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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Jun 04. 2016

행복해지는 소설을 검색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히가시노 게이고

그 날은 영화 [곡성]을 본 날이었다.

나는 평소 무서운 영화는 절대 보지 않으며 특히나 영화관에서 보는 일이라면 절대 피하는 사람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살인의 추억]의 장르가 '범죄'인 것은 괜찮지만 '미스터리'인 것이 마음에 걸려 개봉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보지 못하다가 재작년인가 작년인가 TV에서 무료로 나오길래 큰 맘먹고 본 여자다. 그러니 이런 나에게 [곡성]은 관람 계획 같은 것은 전혀 없었을뿐더러, 실수로라도 절대 보지 말아야 할 영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말았다. 어차피 보지 않을 영화라고 생각해 마음을 푹 놓고 수많은 스포일러가 담긴 리뷰를 읽어왔더랬다.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였기 때문에 리뷰는 엄청 많았고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던 만큼 흥미로웠다. 영화는 보지 않을 것이었지만 리뷰는 즐기며 읽을 수 있는 것이니 나는 그 수많은 리뷰들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찾아보며 마치 영화를 한 번쯤 본 사람처럼 [곡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호기심이 일게 하는 여러 가지 장치와 상징이 있다는 것, 배우들의 연기 또한 흠잡을 데 없다는 것에 (보지도 않고) 감탄하며, '비록 나는 보지 않을 것이지만' 잘 만든(여러 가지 다른 의미에서) 영화가 하나 또 나왔나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어느 비 내리는 목요일, 집에서 혼자 앉아한 리뷰를 읽다가 무엇에 홀렸는지 차를 몰고 읍내로 나가게 되었다. 3시에 시작하는 [곡성] 표를 끊어 놓고 '내가 왜 이 영화를 보기로 했던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며 덜덜 떨고 앉아 있는데 평일 낮, 지방 소도시의 작은 영화관에는 관객이 없었다. 내가 영화 시작 10분 전에 표를 샀는데 그때까지 이 영화를 보겠다고 표를 구매한 사람이 나 혼자밖에 없다는 사실에 나는 더욱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이 영화를 내가 혼자 보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어쩌나, 그냥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을 하며.

다행히 영화 시작 직전에 한 두 명씩 사람들이 들어와 [곡성]을 영화관에서 혼자 보게 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눈치를 보니, 내심 다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뒤늦게 들어온 한 사람 한 사람이 동지로 보였다.




책 이야기는 하지 않고 왜 [곡성]인가 싶겠지만, 내가 이 책을 골라 읽게 된 데는 이 영화를 본 날이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자세히 알 수는 없을 정도로 스포일러 된 영화를 보았는데도 몸은 2시간이 넘게 경직되어 있었고 에어컨 바람 때문에 손발이 다 차가웠다. 수많은 리뷰를 다 읽고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공포에 휩싸이지 않은 채로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은 다행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잔상들이 계속 머리와 눈에 남아 비가 갠 쨍쨍한 하늘 아래를 걷고 있어도 어깨가 쫙 펴지지를 않았다. 이대로 집에, 그것도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영화관을 나와 도서관 앞에 있는 나무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열어 검색을 했다.

"행복해지는 소설"


그랬더니 [빨강머리 앤], [플란더즈의 개],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같은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처음 보는 제목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그리고는 더는 찾아보지도 않았다. 이런 제목을 가진 책이 어두운 이야기 일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 순간 오늘은 이 책으로 정한 것이다. 마음으로 '오늘은 이 책'이라고 정하고 나서, 나는 제목을 보고 책에 대해 상상을 해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책은 그리 두껍지 않을 것 같았다. 삽화가 간간이 들어가 있을 것 같았고 그것은 아마도 잡화점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 하지만 오래도록 팔리지 않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고양이 인형이나 다기세트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내 상상에 의하면 이 책은 다정한 말투로 진행되고 '기적'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간 것을 보니 꼬였던 사건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감동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행복한 소설일 것 같았다. 작가의 이름을 보니 일본 소설인 것 같았는데 최근에는 일본 소설을 읽은 적이 없으니 더욱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렇게 제목을 보고 먼저 그 책에 대해 상상해보는 일을 자주 한다. 그러면 책에 대한 기대감이 더 높아지고 이 상상이 맞든 틀리든 내 상상을 확인하는 일 자체로 책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서 참 좋다. 물론 내 상상이 틀리는 경우가 더 많지만 어쩌면 '내 이럴 줄 알았지.' 하게 되는 결론보다는 '예상을 빗나가다니, 더욱 흥미진진하군.'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 책과 훨씬 사랑에 빠지기 쉬워진다.

   

도서관에 들어가 이 제목을 검색하니 도서관에서는 2권 소장하고 있었는데, 한 권은 대여중이었고 한 권이 남아 있어 재빨리 일어나 청구기호를 적은 쪽지를 들고 보물 찾기를 시작했다. 이 책을 대여중인 한 사람도 혹시 나처럼 [곡성]을 본 뒤에 이 책을 빌린 것을 아닐까 상상하며.

청구기호를 따라 책을 찾아가니 이번에도 역시 나의 상상과는 많이 다른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옆에 붙어 있는 셀로판 테이프가 이 책을 더 멋스럽게 보이게 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책은 450 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이었다. 하드커버에 삽화는 단 한 개도 실려 있지 않았고 다정한 말투는커녕, 어설픈 도둑놈 3명이 등장하여 티격태격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라니. 이런 거 너무 좋아한다.




책을 조수석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좀 전에 보았던 [곡성]의 무서운 장면보다는 주차장에서 차에 시동을 걸어놓고 앉아 잠깐 읽은 몇 페이지의 장면이 계속 생각났다. 3명의 도둑이 집을 털고 도망을 가는데 타고 있던 고물차가 시동이 꺼져버린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도둑 3명은 그곳을 어찌어찌 빠져나와 어느 폐가에 숨어들게 되는데 날이 샐 때까지 이 집에 숨어 있다가 대중교통이 운행하고 사람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인파 속으로 숨을 계획인 것이다. 숨어 들어가게 된 폐가가 바로 제목에 등장하는 '나미야 잡화점'인데 도둑들이 숨어 있는 야심한 밤에 어느 익명의 여자로부터 상담편지를 받게 된다. 그 편지는 잡화점 셔터를 통해 누군가가 떨어뜨려놓고 간 것인데 이 도둑들은 자기들에게 온 편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여자의 고민을 함께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하고 자기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면서 편지를 주고받는다. 하루 밤 사이에 말이다. 이 고민상담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모든 고민자와 상담자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모두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하나씩 밝혀지게 된다.


집에 도착해 저녁을 간단히 먹고 앉아서 나는 일본 어느 소도시의 잡화점으로 돌아갔다.


잡화점의 주인은 원래 나미야 할아버지다. 이 할아버지가 시작한 고민상담 이야기, 상담을 의뢰한 사람들의 사연, 인생 막장에 도둑질을 하고 야밤에 이 잡화점에 숨어 들어오게 된 도둑들 이야기까지 모든 이야기가 서로 얽히고설켜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데 서로 연결되어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도 재미있고 각자의 사연 이야기도 흥미롭다. 결국 모든 이야기들은 각자의 해결점을 찾게 된다. 하나같이 가볍지 않은 사연들이지만, 그 상황들을 무겁고 어둡게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활기차고 어딘가 가볍게 풀어내고 있다. 꼭 어렸을 때 많이 봤던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분위기이다. 내가 좋아하던 애니 중에 [하레와 구우]라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의 상황과 심리상태가 어떠했든지 간에 대체적인 분위기는 언제나 활기차고 파이팅 넘치며, 병맛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애니메이션이었다. 물론 그 정도까지의 느낌은 아니지만 이 책의 분위기도 어찌 되었든 모든 사건은 해결되고 모든 상담은 의미 있게 마무리된다. 그것을 상담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일의 결국이 행복하든 아니든, 모든 일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고 우리는 모든 일에 최선과 진심을 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어디선가 자주 본듯한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 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을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상담 편지에 답장을 쓰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멋진 난문(難問) 보내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미야 잡화점 드림.
p. 447



450페이지가 넘는 책이었지만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쓴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는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한다. 본격 추리소설부터 미스터리, 서스펜스, 판타지 소설을 많이 쓴 작가답게 이 책도 추리소설 같은 느낌이 돌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다. 물론 우연이 필연이 되는 상황이 난무하고 어떻게 모든 등장인물이 이렇게 다 이어져 있을 수가 있는가 하는 점에서 비현실적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허무맹랑하게 읽히지 않고 일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이 들지 않는, 어쩌면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시공간을 넘어서 나의 고민을 상담해 줄 잡화점이 있다면, 우체통 구멍에 편지를 넣어 놓으면 뒷문 우유배달 박스에서 답장을 받을 수 있는 낭만적인 곳이 있다면 나도 한 번쯤 이런저런 고민들을 털어놓고 답장을 기다려보고 싶다.


[곡성] 때문에 재미있는 책을 한 권 알게 된 것 같아 참 고맙다. 어떤 책을, 어떤 작가를 만나는 일은 때로는 참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마치 길을 잃어 헤매다가 들어간 골목길에서 발견한 예쁘고 작은 공원이나 기가 막히게 향이 좋은 커피집 같이.


한 권의 책을 만나기 위해, 믿을만한 친구의 추천이나 명사의 독서목록을 훑어볼 수도 있다. 베스트셀러를 읽거나 서점가를 서성이다가 만나는 책들도 많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행복해지는 소설'을 검색해 보자. 그러면 평소라면 쉽게 읽지 않았을 '이건 내 취향이 아닌데' 하는 책들도 접하게 된다. '그리운 마음을 알아주는 시집'이나 '어제 만난 그 사람 같은 수필'도 좋겠다. 무엇을 만날지는 알 수 없다. 실망하게 될 수도, 두 눈이 반짝이게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우릴 설레게 하는 바로 그 점도 '무엇을 만날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읽어야 할 수많은 책의 목록이 있지만 가끔은 이렇게 헤매다 만나는 책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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