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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라 Aug 27. 2020

생활 능력자와의 조우

할머니도 다 같은 할머니는 아니라서


늘씬하게 뻗은 워싱턴야자가 살랑 반짝거리는 제주공항이다. 1시간도 채 안 되어 도착한 이곳은 내 눈을 감게 하는 재주가 있다. 어떤 용무로든 이곳에 발을 디딘 이들에게 맘껏 쉬다 가라고 이르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66일 된 아기를 가슴팍에 품고, 내리 감기는 눈과 위로 들리는 턱을 의식하며 숨을 흠뻑 들이켰다.


오랜만에 질 좋은 공기로 펌프질 좀 해보려는데 화들짝 전화벨이 울렸다. 도착했느냐는 어머님의 전화다. 당신도 이제 곧 도착할 것 같으니, 1층 3번 게이트 앞에서 딱! 기다리라고 했다. 알았다는 회답을 하기도 전에 당신의 말꼬리까지 자르듯 전화는 끊겼다. 


들숨이고 날숨이고 공중으로 피쉬- 날려버리고는 3번 게이트를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3이라는 숫자를 확인하고, 66일 된 아기와 32인치 확장형 케리어와 모유팩과 유축기와 기저귀 일채가 담긴 기저귀 가방과 티켓과 지갑과 신분증과 물티슈를 담은 크로스백을 메고, 이고, 지고, 들고, 밀며, 어그적 자리를 옮겼다.



잃어버린 물건이 없는지 재차 확인을 하고, 내 앞에서 멈출만한 차들을 고르며 눈길을 살폈다. 어머님이 어떤 차를 운전하고 올지 몰랐던 나는 미처 묻지 못하고 끊겨버린 전화가 못내 아쉬웠지만, 운전 중일 어머님을 생각하면 전화는 되도록 삼가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다. 내가 이미 눈에 띄는 모습일 것이고, 어머님이 먼저 알아볼 것이기에 잠자코 기다렸다.


10월이었지만 평일이었고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오전 11시경이었으니, 국내선 도착 게이트 앞 도로를 지나는 차들은 많지 않았다. 빨라야 시속 30킬로미터 정도의 한가로운 차들 속에서 순화 씨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이런저런 계산을 하며 단번에 순화 씨를 알아보겠노라며 의지를 다지는 사이, 간간히 지나가는 차들 속에 유난히 속도감 있는 하얀색 트럭 하나가 반짝 나타났다. 도로 위를 살짝 날았음이 분명하다. 적당히 꺾인 커브 길을 쇼트트랙 선수가 몸을 비틀 듯 - 트럭과 하나 되어 - 우측으로 30도쯤 기울이며 들어오고 있었다. 유난히 커다란 트럭의 핸들을 짧고 가는 팔로 떡 벌어지게 잡고는 시속 50킬로를 유지한 채 커브를 돌았다. 싸악~! 돌자마자 급브레이크로 정차하는 스킬 스펙! 리스펙! 트럭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지만, 한껏 반가움이 느껴지는 운전 스킬은 예상대로 어머님의 것이었다. 안전과도 연결되는 운전 습관에 대해 조금은 부드럽게 운전할 것을 진작에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20년도 넘은 어머님의 운전 생활에 대해 쉬 말할 수 있는 입장은 되지 못했다. 그때는 분명 그랬다.


내리기가 무섭게 아이고아이고 어떻게 와졌느냐며 반기는 어머님께서 32인치 확장형 케리어와 2절지만한 기저귀가방을 트럭의 짐칸에 올리는 사이, 난 크로스백과 66일의 아기를 바짝 품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66일의 잠든 아기를 슬쩍 확인한 순화 씨는 두 번째 손주임에도 첫 번째 손주 보듯 미소를 짓고는 당신 몸에 비해 몹씨 커다란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66일의 아기는 트럭을 페라리 몰듯하는 할머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제한 속도를 낮추라는 무언의 방지턱은 66일 아기를 깊은 잠으로 유도하는 멀미용 도구일 뿐, 시속 50킬로미터 이하로 속도를 늦추는 본래의 역할은 도통 해내질 못했다.


후에 만난 친구 H는 공항에서 하얀 트럭을 타는 나를 봤다고 했다. 얼핏 보기에 운전자는 분명 여자였는데, 부웅 떠나는 모습이 여자의 그것이라기엔 의심스러웠다고 했다. 게다가 환갑을 넘긴 시골의 어른일 거라곤 사상조차 하지 못했다며, 시어머니가 무척 멋있는 분인 것 같다며 감탄했다. 어쩌면 어머님에 대한 리스펙이 생기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가 아니었을까. 그 후로도 난 어머님의 트럭으로 응급실도 가고, 세계귤박람회도 가고, 5성급 호텔도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때마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아담한 체형의 할머니를 본 사람들의 표정을 간간히 기억한다.


찬이로부터 시작된 제주생활에 만나게 된 뜻밖의 수확은 어머님의 생활 능력을 엿보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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