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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우개연필 Dec 25. 2017

이천 년 전 한 산모에게 감정 이입하는 성탄절 저녁

산모가 되고 보니 비로소 실감 나는 것들

어제 문득 마리아의 입장에서 복음서의 첫 부분을 생각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 연극에서 종종 등장하는, 긴치마를 입고 배가 불룩하며 얌전하게 이야기하는 그 마리아 말이다. 마리아의 성격이 어땠을지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생각나는 곳이 없다. 마리아의 단독샷이라면 천사의 수태고지에 순종하는 모습인데, 이건 평소 왈가닥인지 얌전한지와 상관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토록 중요한 순간에 망설임 없는 결단과 순종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그리는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성격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당차고 결단력 있는 여성에 더 가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쨌든 평소 성격이 어떻든 간에 그 날의 마리아는 연약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그 날에는 말이다. 그녀는 갈 수밖에 없었던 여행의 끝자락에 겨우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한밤중이었고 엄청 피곤했을 것이다. 어쩌면 요셉이 걱정할까 봐 미리 이야기는 하지 않았더라도 하루 이틀 전부터 가진통이 있었을지 모른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양수도 터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방을 구해서 어떻게든 마리아를 깨끗하고 편안한 곳에 누이고 싶어 했을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가고 간절했을까. 그리고 내 추측대로 평소 아무리 당차고 결단력 있는 마리아였다고 해도 그 날만큼은 당황했을 것이다.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고 익숙한 동네 아주머니들도 없는 여행지에서 당장 들어가 누운 곳도 없이 맞이한 진통의 밤이라니.  


성탄절 연극을 하면 여자 아이들 중에 가장 얌전하고 얼굴이 하얗고 목소리가 부드러우며 여성스러운 아이가 마리아를 맡곤 했다. 그리고는 허리에 손을 대고 배를 내밀고 등장해서는 진통 중임에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괜찮아요, 요셉. 좀 더 방을 찾아보기로 해요."라고 몇 마디의 대사를 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한 번도 마리아를 맡은 적이 없다. 나는 주로 목자 3이나 동방박사 2 혹은 마구간을 내주는 여관 주인 등을 맡았다. 그러고 보니 다 남자 역할이었다.  


그때는 마리아의 심정이 어땠을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나긋나긋하게 연기를 해서야 그 급박한 상황이 어떻게 전달이 되겠는가. 진통이 있고 애가 나오려고 하는 참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여자가 얼마나 있을까. 나는 요즘 들어서야 아주 조금, 그 날의 마리아와 요셉이 얼마나 간절하고 초조했을지 상상할 수 있다. 배가 조금씩 불러오고 있는 지금에서야 성경의 주요 장면 속의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 것이다. 마리아는 베들레헴까지 오는 동안, 어쩌면 가진통이 계속되고 있었을 그 시간 동안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을까. 도착할 때까지만 버텨달라고, 좁은 방이라도 좋으니 누울 곳을 찾게 해 달라고 얼마나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을까. 그리고 어쩌면 마음속에 작은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천사에게 수태고지를 받고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이니, 필요한 것들도 함께 준비되고 순조로울 것이라고 말이다. 나라면 그렇게 믿었을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여관에는 방이 없었다. 로마 황제의 명을 받고 고향으로 호적신고를 하러 돌아온 여행객들로 넘치는 베들레헴에는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 한 명이 누울 작은 방 하나가 없었다. 혹 어쩌면, 보아하니 진통도 오고 있는 것 같은 임산부를 자기 집에 들이고 싶지 않은 여관 주인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문간방 하나 정도는 있었지만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했는지도. 그렇게 마리아와 요셉은 사람이 묵는 곳이 아닌 말이 쉬는 곳에 짐을 풀고 아이를 낳았다. 연극 속에서 그 마구간은 고요하고 깔끔하며 잘 정돈되어 말구유 하나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곳이었지만 실제야 그랬겠는가. 사람이 가득 찼으니 마구간도 말로 가득 찼을 것이고 화장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분명 여러 가지, 그러니까 정말 여러 가지 냄새도 났을 것이다. 건초 같은 것을 겨우 펴서 누울 자리를 만들고 겉옷을 펴서 이불 삼아 깔았겠지. 그리고 그곳에서 마리아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어두컴컴하고 낯선 곳에서 첫 출산을 했을 마리아와 요셉의 심정이 어땠을까. 감사와 기쁨이 찾아오기 전에 아마 짙은 두려움과 초조함이 먼저 엄습했을 것이다. 잘못되는 것은 아닐지 왜 걱정이 되지 않았겠는가. 최신식 설비를 갖춘 병원의 환하고 깨끗한 병실에서 아이를 낳아도 무서운 법인데, 산파가 곁에 있었을지 없었을지도 모르는 그 밤 중에 경험 없는 초산모와 청년 요셉이 출산을 했다는 것은 정말 지금 생각하면 대단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장면이다. 그 당시에야 누구나 집에서 아이를 낳을 시절이니 주변에서 아이를 낳는 것을 본 경험이야 있었겠지만 본인의 일이 되고 나면 옆 사람의 경험이 다 소용없어지는 순간도 있는 법 아니던가. 초조함과 두려움이 기쁨과 감사로 변하기까지 이 초보 부부는 얼마나 또 간절하게 기도를 했을까 싶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까지 초라하게 이 땅에 오셔야만 했을까. 호화롭지 않더라도 경험 많은 산파와 작은 여관방 하나 정도는 마련하고 오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초조하고 두려웠을 마리아와 요셉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나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조금은 섭섭하기까지 했다. 앞으로 겪을 일도 만만치 않은데, 시작이라도 좀 수월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물론 지금 나는 그 이유를 전부 이해할 수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구석진 초라한 곳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구유는 어쩌면 작지 않은 의미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방 한 칸이 아쉬운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어쩌면 겉보기에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다 하더라고 마구간보다 더 추운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내가 네 마음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지도. 그리고 가끔 사는 게 초라해 보이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그런 순간에 서게 되는 나에게도, 그분의 말구유는 언제나 그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되어줄 것이다.  


지금 뱃속에서 이리저리 꼬물거리는 이 꼬맹이가 다음 성탄절에는 내 가슴팍에 매달려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오늘보다 조금 더 자라 있는 내가 되어 있기를.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것만큼이나 나도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기를, 두 손 모아 바라본다. 그래서 더욱 삶을 이해하고 나와 다른 이를 알아가는 폭이 넓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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