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에서 표지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
지금은 대낮이고 밖은 5월을 뽐내며 화창한데 집 안은 춥고 어둡고 마음엔 바람이 불었다. 모든 골치 아픈 일을 뒤로하고 잠 속으로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자고 일어났을 때의 무기력함이 더 싫어서 책을 집어 들었다. 이틀 전 도서관에서 빌려온 두 권의 책. 하나는 김연수 씨의 소설 [스무 살]이고, 다른 하나는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이었다.
그중 표지 색 때문에 먼저 [스무 살]을 펼쳐 들었다. 김연수 씨는 [소설가의 일]을 처음 읽고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며 좋아하게 된 작가다. ‘김연수’라고 검색을 하면 소설가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나는 그의 소설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채로 그의 팬이 된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대충 이런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수필은 이렇게 맘에 들지만 소설을 읽어보니 막상 별로 맘에 들지 않게 되면 어쩌나 하는, 그런 소심한 마음. 그의 소설이 내 맘에 들든 아니든 그는 여전히 소설가일 테고 동시에 그는 여전히 수필도 계속 쓰지 않겠는가. 소설이 맘에 들지 않고 수필이 맘에 든다면 앞으로는 계속 그의 수필만 찾아 읽던가, 아니면 책 한 권으로 작가를 모두 판단할 수는 없으니 다른 소설을 찾아보면 될 일이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아서 지금까지 그의 소설책이 도서관에 꽂혀 있어도 일부러 못 본 척 지나가곤 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외면해오던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오늘에서야 읽게 되었다. 이제 와서 책을 골라 든 이유의 절반 이상은 표지의 색깔 때문이었다. 소설을 한 권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도서관 800번대 서가를 둘러보는데,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이 표지의 색이 눈에 딱 들어왔다. 이런 매력적인 색의 책이라면 5월에 읽어야 할 것 같았고 마침내 눈 앞에 등장한 김연수 작가의 소설이니, 더 미루지 말고 읽어보자 하고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남은 서가를 한번 더 둘러보는데 같은 색으로 글자가 새겨진 책이 한 권 또 눈에 들어왔다. 그건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무슨 무슨 문학상 수상작품집이었다. 어쩐지 그런 수상작이라면 좀 어려울 것 같고, 좀 지루할 것도 같고, 나 같은 범인의 눈으로 보면 ‘이게 뭐야,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야.’ 싶은 마음이 대번에 들 것 같았기 때문에 그동안은 서가에 꽂혀 있어도 나에게는 없는 책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엔 민트색 글자에 꽂혀 고민 없이, 마치 그 책을 찾고 있었다는 듯이 서둘러 뽑아 들고 무인대출기 앞에 섰던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이유로 두 권의 책이 내 책상에 놓이게 되었고 기분이 아주 좋지 않은 토요일 오후, 나는 이 책을 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책 속으로 숨기 위해서, 현실도피용으로, 그리고 이 시간과 감정을 흘려보내기 위해서.
먼저 [스무 살]을 읽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어디선가 읽어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익숙했다. 그건 아마도 [소설가의 일]이나 [청춘의 문장들]을 통해 이미 작가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이상하리만큼 내용이 익숙했다. 분명 이건 소설일 텐데, 소설이라기보다는 멀찍이서만 바라보던 동경하는 선배의 회고담 같이 들렸다. MT를 마치고 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느 한적한 시골길 버스정류장에 아무렇게나 남겨진 후발대 몇 명이 앉아서 나이 많은 어느 선배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물론 이렇게 멋지게 자기 회고담을 늘어놓은 선배를 알았던 적은 없다. 더군다나 이렇게 멋진 구절로 회고담을 시작하는 선배는 본 적도, 된 적도 없다.
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스무 살은 곧 지나간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우리를 세월 속으로 밀어 넣고 저희들끼리만 저만치 등 뒤에 남는 것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 기억 속에 마르는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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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은 작가의 실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선가 작자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여튼 이렇게 소설은 길지 않은 짤막한 분량으로 진행되고 끝이 나지만 그 안에는 스무 살에 기억이 촘촘히 박혀있다. 음, 생각해보니 사건이 그렇게 촘촘하지는 않다. 그럴싸한 사건이 많은 것도 아니고 커다란 위기나 극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야기 자체는 성글지만 그 당시의 감정이 촘촘하다. 스무 살을 지나 본 사람은 알 수 있다. 누구라도 자기의 스무 살을 그렇게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도 그 시절의 기억은 가득한 것 같으면서도 휑하고, 바빴던 것 같은데 남은 건 별로 없다. 아, 누구나 그럴 것이라는 섣부른 추측의 말은 취소하는 게 좋겠다. 다만 이 작가에게 그랬던 것 같고 그리고 나에게도 그랬다. 섣부른 추측은 접어두어야 한다. 오늘 나의 하루를 망쳐놓은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두 번째 소설은 [마지막 롤러코스터]이다. 아, 내가 이 책이 단편소설 모음집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은 김연수 작가의 소설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두 번째 소설까지 읽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참이다.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작가가 지어낸 소설 속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의 회고담을 듣는 것과 지어낸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마음가짐이 좀 다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내가 이 책을 펼쳐 든 것은 현실을 도피하고 시간을 보내기 위한 이유였으니 지금 같은 마음으로 읽는 이야기는 거짓말이면 거짓말일수록 더 좋다. 이 소설 안에서는 죽는 사람이 나온다. 이건 스포일러는 아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아도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까지도 대략 알 수 있다. 다만 이 죽음과 그 과정 사이에 벌어지는, 그리고 계속해서 등장하는 ‘스피드와 텐션’이라는 단어들 사이에서 등장하는 물음들, 마지막으로 레일 위를 달리는 롤러코스터 자체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더 맞닿아 있을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가장 공감이 되지 않았던 부류의 사람들은 ‘승룡회’라고 하는 롤러코스터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동아리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롤러코스터를 싫어한다. 놀이동산에 가는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거니와 거기다가 롤러코스터를 타야 한다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가지 않는 편이다. 억지로 분위기에 맞춰 몇 번 타 본 롤러코스터는 내 인생에 있어 지워버리고 싶은 몇 안 되는 기억 중 하나다. 그런데 롤러코스터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동아리라니. 물론 스릴을 즐기고 롤러코스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당연히 나도 알고 있고 개개인의 취향은 얼마든지 존중한다. 다만 이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연구하는 것인가, 도대체 왜 롤러코스터를 위해 모이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도저히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이 소설은 공상과학소설로 분류될 것 같다. 실재하지 않는, 혹은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지만 상상은 해 보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 공상과학소설 속 아닌가. 롤러코스터 동호회라는 것은 내 인생에 있어 외계인이나 우주정복 같은 일과 거의 동급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 부분만 빼면, 혹은 이 소설을 공상과학소설로 분류하고 읽으면, 책은 충분히 재미있다. 짧은 분량에 비해 흥미로운 등장인물들이 여럿 등장하고 이야기는 공상과학 소설답게 의문을 던져준다. 오늘의 감정상태 때문에 내 말투가 약간 비꼬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아니다. 나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드디어 읽어본 소감은 ‘앞으로도 계속 이 작가의 소설을 읽고 싶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려하던 실망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더 기분이 좋았을 때 읽었다면 좀 더 재미있고 생기 넘치는 리뷰를 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스무 살]은 여기까지 읽고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는데 여기서 나는 이름도 멋진 한강씨를 만나게 된다. 다음 리뷰에서는 한강의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을 소개하고 싶다. 더 기분 좋을 때, 모든 복잡한 상황이 해결되고 난 후에 말이다. 사실 그리 복잡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뭐든지 일이 닥쳐 있을 때는 거기에만 빠져 있게 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주의를 환기시키고 나 자신을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꺼내 주기 위해서 책을 집어 드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쁜 감정들은 가라앉히고 흥분한 자기 자신을 다독이며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오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다른 상황이 보이기도 하고, 그게 아니어도 최소한 나 자신에게 쉴 틈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써야 할 리뷰는 쌓여 가는데 비루한 글 솜씨와 느긋한(게으른) 성격 탓에 어째 진도가 잘 나가지를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