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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레카 Nov 11. 2021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5)

요양과 수발이 필요한 노인, 가족들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무거운 분위기였지만 김장날 특유의 부산스러움은 계속됐다. 

진두지휘하는 할머니는 안 계셨지만 늘 해오던 일이라 엄마와 숙모들은 익숙하게 김치 양념 속을 배추에 묻히고 있었다. 할머니 없이도 익숙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할머니가 살아계실 적과는 차원이 다르게 김장이 수월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장 이틀 전부터 생 배추를 다듬고 가르고 소금물에 절이고 무를 채 썰고 각종 젓갈로 양념을 버무리던 단계들이 모두 생략되었다. 


대가족 맏며느리였지만 전통적인 며느리 역할을 고분고분 따르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던 우리 엄마는 농협의 김치박사님이 최적의 비율로 경상도 사람 입맛에 맞춘 김치 양념 속과 절임배추를 주문했다. 

그 덕분에 김장이라고 다 모이긴 했지만 실제로는 그냥 준비된 양념을 절임배추에 치대어 나눠 가져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예전에 비하면 고생스럽지 않은 일들이긴 했지만 자발적으로 신나서 김장을 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사실 할머니가 살아계실 적 김장날의 떠들썩했던 분위기를 그리워 한 아빠의 억지로부터 시작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김치를 많이 먹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엄마를 포함한 집안 며느리들은 시댁에서 모이라 하면 겁부터 내는 게 당연한 세대들이었다. 끈끈한 가족애로 똘똘 뭉쳐서 모두가 화목한 가족, 모두가 즐거운 날이라는 것은 아빠나 삼촌들의 이상적인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김장김치에 신선한 굴, 수육으로 오랜만에 대동 단결해서 겨울을 맞이해보자 했던 아빠의 소박한 바람은 할아버지가 119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는 바람에 산산조각이 났다. 


남아서 억지로 김장을 하던 며느리들은 앞으로 할아버지의 거취에 대해서 걱정을 하는 듯 한 마디씩 거들었다. 


누구네 시아버지는 요양병원에서 몇 년째 산다더라, 그 돈을 자식들이 나눠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더라에서부터 요양원과 요양병원이 뭐가 다른 건지, 집으로 모셔오게 되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걸을 순 있는 건지 수술비는 어떻게 조달하는 건지. 


아들이 다섯에 며느리도 다섯이었지만 제각각 살기가 바빴다. 맏며느리인 우리 엄마는 임신 당뇨로 고생 중인 만삭의 딸을 뒷바라지 중이었고 전업주부인 둘째 숙모는 암투병 중인 언니의 병 수발 중이었다. 그 밑으로는 모두 직장인이었으니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은 할아버지는 은근히 집안의 걱정거리였다. 


이전까지 할아버지 신병에 관한 모든 일은 할머니가 다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식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40대 때부터 뇌졸중 후유장애로 평생을 할머니한테 병시중을 받던 사람이라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다행히 본인 건강에 대해서만은 철저해서 식사만 제때 챙겨드리면 약 챙겨 먹는 일 하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자네가 먼저 가면 곡기를 끊고 나도 따라가겠네 했다는 할아버지 말씀을 할머니는 늘 자랑처럼 이야기했었기 때문에 혹시나 할아버지가 그 말을 지킬까 봐 아빠는 괜히 노심초사했었다. 

하지만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치고는 할머니 장례식에서부터 한 끼 거르시는 일도 없이 매일매일  하루 세끼와 때때로 과일에 간식까지 꼭 챙겨 드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오히려 자식들에겐 다행스러웠다. 


요양보호사가 온 뒤로는 할아버지의 끼니 걱정과 간단한 살림까지 모두 해결되었고 자식들은 그저 가끔 안부차 들러 노인의 간식거리 정도를 사다 주는 것으로 마음의 부담을 덜어냈다. 

우리들 할 일을 대신해주어 고맙다는 표현이었을 테지. 


구급차가 처음 내려 준 병원에서는 할아버지가 너무 고령이라 진료를 거부했기 때문에 병원에서 다시 사설 구급차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가는 중이라고 아빠의 연락이 왔다. 


소식이 전해지자 집 안에는 또 한 번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인 듯했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혹시나 지금 생활에 부담이 되는 건 아닌지 집 안에 있는 모두가 각자의 사정에 가정을 더해 머릿속으로 열심히 핑계를 짜내고 있었을 바로 그때, 하필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사진 속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할머니는 영정사진 속에서 살포시 웃음을 띄고 있었다. 

할머니 집 거실 티브이 옆엔 가로가 1m나 되는 대형 가족사진이 있었는데 장례식 이후 할머니의 자리는 바로 그 옆 자리였다. 


누가 치우라고 말 한적도 없었기 때문에 2년 넘게 줄곧 그 자리에는 계속 영정사진액자가 놓여있었다. 


가끔 명절이나 할머니 기일 때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특히 찬송가를 부를 때 영정사진 속 할머니를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나긴 했다. 나는 가족 내에서 할머니를 잃은 슬픔을 가장 많이, 자주, 그리고 풍부하게 오랫동안 표현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따라 훌쩍였고 삼촌들이 큼큼거리면서 감정을 추스르기도 했다. 


아빠는 심지어 할머니 집에 오고 갈 때마다 영정사진을 보면서 인사를 했다. 

"엄마 내 왔다~"

"엄마 내 갑니다~또 올게요, "

집안 가족들이 다 모여서 시끌벅적하면 또 말을 걸었다. 

"엄마 없어도 그대로제? 이래 노는 거 억수로 좋아하드만 보고 싶어서 어째 갔으요? 좀 더 같이 놀다 가지 뭐시 그래 급해가꼬"


아빠와 내가 그런 행동들을 할 때마다 거실 소파에는 늘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었다. 

아마 우리가 하는냥을 항상 지켜보고 있었겠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할머니가 안 계시고 홀로 남은 할아버지, 

평생을 희생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 존재했던 할아버지. 

홀로 지내는 그 시간들을 할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지냈었을까?


아무도 없을 때 할아버지는 슬퍼했었을까? 

평생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사과했을까? 곡기 끊고 따라가려고 결심했었을까?


할머니 사후 늘 저런 의문이 있었다. 


매일매일 거실 한편에서 살짝 미소 띤 얼굴로 할아버지를 지켜보는 할머니와 

매일 그 영정사진과 함께 고요한 집 안에서 생활했을 할아버지.


가끔 말이라도 붙이면 그저 허허허 웃으면서 내 손을 붙들고 흔들기만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할아버지 도대체 지금 행복해요 슬퍼요 외로워요 무슨 마음인지 물어라도 볼걸.


지나고 생각해보면 할아버지가 나한테 직접적으로 나쁘게 한 건 없었는데 난 왜 그렇게 할아버지가 미웠을까?


단지 난 할머니 이야기와 나의 상상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을 미워했던 걸까?

나는 할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사랑하는 걸까? 관심이 있긴 했나?


갑자기 할아버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노인이 오롯이 감당하고 있을 공포심이 나에게도 강하게 느껴졌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양반이 낯선 곳에서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을까.


마침 아빠랑 통화연결이 되었다.

할아버지 집 근처 할머니가 자주 입원했던 정형외과의원에서는 담당의가 휴가 중이어서 안된다고,

또 다른 정형외과 전문병원에서는 고관절 골절로 진단했으나 환자가 너무 고령이라 그 병원에서는 수술이 불가능하다 하여 소견서를 가지고 사설 구급차를 타고 우리 집 근처의 대학병원 응급실에 왔다고.

여러 가지 검사를 했는데 고관절이 부서져서 뼈를 잇는 수술을 당장 해야 한다고 했다. 

당장 수술을 할 거면 입원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재촉, 그리고 응급실 특유의 긴장감과 할아버지의 신음 속에서 아빠는 별 다른 고민이나 상황 파악을 할 겨를도 없이 급한 마음에 아빠는 일단 수술에 동의한 상태였다.

매번 입원대기를 걸어야 할 정도로 지역에서 인기 있던 대학병원엔 천운이었는지 마침 입원실이 비어서 바로 입원 수속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갑자기 노인이 다치거나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을 우리는 미리 대비해 본 적이 없었다. 

매년 할머니가 낙상으로 동네 정형외과에 단골로 입원하긴 했지만 할아버지는 딱히 그런 일도 없었고 할머니가 살아 계셨기 때문에 그런 결정들을 자식들이 해야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좀 더 많은 것을 알아봤어야 하나 싶다. 

노인들이 전신마취에 얼마나 취약한지, 더구나 뇌에 손상을 입은 적이 있는 뇌졸중 환자였는데 그런 큰 수술이 신체나 정신적으로 충격이 올 수도 있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지나서 이야기지만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만난 의사도 너무하다 싶었다. 무조건 수술을 해야 한다니.

이미 보행장애가 있고 노화로 걸음걸이가 시원찮은 상태라고 했는데도 수술 후 재활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했다.


이후에 벌어진 할아버지의 상태변화를 예측, 아니 누군가 그랬었다는 제대로 된 경험담이라도 들었더라면 아빠는 그때의 경솔한 결정을 후회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당장 아버지가 극도의 통증을 느끼는 것에 대한 압박감.

더구나 119 구조대 응급차를 타고도 두 번의 진료 거부. 응급실 의사의 긴급 수술 권유. 

아빠도 차분한 마음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같은 상황이었으면 나도 같은 결정을 했겠지..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자 이젠 또 새로운 주제, 경험해보지 못한 노인 수발에 대한 걱정, 수술 후유증 등에 대한 카더라 이야기들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이미 김장은 마무리가 되었고 새김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으로 상이 차려졌지만 누구 하나 식욕 있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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