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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May 03. 2016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게으르고 실수하는 삶을 응원한다

매거진을 시작하면서 어떤 책 이야기로 시작을 해 볼까 한참을 고민했다. 너무나 사랑하는 시인의 이야기를 해 볼까, 글을 읽다 보면 유시진 대위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그 작가의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불후의 명작을 한 권 골라볼까. 그러다가 이 책이 딱 떠올랐는데 그 후로는 고민하지 않았다. 매거진의 기획의도와 딱 맞아떨어지는, 그리고 게으르고 실수 투성이인 나의 삶을 판단하지 않고 토닥여주는 언제나 내 편 같은 책.


오늘 내가 다시 읽고 있는 책은 호어스트 에버스(Horst Evers)의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이다.

늘 분주하고 바쁜 당신에게 추천한다.


이 책은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오랜 친구인 남동생이 그가 고등학교 시절에 추천해준 책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 후부터 나는 오늘까지도 이 책을 사랑하고 아끼며 내 책장의 가장 한 가운데, 손이 잘 가고 언제나 눈이 닿는 곳에 꽂아 놓고 있다. 그리고 때때로 마음이 너무 분주하고 사는 게 팍팍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꺼내 본다. 당 떨어졌을 때 초콜릿 먹듯이 말이다. 이 책은 당 보충용으로도 좋고, 선물용으로도 좋다. 선물용 누군가에게 책 선물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책 선물이라는 게 생각보다 참 쉽지 않은 일다. 그 사람이 소설을 좋아하는지, 수필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고 심지어 그 사람이 책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면 이 책이 딱이다. 이 책은 소설 같으면서도 수필 같다. 게다가 짧다. 어려운 문장도 없고 긴 챕터도 없다. 짧으면 한 페이지, 길어야 다섯 페이지의 짧은 이야기들이 월화수목금토일이라는 익숙한 분류로 모여 있다. 그리고 아주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가도 책도 아니어서 선물하면서 책 많이 읽는 척을 하기도 좋다.(아, 이건 말하지 말걸 그랬나)


작가인 호어스트 에버스는 독일 사람이다. 서문에 보면 이 책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야기 모음집으로 본래 무대 발표를 위한 쓰인 작품들이다. 이 각각의 작품들은 정기 낭독무대에서 낭독되었다고 한다. 일정한 요일, 일정한 시간에 일군의 작가들이 모여 청중 앞에서 신작 텍스트를 읽는 것이다. 이 모임은 1996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지금은 이 책이 출간된 2008년일 테니까 최소한 1996년부터 2008년까지 13년 이상 이어졌다는 말이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모임이 있다는 것부터가 일단 너무 매력적이다. 작가들이 모여 자기가 쓴 작품을 낭독하고 그것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연이라니 말이다. 작가가 직접 읽어주는 글을 들으면서 웃기도 하고 공감하면서 같은 공명을 만들어가는 공간에 나도 한 번쯤 가보고 싶다.


이 책의 매력은 낭독을 위한 글이라는 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냐면, 일단 지루하지 않다. 그리고 책의 등장인물은 작가의 이름과 같이 호어스트인데 이 인물이 또 헤어 나올 수 없이 매력적이다. 이야기들은 각각의 개별적인 작품이고 구성은 시간순이 아니다. 책의 구성은 작가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 내재적 질서 같은 것이 존재했고 그 내재적 질서에 따라 목차를 구성했다. 내재적 질서 어쩌고 하니까 뭔가 심오해 보이지만, 어려운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작가가 말하는 주제가 있다면 이것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하나로 뭉뚱그려보면 하나의 그림이 떠오른다고 한다. 그것은,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사실은 처음 읽었을 때는 제목이 말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겨우 이십 대 초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나 삼십 대 초반이 되고 보니 제목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조금은 더 이해가 된다. 십 년쯤 더 지나 사십 대가 되면 또 다른 느낌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이 책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작정이다.

 



좋아하는 구절을 적어보려고 열심히 책을 뒤적거렸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나의 정의에 의하면) '독일식 유머'라서 어느 한 부분만 떼어서 읽으면 썰렁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라는 반응을 이끌어내기 십상이다. 그러니 이 책의 어느 한 부분을 떼어 이 글에 소개하는 것은 책에 대한 기대를 반감시키는 괘씸한 행동이 될 것 같아서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분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 호어스트를 좋아하는 이유가 담긴 이 책의 첫대목이다.


월요일 출발

할 일이 너무 많아

월요일 오전 11시. 소파에 앉아 할 일을 적은 목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오늘 안에 그 일들을 모두 해치울 결심으로 일부러 8시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일에 달려드는 대신 쪽지만 바라보며 나는 무연히 생각한다. '아이고 맙소사. 아무래도 무리다, 무리. 뭔 일이 저렇게 많아? 저 많은 걸 누가 다 하느냐고? 호어스트! 세상에, 일복이 터졌구나. 8시부터 일어나 설쳐도 줄어들기는커녕 그대로잖아. 도대체 얼마나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얘기야?'

목록에는 내가 기꺼이 신이 나서 할 만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 일들을 하지 않기 위해, 차라리 다른 일거리를 생각해내려고 나는 벌써 세 시간째 이러고 앉아 있는 것이다. 그래야 적어도 양심의 채근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책장의 책을 키 순서대로 정렬하는 건 어떨까?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장점이 있을뿐더러 언제고 다시 이런 시련이 닥치면 그때는 알파벳순으로 재배열할 수도 있다. 그거 괜찮다! 책장에서 책을 스무 권쯤 빼서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러나 순간 의욕이 사라진다. 소파로 돌아가 펜을 들고 목록에 적는다. 바닥에 놓여 있는 책 다시 책장에 꽂기! 휴우, 힘들어 죽겠다. 사실 이쯤에서 좀 쉬어 주어야 하는데 나처럼 할 일이 산더미인 처지라면 그럴 수도 없다.

양심이 나를 괴롭힌다. 조만간 다른 좋은 일거리가 떠오르지 않으면 목록에 있는 일을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정신적 압박은 상대가 철천지원수라 해도 결코 바라지 말 일이다. 목록의 내용을 컴퓨터에 깔끔하게 입력하는 건 어떨까? 정말 좋은 생각이다. 산뜻하고 조직적으로 보일 것이 틀림없는 데다 양심도 두 손 들어 환영할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는 건 대개 그럴듯한 진짜 작업을 뜻하니까.


무연히 : 아득하게 너른 상태로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단어)


호어스트는 게으름과 일명 '허튼짓'의 대가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탓하지 않고 그런 자기를 받아들이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즐겁게 살아간다. 너무 섣불리, 너무 사소한 이유로 누군가를 혹은 자기 자신을 '루저'라고 낙인찍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빠져 사는 것을 당연시하는 이 사회에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나는 별 대단한 것도 없고 특별한 장기도 능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나를 늘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책이 가진, 게으르고 실수 투성이인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다. 좀 게을러도 괜찮고, 좀 실수해도 괜찮고, 길을 좀 잃어도 괜찮다. 좀 느리게 가면 되고, 다시 해 보면 되고 혹은 이도 저도 안되면 때려치워도 되고, 길이야 멀리 돌아서 가도 된다. 세상은 여전히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책을 권한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냉혹하기도 하지만 다행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으면 좋겠다. 오늘 저녁 다시 호어스트 에버스의 책을 읽고 나서 내일은, 어 망친 엄나무순 장아찌를 다시 시도해봐야겠다.



<책 정보>

제목 :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지은이 : 호어스트 에버스 Horst Evers, 독일

옮긴이 : 김혜은

펴낸곳 : 작가정신

초판 1쇄 발행일 : 2008년 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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