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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Jul 12. 2016

공부의 시대

치열한 삶이 우리 모두의 교과서가 아닐까.

산골로 들어와 살면서, 공부에 대한 갈증이 더 커지고 있다. 무슨 엄청난 공부가 아니더라도, 소규모의 책모임이나 여러 종류의 전시회, 각종 인문학 강의들을 다양하고 손쉽게 접할 수 있었던 도시 생활과는 달리 산골은, 그저 고요하다.


며칠 전 페이스북 스크롤을 내리다가 [공부의 시대]라는 제목을 보고 얼른 멈췄다. 창비에서 출간하는 새 책인 모양인데 제목이 일단 시선을 잡아끈다. 배고플 때는 블로그에 올려진 레시피가 원래 하려던 일을 멈추게 하듯이.


'공부한당'을 모집한단다. 소책자를 보내주고 이 시대의 공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며, 함께 공부를 시작하자는 선동이 꽤 그럴싸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신청하는데 당첨이 될까 싶었지만, 당첨되었다. 소책자가 도착하고 나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보았으나 잘 알지 못했던 다섯 명의 저자가 각자의 공부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실제 책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인터뷰 형식으로 소책자는 진행된다. 물론 소책자라 많은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지만, 실제 책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길을 살짝 보여준다.


비록 아주 얇은 소책자지만, 어쨌든 당첨되어 우편으로 받으니 기분이 참 좋다.


첫 번째 저자는 강만길 교수다. 한국 근현대사 교수이며 여러 권의 역사책의 저자이신 분이다. 학창 시절 역사를 꽤 좋아했던 터라 역사에 대해, 역사 공부에 대해 무슨 말을 해 줄 것인지 궁금했다.


재작년인가, 한국사 능력시험을 준비해볼까 하고 교재를 구입한 적이 있었다. 한국사 능력시험의 점수를 받아 어디 제출할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역사는 내 죽어가는 호기심에 심폐소생술을 해 주는 인문학 분야였다. 역사는 이야기, 반복되며 변주하는 이야기라서 단순히 옛날에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오늘도 일어날 수 있는 일, 실제로 오늘 내가 사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해석해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호기심은 얼마 가지 못했고 나는 중간에 흐지부지 교재를 덮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교재는 어딘가 계속 뒷목을 잡아끄는 힘이 있어 지금도 책상 한편에서 종종 내 이름을 부른다.


소책자의 첫 번째 질문은 이제 막 역사공부를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의 답은 이렇다.


평생 역사 공부와 교육을 생활 수단으로 삼아 오면서 전공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해본 일이 없다고 확언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는가 하면 물론 역사 공부가 좋아서였겠지만, 시작할 때 평생 이 공부를 하고 살겠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 길만이 나의 길이다 하는 확고한 마음가짐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의 평생이란 길고도 험한 길입니다. 그럴수록 꼭 이 길을 걷고 싶다, 이 길만이 내 길이다 하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아, 이런. 그동안 내가 역사 공부 교재를 자꾸 폈다 접었다 하는 이유가 딱 나와있다. 역사공부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있었으나 확고한 마음가짐은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 정도로는 공부를 계속할 수 없다. 비단 공부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확고한 마음가짐의 문제에 걸려 흐지부지 사라졌던 다짐들이 어디 한 두개였겠는가.


노 교수의 이런 확언을 들으며 무언가에 확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이 길만이 내 길이다 하고 정진하는 인생은 얼마나 멋진가 생각했다. 물론 내가 지금 역사공부를 하는 목적이 역사학자가 되어 강만길 교수의 뒤를 따르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생 공부하는 사람으로 살자는 젊은 날의 다짐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강 교수님의 이 한마디는 책의 첫머리에서 생칡즙 같은 쓴 맛으로 나를 확 깨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물은 김영란 교수이다. '김영란법'에서의 김영란이 이 사람이라는 것을 저자 소개를 통해 알게 되어 더욱 흥미로웠다. 이 분은 책을 정말 많이 읽으시는 분 같았다. 두 가지의 질문이 모두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자기에게 맞는 책을 찾는 방법, 두 번째 질문은 책을 많이 읽기 위한 비법이었다. 김영란 교수의 답은 이렇다.


왕도는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계속 읽다 보면 자신에게 맞는 책을 찾아내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요컨대 많이 읽기 위한 비법은 없는 듯합니다. 다만 잘 읽기 위한 비법은 '천천히 읽기'라는 것이지요.


질문은 두 가지이지만 답은 하나로 모아진다. 왕도는 없다는 것. 책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넘쳐나는 요즘, 결국 책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정해진 방법은 없다는 것. 너나 할 것 없이 전 국민이 입시를 위한 공부에만 매달려오다 보니 우리는 다른 모든 분야에서조차 지름길과 요약집을 찾는다. 이대로만 하면 몇 점을 보장한다는 장삿속 가득한 족집게 강사들에게는 사람들이 몰리지만, 사실 공부에 왕도는 없다는 게 어느 시대에나 동일한 진리가 아닐까. 김영란 편을 읽으면서는 하수의 질문에서 고수의 답을 얻은 느낌이었다.



이후에 이어지는 작가와 질문은 다음과 같다.

유시민 작가에게 '민주시민으로서 가장 우선해야 할 공부는 무엇인가'와 '공부한 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쉬운 길을 택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럴 때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를 질문하고


정혜신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에게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진짜 공부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와 '전문가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차원의 노력이나 장치가 필요하지 않은가'를 질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중권 교수에게 '인식론적 전회, 언어학적 전회에 이어 21세기 들어 미디어적 전회가 일어났다고 말했는데, 미디어적 전회 이후에도 또 다른 전회가 있을 것인가.'와 '언젠가 기계가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갖게 된다면, 그때는 결국 인문학의 본질이 해체되는 것은 아닌가'를 묻는다.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현장에서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말씀에 크게 공감하지만, 누구나 현장을 직접 경험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도고 진짜 공부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정혜신 전문의의 대답이었다.


제가 말하는 현장은 '삶'이나 '일상'의 다른 표현이에요. 우리는 모두 삶을 살고 있잖아요. 하루하루 일상 속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부딪치고 있잖아요. 그게 현장이지 현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삶과 일상에 깊숙이 발을 딛고 살며 느끼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사람과 사람 마음에 대한 진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부터 진짜 공부가 시작된다고 느껴요.


'누구나 현장을 직접 경험하기는 어렵다'는 질문자의 전제가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모두에게 주어진 일상과 삶을 통해 진짜 공부가 시작된다는 그녀의 대답은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공부에 대한 생각과 닿아 있어 반가웠다.


평생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일상이 공부의 주제가 되고 삶이 학교가 되어야 한다. 머리가 터질 듯이 책을 파고드는 공부만큼이나 마음이 무너지기도 하고 눈물이 쏟아져내리는 치열한 삶이 우리 모두의 교과서이지 않을까. 과연 공부라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짧은 소책자를 읽어 내려가면서 얻을 수 있었던 나의 대답이 저자의 답과 만나 확신에 이르는 순간이었다.




소책자를 읽으면서 본 책의 내용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책에 담겨 있는 내용만큼이나 책에 담겨 있지 않지만 책을 읽는 동안 스스로 하게 될 많은 질문들도 궁금해졌다. 공부에 다시 불을 댕기는 책을 만나 기쁘다. 잠시 주춤했던 나만의 공부에 다시 열심을 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강만길, 김영란, 유시민, 정혜신, 진중권의 [공부의 시대]. 공부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공부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해보고 싶은 사람들 모두에게 유익한 책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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