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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드레킴 Dec 10. 2024

21. 바람의 섬 미코노스

그리스 기항지 관광


밤새 출렁였던 커다란 배 안에서 나만 잠을 설친 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들과 남편이 계속 어지럽다고 하소연을 한다. 오히려 난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현기증이나 멀미 따윈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조식을 먹을 때에도 신랑은 여전히 불편함을 호소하긴 했지만 까마득한 어둠 속 해저 터널을 지나 물귀신이 되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난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드디어 그리스의 땅. 그중에서도 미코노스 섬에 도착했다.

그리스에는 6,000개가 넘는 섬이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227개 섬에만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중 거주 인구가 100명이 넘는 곳은 78개에 불과하다고 하니 대부분의 섬은 무인도나 개인 소유의 섬이 아닐까?

78개 섬 중엔 티비 광고 때문에 한국인에게 많이 알려진 산토리니섬도 있다. ‘바람의 섬’이라는 별명을 지닌 미코노스는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로 손꼽히는데 그래서 이곳에 오기까지 그렇게 강풍이 불었나 보다.

미코노스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제우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올림포스 신들과 거인족 기간테스가 신들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10년간이나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고 제우스를 도운 헤라클레스가 거인족을 섬멸하기 위해 던진 바위 조각이 바로 이 섬이라고 전해진다. 이후 태양신 아폴론의 손자인 미콘스(Mykons)의 이름을 딴 섬이 됐다고 한다. 상상력 부족한 엄마에게는 아이들이 열광하는 그리스 신화보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섬에 머물며 소설 <상실의 시대>를 쓰기 시작했다는 게 더 머릿속에 강하게 다가왔다.


크루즈에서 하선하기 전 관광 중심지인 시티센터까지 갈 수 있는 셔틀버스 티켓을 판매하고 있었다. 성인 9유로, 어린이 7유로라고 하는데 고민 없이 구매를 했다. 걸어가기엔 40분 이상이 소요되고 별다른 대중교통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기항지 관광을 할 예정이라면 반드시 교통 연결 편을 미리 알아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놓친 부분이다. 많은 곳을 다니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항해 중에는 와이파이가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미리 알아보지 않고 온다면 즉흥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들이 생기기 때문에 꼼꼼하게 계획하는 게 중요하다.

크루즈에서 내려 바깥공기를 쐬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다. 신랑은 여전히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근데 1분도 채 되지 않아 나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 눈앞에 커다랗게 쓰여 있는 'SEA BUS 1인 2유로'라는 팻말 때문이었다.

"한 사람당 2유로라고?"

"뭔가 다른 종류의 배겠지?"

"아니 우리 바가지 쓴 거야?" 믿을 수 없었다.

아, 미리 알아보지 않았다고 눈앞에서 24유로를 바가지 쓴 것이다.

기다리며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나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는 똑같은 보트를 웃돈을 더 주고 탄 것이다. 이래저래 현기증 난다.

( *TIP: 크루즈로 미코노스를 간다면 선착장에서 개별 티켓을 구매하는 게 훨씬 저렴하다.)

미코노스 선착장에서 ‘SEA BUS’를 타면 10여 분 만에 코라(구항구)에 다다른다. 려환이가 여행오기 전 읽은 <세계사 보물찾기- 그리스 문명 편>에서 선글라스를 꼭 가지고 가야 하는 섬이라 했다고 한 것처럼 이 섬의 첫 느낌은 ‘눈부신 흰색’이다.

보트에서 내리자마자 니콜라스 교회가 보인다. 섬에 도착하면 만나는 첫 번째 교회이다. 이 작은 섬에 정교회 교회가 무려 400개나 있다고 한다. 하얀 건물에 파란색 돔 지붕. 교회가 있는 만토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아기자기한 부티크숍과 레스토랑, 호텔, 작은 박물관 등 모두 새하얀 색에 문이나 지붕만 파랗다. 간간히 빨간색으로 칠해진 문이나 돔도 보인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는 발검음이 아름답다. 초겨울 즉, 비수기로 접어든 미코노스는 아직은 크루즈가 오는 일정 때문에 문을 닫지 않고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마 크루즈의 시즌이 끝나면 이 섬은 봄이 올 때까지 겨울잠에 들어갈 태세다. 그리고 다시 화사한 부겐빌레아꽃이 만발하는 봄이 되면 새하얀 건물들 사이로 빼곡히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겠지. 차라리 바람은 좀 불어도 한산한 11월도 나름 매력 있다고 생각했다.

17세기에 완공되었다는 5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파나기아 파라포르티아니 교회를 지나고 좀은 골목 사이로 이어진 아기자기한 상점들을 지나면 언덕 위에 보니스(Boni´s) 풍차가 보인다. 더 이상 돌지 않은 아주 오래된 풍차이지만 미코노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자리다. 옛날에는 풍차가 많은 섬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원래 16대였던 풍차는 이제 5대만 남아 미코노스의 명물이 되었다. 육지에서 공수해 온 곡식을 빻는 역할을 했던 풍차를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포토 스폿으로 남겨둔 것 같았다. 풍차 안에 박물관이 있다고 했는데 아쉽게도 문이 잠겨있었다. 풍차가 있는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항구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작은 배들, 멀리 우리가 타고 온 MSC 크루즈도 보인다. 그리고 하얀 교회와 집들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나 사진을 찍는 작가들에게는 오래 머물고 싶을 그런 섬임에 틀림이 없다. 나도 이 언덕에 앉아 시시각각 변하는 섬의 색을 관찰하며 글을 쓰는 상상을 했다. 얼마나 아름다울까.

눈을 깜빡거리고 시선을 돌리는 모든 곳들이 아름다운 이 섬에 또 하나 눈에 자주 띄는 건 고양이다.

아이들은 고양이 사진 찍기에 신이 났다.

"엄마! 나 고양이 사진만 30장이 넘어요."

"얘들아~ 근데 여기엔 왜 이렇게 고양이가 많은 걸까?"

"그러게..."

미코노스에 한 달 반을 머물면서 에세이를 썼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보면 고양이가 많은 이유가 나온다.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쓰레기가 많다는 점, 사람들이 일 년의 반은 야외에서 식사를 하기 때문에 남은 음식물을 쉽게 얻어먹을 수 있는 점, 그리고 기후가 혹독하지 않은 점이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고양이에 대해 관대하다고 한다. 애완용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들 세계의 그저 일부로 여기기 때문에 밥을 주는 것도 민폐가 아닌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것이다.


좀 더 걷다 보니 려환이가 좋아하는 크라페집을 발견했다. 마침 당충전도 필요하고 화장실도 갈 겸 자리를 잡았다. 크라페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체구 좋으신 할아버지 한분이 다가오셨다. 크라페를 만들고 계신 카페 주인과 친구분이신 듯했다.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한국인가요?"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보통은 일본이나 중국인을 먼저 물어보시는데,,,"

"난 20년 전에 부산에서 일했어요. 현대 조선소, 배를 만드는 회사예요."

"우와~~ 정말요? 반가워요. 그래서 저희를 한눈에 알아보셨군요."

"한국은 나에게 특별한 곳이에요. 한국 사람들, 한국 음식들, 추억이 많아요. 내 젊은 날의 추억.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고 보니 6,000개가 넘는 섬이 있는 그리스이기에 크고 작은 선박 회사들과 관련 일을 하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미코노스가 산토리니와 다른 점이 있다면 건물 색이다. 무조건 All white가 아니다. 획일화를 싫어하는 그리스인들의 성격을 잘 보여주듯 흰색에 민트나 핑크, 다양한 블루가 눈에 띄기도 한다. 바로 풍차를 등지면 에게 해와 맞닿은 건물들이 펼쳐진 리틀베니스 해안선을 만난다. 여기에선 석양을 꼭 봐야 한다고 하는데 아직 해가 지려면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 슬슬 배가 고파오고 오후가 되면서 차가운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크루즈에 돌아가야 할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지만 석양을 위해 음식값 비싼 레스토랑에 자릿값을 지불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크루즈에서도 매일같이 아름다운 노을을 만나고 있잖아!"

"리틀 베니스의 노을을 직접 못 보는 건 아쉽지만 난 크루즈로 돌아가는 것도 좋아. 우린 이미 베니스에 갔잖아!"

"음식은 또 어떻고!! 오늘도 우리 정찬 먹는 거죠?"


바람의 섬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차가운 바닷바람 앞에서 우리 가족은 아늑하고 근사한 크루즈로의 컴백을 원했다. 다시 좁은 골목길을 지나 나오는데 또 다른 백발의 노인이 길을 막는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한국에서 왔어요."

"오~난 30년 전에 울산에서 일했죠. 포항도 기억해요. 한국 조선소에서 일한 그리스인들이 많죠. 그리워요. 한국 사람들은 무척 친절하고 따뜻했어요. 착한 민족이에요"

이토록 한국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멀고 먼 이곳 미코노스에 계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 분들의 추억을 잠시나마 떠올리게 해 드린 것 같아 뭉클함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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