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오전에 출근했다가 저녁때 퇴근해서 잘 정리된 집에 들어온다면 같은 기분일까?
기항지 관광을 다녀와 말끔하게 정리된 선실의 문을 열 때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 입고 있던 옷을 집어던지고 밖에서 들고 온 짐들을 내려놓으면 작은 방은 5분도 채 안되어 다시 정신없는 방으로 돌변할지라도,,
크루즈도 보통의 호텔과 마친가지로 선실마다 담당 하우스키핑이 있다.
처음 크루즈에 승선하면 우리 선실을 담당하는 하우스키핑이 오셔서 일반 호텔과는 다른 '선실 사용법'에 대해 설명해 주고 인사를 나눈다. 영화 해리포터에서 '도비'의 목소리를 닮은 우리 선실의 하우스키핑을 담당하는 분은 스리랑카에서 온 '제이드'씨다. 목소리가 도비처럼 하이톤이라 아이들은 아저씨가 인사할 때마다 도비가 생각난다고 웃었지만 항상 차분하고 조용히 말씀하시는 아주 예의 바른 분이다.
"내일 하선하신다고요?"
"네~맞아요. 저흰 스플리트로 돌아가지 않아요. 아테네에서 좀 여유 있게 돌아보고 바로 한국으로 갈 예정이거든요."
"너무 아쉽군요. 그럼, 오늘밤에 하선 준비를 위한 서류를 챙겨 드릴게요. 마지막 밤이니 충분히 즐기시고 짐은 천천히 챙기셔도 됩니다. 트렁크는 새벽 2시 전까지만 선실 밖에 내놓으시면 내일 오전 터미널에서 찾으실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원래대로 크루즈 스케줄대로 라면 우리는 내일 아테네를 거쳐 다시 올 데이 항해 후 크로아티아 스플리트로 돌아가 하선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 아테네는 첫째 지환이가 버킷리스트로 가지고 있는 '꼭 가보고 싶은 도시'중 한 곳이고 그만큼 많은 유적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의 종착지를 변경하기로 한 것이다. 2박을 버리는 것 같아(특히, 음식 그중에서도 두 번의 정찬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가장 아쉬웠다.) 너무 아쉽기도 했지만 그리스라는 나라를 다시 방문하기는 쉽지 않긴에 결정을 했다.
"크루즈 여행은 어떠셨어요?"
"너무 만족스러웠어요. 특히, 음식이 참 좋았어요. MSC는 두 번째 타는 건데 훨씬 업그레이드된 걸 느꼈어요. 물론, 서비스도 좋고 모든 분들이 정말 친절하셨어요."
"만족하셨다니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제 강풍으로 배가 많이 흔들려 고생스러웠어요. 무섭기도 하고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에요."
"맞아요. 흔한 일은 아니죠~. 하지만 위험하지 않으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근데, 다른 한국 손님들은 거의 만나지 못했어요. 이 루트엔 아시안이 잘 안 오나요?"
"9월과 10월엔 꽤 많은 한국인 손님들이 승선했었어요. 여행사를 통해 단체관광으로 오기도 했고요."
"제이드씨는 크루즈 일을 오랫동안 하셨나요?"
"네~ 저는 MSC와 일하면서 전 세계를 항해합니다. 벌써 7년째예요. 물론, 하선해서 기항지 관광을 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이 일은 아주 매력적이에요. 집에 자주 갈 수는 없지만요.
3월부터 11월 현재까지 9개월째 항해 중이지요. 이제 저도 이 배에서 내리면 스리랑카로 돌아갑니다."
"휴가인가요?"
"네~ 맞아요. 내년 2월까지 고향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보내요. 4살 된 딸이 기다리고 있어요."
크루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장기간 배를 타고 승객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비수기가 오면 2~3개월 휴가를 보낸다고 했다. 멋진 직업이긴 하지만 가족과 오랜 시간 떨어져 있어야 하니 외로움이 동반되는 근무여건이기도 하다. 특히나 어린아이들은 동반한 가족 여행 중인 손님들은 맞이하다 보면 제이드씨처럼 본인의 가족이 너무 그리워질 거 같다.
"그럼, 9개월 만에 만나는 거예요? 너무 보고 싶을 거 같아요. 아이들은 일주일만 못 봐도 쑥쑥 커있는 걸 느끼는데 실제로 만나면 깜짝 놀라겠어요. 아빠를 만난다니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하는 딸과 부인을 생각하며 활짝 웃는 제이드씨의 눈이 촉촉하게 반짝였다.
"잠시만요."
두리번거리다 지갑을 찾았다. 이번 여행은 트레블 카드를 사용 중이어서 현금이 얼마 없다.
이런.
10유로 지폐를 꺼내어 마리오 씨에게 내밀었다.
"미안해요. 너무 약소하지만 귀여운 딸 만날 때 초콜릿 선물이라도 추가해 주세요."
선실의 팁은 이미 포함되어 있어 따로 지불하지 않아도 되지만 작은 마음이라도 전달하고 싶었다. 아이들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인종을 넘어 다 똑같으니까. 제이드씨는 괜찮다고 마다했지만
"한국이모가 줬다고 전해줘요."라며 건넸다.
"스리랑카에 가보셨나요?"
"아직 못 가봤어요. 꼭 한번 여행해 보고 싶어요."
"다음엔 스리랑카 여행도 꼭 해보세요. 무척 아름다운 나라예요. 물가도 저렴하고 홍차를 좋아하신다면 최고의 여행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콜롬보 공항 가까이에 좋은 숙소들이 많은데 가격도 아주 착하답니다. 홍차 투어도 있어요. 아이들과 함께 놀러 오세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스리랑카를 방문하게 된다면 제일 먼저 제이드씨가 생각날 거 같다.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많은 국적의 사람들은 스치기도 하고 만나기도 한다. 잠시의 인연이지만 그 우연은 곧 그 도시와 나라를 기억하게 되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스리랑카의 제이드씨처럼 나도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로 인해 한국을 기억하고 생각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참, 부탁이 하나 있어요. 보통은 배에 타면 매일 귀여운 '타월 아트'를 해주시던데 이번 여행에서는 한 번도 타월 아트를 보지 못했어요."
"오~ 너무 미안해요. 업무가 바쁘다 보니 제가 신경을 못 썼어요. 기항지 관광에서 돌아오시면 제가 꼭 만들어 놓을게요."
그날 오후 미코노스 관광을 마치고 선실로 돌아오니 귀여운 멍멍이와 그 옆엔 '하선 안내서'가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