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마 오로라를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살아있는 화산과 빙하를 정말 눈앞에서 보고 싶다던 남편에게 무엇이 가장 좋았냐고 묻자, 대뜸 오로라가 아쉬웠다고 한다. 아이슬란드를 떠나온 지 일 년이 지나가자 다시 뭔가가 꿈틀거리나 보다. 사실 백야가 나타나는 한여름을 지나 가을에 접어들 쯤이면, 아이슬란드도 오로라를 볼 확률이 높아진다. 우리 가족이 귀국하고 일주일도 안 돼 오로라를 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니, 나도 사실은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구라미 사장님이 아이슬란드를 다시 가고 싶다는 건 아닐 텐데...
"얘들아~ 우리 뭉크 보러 가자. 노르웨이 오슬로에 '뭉크 미술관'이 있는데 말이야."
요 며칠 뜬금없는 뭉크 노래를 하는 남편이 수상했다. 노르웨이 여행을 향한 '절규'가 분명하다. 뭉크를 인질 삼아 오로라를 소환해 내기로 작정한 남편은, 특별한 반응이 없는 내게 '필살 승부수'까지 제시한다.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한다는 세기의 피오르를 감상할 수 있는 데다, '로포텐 제도'의 아름다운 야경을 즐길 수 있는 크루즈 여행 루트다. 비용을 좀 더 들이면 환브로가 좋아하는 퍼핀을 볼 수 있는 페로제도까지 갈 수 있다니.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질어질 현기증도 났지만, 여행이라는 단어만은 나를 또다시 묘한 설렘을 시간에 접어들게 만들고 말았다.
환브로는 종종 지난 여행 사진과 동영상을 꺼내보며 키득거린다. 가물가물 잊혀 가는 추억이 다시 현실이 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는 모양이다. 영상에 나오는 아이가 너무 귀엽다며 (정작 본인) 몸을 베베 꼬며 보길래 보여달랬더니 몇 해 전 할아버지, 아빠와 일본 홋카이도 '남탕여행' 영상이다. 5년 전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환브로가 셀카로 찍은 여행 후기 영상인데,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즐거웠던 순간으로 환브로가 선택한 장면은 아빠가 운전한 자동차 뒷좌석에서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던 거란다. 여행을 다녀온 직후였는데... 온천도 가고 오르골 박물관도 가고,,,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더 어렸을 때는 아예 기억이 없다. 유모차 타면서 기억해야 뭘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한 건 뭔가 계속 기억이 난다고 주장한다. 믿기 어렵지만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엄마에게, 전부는 아니고 순간순간 기억이 난다고 우겨댄다. 사실 진짜 기억을 하든 못 하든 1도 중요하지 않다. 영국 런던 여행을 다녀온 환브로가 '빅벤'과 커다란 '빅뱀'을 헷갈려하면 또 좀 어떤가. 긍정적인 해석과 함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독서를 강요하지 않았다. 글씨 하나 제대로 읽기 힘들 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건 '학대'나 다름없다고 나름의 논리를 펼쳤다. 그러고는 여행을 선택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걱정이 앞섰다. 주변에서도 우려를 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이라도 책을 많이 읽히고 학원 보내서 하나라도 더 배우게 하라는 목소리에 수차례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고집이라면 '타노스'를 능가하는 남편은 콧방귀로 응수했다. 학원에서 배우는 건 어차피 나중에 학교에서 다 배운다면서, 그렇게 우리 가족은 국내로 해외로 여행 가방을 챙겼다. 책으로부터 얻는 간접경험도 중요하고 학원에서 선행 학습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는 있겠지만, 직접 보고 경험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아이들을 성장시킨다고 믿는다.
그리고 혹시나 성장이 좀 더디면 어쩌랴. 가족 간의 끈끈한 유대감과 형제간의 우정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족은 학원 대신 여행을 가는 이유이다.
아이들과 10년이 넘게 틈만 나면 돌아다니고 있지만, 아직도 가보지 못한 나라들과 보여주고 싶은 곳들이 너무나 많다. 아이들은 이제 글씨를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됐고, 제법 책을 즐긴다. 그리고 사진과 영상을 넘어선 이야기를 추억한다. 덕분에 글쓰기와 거리가 먼 나는 감히 용기를 내 지난 여행을 끼적이기 시작했다. 생각만 하고 있던 내가 기회가 찾아왔고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서'라는 주제로 잊혀가는 우리 가족의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종의 글 쓰는 직업을 지닌 남편이 했으면 하고 기다렸던 일인데, 게으름의 화신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이렇게 시작을 해두면 언젠가 남편도 슬슬 움직이지 않을까. 그리고 아직은 읽기가 쓰기보다 편한 환브로도 언젠가 직접 무언가 기록하게 되지 않을까.
혹시 알아. 또 다른 누군가도 학원 대신 여행을 택하지 않을까.
그런데 얼마뒤 남편은 갑자기 노르웨이 여행 계획을 철회했다.
그러고는 지구의 '배꼽'을 보러 가고 싶다는데, 정말 그곳이 우리의 다음 여행지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