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스티븐 얼터/ 책세상
[친애하는 히말라야 씨]라는 책 제목 위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히말라야 순례, 치유의 여정/ 고독과 함께 느릿느릿 오르다.”
나는 처음에 이 작은 글씨를 “고통과 함께 느릿느릿 오르다”로 대충 읽고는, 히말라야 등반가가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정상을 정복하는 책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 책은 등반가가 자기의 경험을 쓴 책이 아니라 작가가 등반을 하며 쓴 책이다. 그것도 혈기왕성한 젊은 작가가 산을 정복하며 쓴 영웅담이 아닌, 죽음의 고비를 간신히 넘긴 연약한 남자가 산을 통해 자기를 치유해가는 이야기이다.
작가 스티븐은 인도의 무수리에서 아내와 함께 살다가 괴한의 침입을 받고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 오랜 기간 병원 침상에 누워 지내며 신체는 회복하였지만 마음의 상처는 몸의 회복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된 그는 홀로 집 뒤에 있는 작은 동산인 플래그 힐에 오른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그곳 정상에 올라 우뚝 솟은 히말라야를 보면 자신이 치유될지도 모른다는 충동적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절뚝이는 다리로 그 정상에 서서 히말라야의 세 봉우리, 반다르푼치와 난다 데비, 카일라스를 바라본다. 마침내 그는 고향인 무수리에서 그동안 끊임없이 바라만 보며 살았던 히말라야의 세 봉우리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이 여정이 자기를 치유할 것을, 산이 그렇게 할 것을 믿으며 말이다.
그는 마침내 이 세 봉우리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물론 여정은 쉽지 않았고 때로는 정상에 오르기도 때로는 오르지 못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정상에 올랐느냐 아니냐의 단순한 문제가 아닌 여정 자체, 그리고 그가 만난 산 그 자체였다.
그는 여정의 노선이나 겪었던 어려움 혹은 행운들을 기술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여정 중에 만난 산의 모습, 그리고 그 산을 만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자세히 기술한다. 또한 여러 다른 작가들의 이야기와 신화들을 적재적소에 끼워 넣음으로써 이 여정을 더욱 풍성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내가 그의 생각들에 모두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연이 사람을 치유해가는 과정과 몸을 움직여 걸으면서만 얻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회복의 단계를 보며 공감할 수 있었다. 또 히말라야의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산재해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가감 없이 지적하고 있어 히말라야 지역에 대한 환상이 아닌 실제를 아주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결코 짧지 않은 분량이지만 그와 함께 이 순례의 여정을 걷는다는 기분으로, 어쩌면 그가 들려주는 수많은 신화와 책의 구절들, 그의 경험들을 두런두런 나눈다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나도 히말라야에 언젠가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어 졌다.
산을 인간의 언어로 정의 내리는 대신 우리는 산이 우리를 정의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미약한 인간의 더 큰 신비가 이해되기 시작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세상과 우리가 분리되어 살아간다는 기존의 편견을 지우고 인식과 현실을 구분 짓는 사고를 뛰어넘는 것이다. p.79
등반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제임스 램지 울만이 쓴 다음 문장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의 고봉들을 오르는 일은 그것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인간이 고봉을 올려다보고 그곳에 오르고자 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손에 닿지 않는 무언가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만큼 인간이 인간다울 때가 없다는 사실, 자신의 무지와 두려움을 대면한 싸움에서의 승리보다 더 값진 승리는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산이 주는 최고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p. 129
그럼에도 우리는 산의 품에서, 그 치유의 골짜기와 마음을 움직이는 신화에서 좀처럼 멀어지지 못한다. 산이 여전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우리의 발이 닿지 않는 길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차원을 상징하기에 계속해서 산을 믿는 것이다. 동시에 산은 너무나 빤하고 어디에나 존재하며 가늠이 불가하리만치 실제적이고 항상 그 자리에 있다. p. 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