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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May 16. 2017

대단한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호어스트 에버스의 [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 

호어스트 에버스. 나는 이 독일 작가의 책을 읽으면 살맛이 난다. 아, 이런 칭찬을 그에게 직접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당신의 책을 읽으면 잠깐씩 지루하던 삶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고. 독일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데, 누가 이 말을 좀 번역해주면 좋겠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이십 대 초반, 고등학생이던 동생이 그의 책을 선물해주었던 때였다. 그때만 해도 동생은 책 읽는 것을 그리 즐기던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동생이 자기가 읽어보니 재미있더라면서 선물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책은 특별한 책이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첫 번째 에버스 씨의 책이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이 매거진의 첫 책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 책은 2014년에 갈매나무 출판사에서 초판을 발행한 비교적 신간이다. 나는 그를 만난 첫 책 [세상의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에 너무나 만족한 나머지 그의 다른 책들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가 몇 년 전 [느낌으로 아는 것들]을 읽고 역시 감탄했고, 얼마 전 중고서점에서 오늘의 책 [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를 발견하고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사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을 한 결과 아직 읽어보지 못한, 한국에서 출판된 그의 다른 책들이 두 권이 더 남았다는 사실에 나는 지금 몹시 흥분한 상태이다.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지만 이 작가가 (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노벨상을 받을만한 엄청난 작가라거나 누구라도 한번 읽어 보기만 한다면 존경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런 엄청난 작품이 아니라는데 이 작가의 책들이 갖는 의미가 크다. 읽어보지 못한 책이 남아있기 때문에 일반화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읽어본 3권의 책을 생각해볼 때, 그의 작품이 톨스토이나 헤르만 헤세, 헤밍웨이가 고민한 진지하고 심오한 인생의 질문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참 가볍고 유쾌하며, 진지한 고민 같은 건 개나 줘버리라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책 속에서 그는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아니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독일 사람에 대한 인상과는 전혀 다른 삶을 보여준다. 독일 사람 하면 떠오르는 검소하고 정직하며 깔끔하고 계획적일 것 같은 인상, 잘 정돈된 집에 앉아 단출하고 건강해 보이는 식사를 하고 신문을 읽으며 이른 아침을 시작할 것 같은 그런 인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이 펼쳐진다. 늦잠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술에 취해 각종 사고를 일으키고, 사기를 당하거나 버스를 잘못 타기도 한다. 엉뚱한 장난들 혹은 엉뚱한 결과를 낳는 진지한 계획들을 세우고, 터무니없는 사업을 꾸리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빠져 우왕좌왕한다. 


그는 그저 자기가 겪은 엉망진창 비슷한 일상을 다소 과장된 모습으로 보여주는데, 나는 이 남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때로 혼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한참을 낄낄 대고, 때로는 한없이 위로받는다. 그는 베를린 관광객의 어떤 행동들에 대해 진지하게 투덜대기도 하고, 하기 싫은 일을 떠맡은 사람이 느끼는 당황스러움과 귀찮은 마음을 한껏 표현한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바라보며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자신을 맡기고는 결국 맞이하게 되는 엉뚱한 결과에 스스로 만족하거나, 꼼수를 부리다가 겪는 골탕과 난감한 상황을 체념한 채 받아들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사소한 것에 안달복달하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고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을 인생에 대한 미련으로 가득 찬 나의 좁은 마음을 마주한다. 그는 결코 대단한 인생의 진리를 말하려고 하지 않지만, 낄낄 거리며 책장을 넘기는 사이 내가 사는 일상을 들여다보게 하고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던져준다. 이것이 호어스트 에버스의 책들의 매력이다. 대단한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정말 대단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갖게 하는 것 말이다.


물론 독일식 유머가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책의 유머 코드는 약간 허무개그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점만 극복한다면 누구나 빠져들 수 있는 작가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책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은 쉽지도 않고 의미도 없으니 책의 몇 장면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지금 나의 걱정은 훨씬 재미있는 이 책을 몇 구절 떼어서 옮김으로써 책의 매력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전후 상황을 알아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한번 읽어 보시라. 결코 시간이 아깝지는 않으니.   



그 순간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카차라는 여자를 알고 지낸 적이 있다. 20대 초반에 그녀와 몇 주를 함께 지냈다. 카차는 기분이 하루에도 몇십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는 데다 엄청난 다혈질이어서 관계를 유지하기가 정말 고되고 힘들었다. "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 언젠가 그녀가 그런 말을 했다. "안 그러면 날 오래 참지 못할 테니까." 그 말이 맞았다. 물론 나는 그녀를 오래 참지 못했지만 그녀의 충고는 훗날 내게 자주 도움이 되었다. 정말로 견딜 수가 없을 땐 사랑만이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지금 노화에도 그 말이 해당되는 것이다.
p. 12 <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 중 


솔직히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사건들에서 진짜 진실을 경험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다들 알 것이다. 대부분은 전혀 쓸모없는 일들만 일어난다. 이상하고 괴상망측하며 신경을 긁어대는 쓰레기들, 아무짝에도 쓸데없으면서 괜히 잘난 척하며 하루 종일 삑삑 울리는 현실의 소음들 말이다. 그러니 진실은 각자 알아서 생각해야 한다. 한마디로 진실을 찾는 자가 현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없는 법이라고 할까?
 p. 27 <치커리 소시지> 중


코트부스에는 간단명료하게 '지불'이라는 이름의 큰 쇼핑센터가 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이름이다. 솔직하고 예의 바르다. '지불'! 자고로 쇼핑센터의 이름은 그래야 한다. '지급'이랄지 '짤랑짤랑' 정도도 봐줄 만하다. '낙원'이니 '파라다이스' 같은 미사여구는 절대 안 된다. '사 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나 '돈이 엄청나게 드는 쇼핑센터' 같은 이름으로 지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하이데거마저 거리낌 없이 양말 몇 켤레 사게 할 수 있을 인간 소비 현실을 진실하게 기술한 것일 테니 말이다.
 p.72 <기분 좋은 쇼핑> 중


그런 식의 발상은 매우 칭찬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사건을 다른 측면에서도 살펴보는 거다. 예를 들어 등반가가 주인공인 영화라면 추락한 등반가의 드라마와 비극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굴러 떨어질 때 산은 대체 어떤 기분이 드는지도 고민하는 것이다. 어쩌면 산도 괴로울지 모른다. 착한 화산에게도 한 번쯤 속내를 털어놓을 기회가 필요하다.
p. 92 <마지막 유언> 중


"... 맥주 대신 하루에 2유로씩 저금통에 넣었다고 생각해 봐. 30년이면 엄청난 돈을 모을 거야. 어떻게 생각해?"
상대는 편안한 표정으로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고개를 젓는다.
"30년 후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그리고 너무 위험해."
"뭐가?"
"맥주 안 마시고 돈 모으는 거 말이야. 너무 위험해."
"뭐가 위험해?"
"한번 생각해 봐. 내가 30년 동안 맥주를 마시다가 어느 날 깨닫는 거야. 이런, 차라리 이 돈을 모을걸. 그 돈을 지금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는 자신의 고민을 보여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저 멀리 일방통행로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그래도 그건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어떤 식으로든 그 1만 2천900유로를 다시 마련할 수 있을 거야.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아. 반대로 30년 내내 절약만 하다가 이렇게 깨닫는다고 생각해 봐. 이런 이런, 차라리 맥주를 마실걸. 그럼 30년 동안 못 마신 맥주는 어떻게 회복해야 하지? 매일 0.5리터씩 30년이면 약 5천400리터야. 그건 절대 회복할 수가 없어. 설사, 한다고 해도 다른 일은 전혀 못할 거야. 여생을 쉬지 않고 맥주만 마셔야 하는 거지. 얼마나 스트레스가 크겠어. 재미도 없을 거야. 인생의 황혼을 그런 식으로 보내다니. 술만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는 거야. 그러느니 지금부터 여유 있게 준비하는 거지. 그래야 노후가 편안해질 테니까. 또 마실 수 있는 만큼만 마셔도 되니까."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네. 그러니까 지금 네가 매일 저녁에 마시는 이 맥주가 너한테 일종의 노후 준비인 셈이네."
"바로 그거지. 내 노후 준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매일 저녁 마시는 이 맥주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지. 절약해서 돈을 모으는 것보다는 항상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거든. 그러느라 돈을 못 모았다면 그건 노후에..."
안타깝게도 남은 말은 엄청난 트림 소리에 묻히고 만다. 그래도 그의 친구는 알아들은 것 같다.
p.270-271 <맥주 안 마시고 돈 모으는 건, 위험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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