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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별 Aug 15. 2021

ㅈㄱㅈㄱ한 여름

여름 감기에 걸린 것 같은데 치료제가 있을까요?



나는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

진한 초록 색깔이 가득한 나무와 숲, 그 위에 쨍한 푸른 하늘 그리고 확연한 그늘이 내린 땅, 그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 풀 내음.


모든 것을 생기 있게 하는 이 계절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하루 종일 에너지를 쏟아내던 태양이 퇴근 준비를 마치고 유유히 2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가는 길에 보이는 뿌듯하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등을 보이면 5-10분 정도의 여운이 남는다.

그 여운은 어느 날은 연한 핑크 색이었고, 어느 날은 코발트 오렌지 색이었고 또 어느 날은 연분홍과 연보라가 뒤엉켜 신비로운 기운을 남기기도 하였다. 비록 여름 장마 때는 기분에 따라 무지개를 남기기도 했지만 대체로 나는 보라색에 가까운 핑크를 띈 날이 가장 좋았다. 늘 비현실적이었던 내 머릿속과 닮아서였을까.


여름은 사람을 꿈꾸게 만든다. 그러니 "한여름 밤의 꿈" 이란 책이 나온 것이 아닐까. 여름은 무언가를 기대하고, 상상하고 춤추게 만들었다. 적어도 나의 여름은 그러했다.



그러나 올해는 조금 다르다.

여느 여름보다 무덥고 뜨겁고 눈부시지만 이번 여름 나는 지독하리만큼 한기를 느낀다. 환절기, 겨울철에 걸리는 감기와는 다르다. 이 감기는 몸이 아닌 마음과 이마엽에 온 감기인 것 같다. 자가 진단을 하는 나를 꾸짖을지 모르지만, 내 몸은 내 마음은 내가 제일 잘 안다. 확실히 여느 감기와는 다르다. 몸은 멀쩡하고 근육 모두 제 역할을 하고 있다. 피도 적당한 속도로 흐르는 것 같고 수분감은 살짝 떨어지지만 탈 수도 없다. 기침은 물론이고 기관지도 튼튼하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아픈 걸까.




원인은 '선택'이고 결과는 '후회'였다.

살면서 한 번도 나의 선택에 후회해본 적 없었다. 늘 놓인 선택지에서 최선을 다했다 믿었고. 의심은 않았으며 나 자신을 믿고 앞으로 걸었다. 가끔 뒤를 돌아봤지만 그것은 단지 그 길의 아름다움을 그리워했기 때문이지 뒤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내 일생에서 가장 큰 후회를 만났고 이는 적지 않은 고통과 아픔을 주게 된다. 그것은 작년 겨울부터 전초 증상을 보였고 올해 여름 고통으로 나를 찾아왔다. 내가 사랑해 마지못하는 이 소중한 여름날에 말이다.



반갑지 않은 손님, 쫓아낼 방법을 모르는 주인.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꽤나 무례하게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 내가 가는 이곳, 저곳 어느 장소 하나 빠지지 않고 나를 쫓아다니려는 탓에 나는 지칠대로 지쳤고, 계획했던 일정이 꼬였고 결국 그를 피하려다 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내가 하는 선택들은 모두 나를 1 순위로 두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를 밀어낼  있을지, 그가 없는 곳에   있을지만 고려하다 정작 나는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한 삶을 살게 되었다.




주체가 바뀐 삶은 자신의 가지를 스스로 꺾어버리는 나무와 같다.

가지 없는 나무는 햇빛을 봐도 소용이 없고 물을 흡수해도 자라지 않는다. 지금 나에게는 희망이 없다. 이 아픔이 계속될수록 나는 죽기를 기다리는 가지 없는 나무가 될 것이다. 주체성과 영혼을 빼앗긴 이 껍데기에는 어떠한 영양분과 거름과 사랑을 주어도 빛나는 여름 태양을 가릴 잎들을 키워낼 수 없다. 그저 시간을 때우는 가물고 갈리진 나무통만 남을 뿐이다.



가장 무덥고 뜨거운 이 여름에 나는 감기에 걸렸다.

유난히도 ㅈㄱㅈㄱ한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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