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우개연필 Oct 14. 2017

다음 날의 김찌찌개

살다보면 알게 되는 다음 날의 김치찌개같은 일들

내 김치냉장고에는 언제나 묵은지가 있다. 남편은 김치를 잘 먹지 않고 어머님은 철마다 김치를 보내오시니 내 김치냉장고는 언제나 다 먹지 못하고 남아 있는 김치들이 차례로 묵은지가 되어간다. 생김치를 잘라서 상에 놓으면 잘 먹지 않던 남편도 잘 먹는 김치 종류가 있으니 바로 요리된 김치이다. 김치전이나 김치찌개, 김치찜, 김치볶음이 되어 있는 김치는 남편도 제법 잘 먹고 나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담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생으로 먹으면 맛있는 김치보다 묵은지에 더 애착이 간다. 


지난 목요일 저녁에는 김치찌개를 끓였다. 묵은지를 한 조각 꺼내어 작게 썰고 들기름에 설탕 반 스푼, 다진 마늘과 함께 들들 볶다가 물을 넉넉히 붓는다.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기름을 제거한 참치를 넣고 파를 너무 많다 싶을 만큼 작게 썰어서 넣고 푹푹 끓인다. 한동안 끓어 국물이 졸아들기 시작하는 것 같을 때 불을 줄이고 뚜껑을 덮고 나서 그리고도 한참을 더 끓인다. 그리고 김치가 아주 숨이 죽고 참치는 국물에 다 녹아버리고 파와 마늘은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모를 만큼 끓고 나면 간을 본다. 소금도 간장도 새우젓도 그 무엇도 넣지 않아도 이쯤 되면 간이 맞다. 김치의 간과 참치의 간이 어우러져 가끔은 짭짤하게 느껴지기도 할 정도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끓인 김치찌개는 맛이 없으래야 없을 수가 없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혹시 막 끓인 김치찌개가 맛이 없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실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김치찌개의 맛은 다음날 정확하게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전날 끓인 김치찌개를 데워서 먹으면 전날에 없던 깊은 맛이 어느 순간 살아난다. 다음날 먹어서 맛이 없는 김치찌개는 내 평생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이것은 김치찜도 그렇다. 다음 날이 되어야 알 수 있는 깊은 맛이 있기 때문에 나는 늘 한 끼 먹을 만큼이 아니라 서너 번을 먹고도 남을 만큼의 넉넉한 양을 만든다. 다음 날이 되어 먹을 것을 고려해서 말이다.


살다 보면 김치찌개 같은 일들이 참 많다. 그 당시에는 이게 뭔가 싶다가도 그 일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 의미가 확실해지고 감사가 나오는 그런 일들 말이다. 어쩌면 거의 모든 일이 그런지도 모른다. 오늘 일어나는 혹은 잠시 뒤에 일어날 일의 의미를 모두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나고 보니 그 일이 나를 자라게 했고, 철들게 했고,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일이었음을 고백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러니 어떤 일이라고 해도 너무 섣불리 이름표를 붙이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나를 힘 빠지게 한 경험이 내일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오늘 나를 울게 한 이 일이 언젠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게 하는 경험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직까지 별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평온한 토요일 아침, 나는 아침 식사로 목요일 저녁에 끓였던 김치찌개를 바닥까지 박박 긁어먹으면서 지금의 평화를 누린다. 아주 잠깐의 평화다. 점심은 또 뭘 먹나 하는 모든 주부의 평생의 고민에 빠지기 직전까지의 작은 평화. 


- 어느 가을, 토요일 아침의 작은 평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