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부터 프랑스어를 공부한다. 이 프랑스 남자 때문에.
로맹 가리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자기 앞의 생]을 통해서였다. 이 작가에 대해 나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지인을 통해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선물 받아 읽었다. 길지 않은 이 한 권의 책을 읽고 한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장소는 지하철 2호선, 집으로 가는 길에서였다. 합정역에서 당산역으로 가는 그 한강 다리 위에서 나는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던 것이다. 노을이 지고 있었고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검은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당산역에서 내린 나는, 곧바로 9호선을 갈아타는 계단으로 가지 못하고 2호선 당산역사의 벤치에 앉아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한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이 소설을 썼고 그래서 그는 두 번이나 콩쿠르상을 받은 유일한 작가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많은 비평가들이 로맹 가리는 이제 한물간 작가이며 그 재능이 바닥이 났다고 평할 때,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새로 등단한 것이다. 나중에 그가 죽고 난 후에야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 인물인 것이 밝혀졌다. 그런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살 수 있다니. 한 작가에게 한 번밖에 주지 않는 콩쿠르상을 두 번이나 받으면서, 많은 사람이 극찬하는 작품을 써내고서도 그걸 쓴 사람이 바로 나라고 말하지 않는 동안 그는 어떤 두근거림으로 삶을 살았을까. 나는 어쩌면 이 비밀이 그를 죽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 보았다.
나는 콩쿠르상이 무슨 상인지도 몰랐고(사실은 지금도 잘 모르고) 로맹 가리의 다른 작품들도 아직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좋아하는 외국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빼놓지 않고 그의 이름을 말한다. 때로는 로맹 가리로, 때로는 에밀 아자르로. 며칠 전 도서관의 소설 코너를 지나면서 여러 작가들의 이름과 책 제목을 읽으면서 훑어보다가 오랜만에 다시 그 이름을 발견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주홍색 하드커버의 단편 모음집. 오늘 내가 읽은 [마지막 숨결]이다.
프랑스 영화나 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 뭐랄까, 다른 사람도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어딘가 좀 우울한 그런 느낌. 간유리를 하나 끼워 놓고 찍은 사진 같은, 안개 낀 흐린 날의 세느강변을 혼자 걷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그 소설을 혹은 영화를 접하고 있는 장소가 어디든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나는 언제나 화창하지 않은 어느 뿌연 길을 혼자 걷고 있는 이방인이 된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왜 여기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아직은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그런 이방인이.
이 책의 서문을 쓴 작가, 에릭 뇌오프는 책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영롱하게 빛나는 온갖 잡동사니로 작가 자신의 자화상을 무질서하게 구축하고 있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언어인 가리어로 글을 쓴다. 그 언어는 프랑스어와 지독하게 닮아 있지만 낯설고 특이하다. 그는 또한 영어로도 글을 썼다. 하지만 영어 텍스트들은 항상 최종적으로 프랑스어로 다시 번역되었다. 거칠면서도 부드럽고, 목소리가 잠긴 것 같으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동시에 너무도 독특해서 도저히 뭐라고 분류할 수 없는 프랑스어.
프랑스어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이 서문을 읽으면서 나는 그게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웠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여행을 갔을 때 겨우, 봉쥬르(bonjour)와 메흐시(merci), 익스큐제 모아(excuse moi)를 더듬거렸던 기억이 전부인 나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일 테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만 궁금해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프랑스어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는 둘째치고 프랑스어로 소설을 읽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표제작인 [마지막 숨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는 오든의 시집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 시인에게 바쳤던 모든 찬사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그의 작품을 읽는다는 건 아무래도 너무 지나친 오마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맡 탁자에는 모텔에서 비치해놓은 성경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손에 성경책을 들고 죽는다는 것도 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랬다가는 파리에 있는 내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 나는 푸슈킨을 좋아해서 그의 책을 항상 갖고 다녔다. 그 책을 꺼내려고 트렁크를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 같은 인간이 죽기 바로 직전에 가장 어울리는 책은 전화번호부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결국 나는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 찾아내려 애쓰고 그 누군가에게 희망을 걸면서 평생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전화번호부를 손에 든 채 죽어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p.84
책의 주인공은 4시에 자기 모텔방으로 찾아올 살인청부업자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믿을만한 사람에게 추천을 받아 직접 계약을 한 그 사람을 말이다. 그냥 권총으로 자살을 할 수도 있을 텐데 굳이 어렵게 사람을 수소문하고 장소를 고르고 골라 죽을 계획을 하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자기를 죽일 사람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8분의 시간 동안 마지막으로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한다. 그 8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마지막 몇 분의 여유시간이 남는다면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할까. 나는 자살 같은 건 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만약, 내가 언제 죽게 될지 알고 있고 그 시간이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면 말이다. 어쩌면 나도 이 사람처럼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마지막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거나.
수록된 것들 중에 가장 좋았던 단편은 [마지막 숨결]이었지만 가장 좋았던 문장은 [그리스 사람] 중의 한 대목이다.
어느 날 어떤 멍청이가 그에게 "어이 애송이, 자넨 도대체 뭘 해서 먹고사나?"라고 물어오면, 그는 이제 더 이상 꾸물거리지 말고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뭘 해서 먹고사냐니? 그건 정말 어이없는 질문이다. 당신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그건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삶 자체를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 만약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 질문은 삶을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낸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또 다른 공물을 지불해야 한다는 듯이.
p.161
로맹 가리는 자살 했다. 이 단편을 쓴 것은 1967년에서 1974년 사이일 것으로 여겨지는데, 1980년 12월에 그는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 몇 년 사이에 그에게 있어서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혹시 그는 죽기 직전에 자기가 쓴 이 대목이 생각이 나서 잠시 머뭇거리지는 않았을까.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하지 않냐고 써 놓은 이 대목이 생각나서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지금이라도 다시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자기 앞의 생]을 읽을 때도 그랬고 지금 [마지막 숨결]을 읽을 때도 그랬으니 앞으로 로맹 가리의 글을 읽을 때마다 혹은 다른 맘에 드는 프랑스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는 기분이 혹은 읽는 기분이 어떨지가 계속 못 견디게 궁금해질 것 같아서 말이다.
아직 내가 읽어야 할 그의 글은 많이 남아 있다. 일단은 한국어로 읽게 되겠지만 언젠가 그가 써 놓은 원문 그대로, 알 수 없는 점이 찍혀 있기도 한 그 프랑스어로 [자기 앞의 생]을, 이 [마지막 숨결]을 읽을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말 나온 김에 오늘은 서점에 들러서 '기초 프랑스어 1'과 비슷한 제목의 책을 한 권 사야겠다. 고등학교 때 보던 프랑스어 교과서는 한 권도 남아있지 않으니 말이다. 혼자서 얼마나 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 생각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첫걸음으로 '기초 프랑스어 1'만큼 적절한 건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