들어 있던 감성이 깨어나는 가을에도, 들숨에 허파까지 얼어버릴 것 같은 겨울에도 누군가에겐 발라드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평균기온이 영상에서 영하로 천천히 하강하는 이 절기의 내겐 '지옥발라드'가 꼭 필요하다.


지옥발라드.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최애밴드가 자신들의 주옥같은 발라드 곡들을 칭할 때 썼던 표현이다. 너무나 찰떡같은 그 표현을 듣고나서부터는 내 마음을 울리는 발라드 넘버들에 '지옥발라드'라는 애칭을 붙이고 있다. (지옥발라드 창시자인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도 언젠가 써보고 싶다. 너무나 좋아해서 엄두가  난다.) 아직은 여름의 기운이 남아있는 이 가을의 초입에 유난히 떠오르는 발라드 곡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가을이니 가을 타령을 하는 노래를 하나쯤은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음악 어플을 실행해 내가 보유한 곡들 중 '가을'이라는 제목을 가진 곡을 찾아본다.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충 훑어보니 이한철의 <가을>, 소란의 <가을목이>, 가을방학의 <가을방학>, 화사의 <가을속에서>, 윤종신의 <늦가을> 정도. 개중에서도 당장 가사와 멜로디가 떠오르는 곡 또한 생각보다 별로 없다. 하지만 사실 내게는 이렇게 검색해보지 않아도 무조건반사로 떠오르는 곡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밴드 데이브레이크의 <가을, 다시>.


데이브레이크는 보컬의 이원석, 기타의 정유종, 베이스의 김선일, 키보드의 김장원으로 꾸려진 4인조 밴드이다. 드럼은 한 객원 멤버와 오랜 기간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보컬의 청량한 목소리와 맛깔나는 가창이 돋보이며, 키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풍성한 사운드를 만들어 내는 점이 특히 매력적인 밴드이다. 유려한 기타 연주와 멋진 무대매너는 덤이다. 이들의 음악을 10년 동안 꾸준히 들으며 편곡 능력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종종 했던 것 같다.


<가을, 다시>는 그 유명한 <들었다 놨다>가 타이틀인 앨범 <Aurora>에 수록된 발라드 곡이다. 이 곡은 이원석의 보컬이 빠른 템포에 말랑말랑한 사운드에만 어울리는 줄 알았던 나의 편견을 와장창 깨버렸다. 이별을 노래하는 차분하고 쓸쓸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여름이어도 가을이 되는 것이다. 보컬뿐만 아니라 연주가 참 아름다운 곡이기도 하니 가을 기분 한 껏 내고 싶을 때는 눈을 감고 후반부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디사이저의 멜로디를 쫓아 가보자. 노랫말처럼 시간이 멈출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안녕을 하고 침묵이 흐르고 시간은 멈추고.
데이브레이크 2집  <Aurora> 앨범아트




당신에게 이름이 있듯이 구름에게도 제 각각의 이름이 있다. 이를테면 수직으로 발달한 적란운, 양 떼 같은 모양의 고적운, 어두운 색을 띠는 고층운 같은. 이렇게 구름에게도 각자의 개성이 있음을 헤아려주는 것 같은 이름의 밴드가 있다. '행복한 구름'이라는 뜻의 <하비누아주>이다. 하비누아주라는 이름이 (아마도) 지구과학적인 고민 끝에 탄생한 것은 아닐 테지만, 이들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왠지 저 넓은 하늘에 외롭게 떠있는 구름 한 점까지 다독여줄 줄 아는 사려 깊은 사람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기분이 든다.


김뽐므의 청아한 보컬과 전진희의 정갈한 피아노 연주가 인상적인 이 밴드는 자아성찰적인 가사로 마음을 울린다. 어떻게 이렇게 솔직하고 쓸쓸하며 아름다운 노랫말들을 쓰는 것인지, 몇 번이고 가사를 곱씹게 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을 울린 지옥발라드는 이들의 두 번째 EP앨범 <겨울노래>에 실려있는 <고백>이라는 곡이다. '고백'이라고 하면 왠지 설레는 감정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따뜻하고 느릿한 소리의 기타 연주로 시작되는 이 곡은 설렘보다는 담담함을 노래한다. 앨범명에서 알 수 있듯 이 노래는 어쩌면 가을보다는 겨울의 옷을 입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코끝에 차가운 바람이 스치기 전에 이 노래를 챙겨 들으며 겨울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를 보지 말아요, 그런 눈으로. 부끄러운 내 눈을 읽어봐요.
하비누아주 2번째 EP <겨울노래> 앨범아트



2020년 9월 지친 목요일 저녁

아직 남아있는 여름의 기운을 느끼며 K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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