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삶글 13
나는 혼자 놀기의 달인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나 혼자 있을 때가 더 행복하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노래 부르고 혼자 산책을 하는 것이 행복하다. 앞으로는 함께 소통하고 함께 노는 방법도 연구를 하고 노력을 해야만 하겠다. 내가 이렇게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된 이유는 나의 건강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체력 때문일 것이다. 나는 선천성 심장병 환자로 태어나서 지금껏 병과 함께 살아야만 했기 때문에 건강한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걸을 수 없었다. 같이 걸으려고 노력하면 내 몸이 너무 힘이 들고 그렇다고 상대방에게, 나의 속도에 맞추어 함께 걷기를 원한다면 상대방이 너무 답답할 것이므로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나 혼자 따로 놀아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었다.
요즘에 나는 서귀포에서 3일 제주시에서 4일 그렇게 지내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앞으로는 서귀포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다. 나는 제주시 외도 월대에 보금자리가 있고 서귀포시 산방산과 월라봉 사이에도 둥지 하나가 있다. 오늘은 제주시 월대에서부터 산책을 한다. 월대천 징검다리를 건너면 내도와 이호테우해변으로 가는 길이고 징검다리를 건너지 않고 바로 가면 세계유일의 해수관음상이 있는 대원암 앞바다와 연대포구로 이어지는 산책길이 있다. 어제는 해수관음상을 보고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불을 생각하며 놀았으니 오늘은 내도 알작지와 이호테우해변으로 가서 놀아볼 생각이다.
연못이 있는 공원에서 큰 잉어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들면 자목련꽃과 백목련꽃이 환하게 웃는다. 자목련보다 백목련이 꽃잎을 먼저 날리기 시작한다. 월대천변의 능수버들 머릿결이 풍성해지면서 꽃을 피우고 있다. 벌써 꽃잎이 지고 있는 목련나무 아래서 할머니 세 분이 젊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월대에는 아직 달빛이 찾아오지 않아서 좀 쓸쓸해 보인다. 몸이 불편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팽나무 아래로 걸어오신다. 팽나무 가지들은 아직 잎을 내밀지는 못하고 있다. 장갑을 모두 벗어버린 팽나무의 손가락 끝까지 핏기가 돌기 시작한다. 나무의 실핏줄까지 환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징검다리를 건넌다. 어제는 바닷물이 징검다리 위에까지 차올라 거꾸로 오르는 것을 보았다. 오늘은 징검돌들이 속살까지 드러내고 몸을 말리고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중광스님 생가터가 나온다. 중광스님과 천상병 시인과 이외수 선생님을 생각하며 걸으면 곧 내도 알작지가 나온다. 제주도에는 해변에 몽돌이 많지 않은데 내도 알작지에는 아직도 몽돌들이 참 많다. 처음 이대흠 시인과 함께 왔을 때에 비하면 몽돌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둥근 몸을 굴리는 파도소리는 변함이 없다. 몽돌밭 초입에는 작은 돌탑들이 귀엽게 쌓여있다. 나도 작은 소망을 쌓아 올리며 잠시 머물다 간다. 내가 좋아하는 곳은 따로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나의 개구리바위를 정해놓고 거기에 앉아서 개구리와 함께 놀다가 간다. 내 눈에는 개구리처럼 보여서 나의 개구리라고 생각하고 친구처럼 잘 지낸다. 오늘은 바닷물이 많이 빠져서 개구리 피부가 말라가고 있다. 나의 개구리는 반쯤 물에 잠겨 있을때 가장 생기가 돌고 울음소리도 아름답다.
해안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내도 보리밭으로 돌아서 가야 했는데 요즘에는 해안도로로 쉽게 갈 수 있다. 몇 년 전에 해안도로가 뚫리면서 이곳 풍경도 많이 변하고 있다. 드넓은 보리밭에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머지않아 이곳도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세월에 발을 맞추어서 옷을 갈아입겠다는데 무작정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옛날의 것을 고집하고 싶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하여 나의 심장 판막을 뜯어내고 금속판막으로 갈아 끼워 겨우 살고 있는 형편이다. 나는 그렇게 나도 버리고 기계 인간으로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옛날처럼 불편을 감수하며 마냥 버티라고 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이호테우해변에 가면 꼭 오래 머무는 곳이 있다. 용천수가 모래밭에 그려놓은 추상화를 감상하는 곳이다. 나는 자연이 그려놓은 그림들이 참 좋다. 끊임없이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리는 그림들이 참으로 황홀하고 아름답다. 그런 아름다운 곳에서는 사람들의 발자국도 자연의 일부가 되며 그림 속의 일부가 된다. 특히 이호테우해변은 도심 안에 있는 해변이라서 사계절 내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자연 구경도 좋지만 사람 구경 또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길가에는 운동기구들도 많이 설치되어 있어서 운동도 하면서 쉬엄쉬엄 걸을 수 있다. 나는 거꾸리도 좋아하고 온몸근육풀기도 좋아하고 양팔줄당기기도 좋아하고 하늘걷기도 좋아하고 마라톤운동 기계도 좋아하고 자전거타기 기계도 좋아한다. 그중에서 하늘 걷기가 가장 좋다. 정말로 하늘을 걸어가는 느낌이 든다.
오늘은 특별히 문수물이 보이는 폐동이왓 팔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해수욕장과 말등대 사이에 있는데 이곳 전망이 참 좋다. 폐동이왓은 동네가 없어진 곳이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이곳에 마을이 있었는데 어느 날 모래가 덮쳐서 마을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제주도에는 잃어버린 마을이 많이 있다. 주로 제주사삼 당시에 불태워져서 없어진 마을이 많은데 이곳은 사람의 손길이 아니라 자연의 손길이 묻어버린 마을이다. 지금은 낮은 소나무 산이 되어있다. 아마도 바다에서 불어온 모래바람에 묻혔을 것이다. 아니,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모래에게 마을터를 양보하고 어디론가 떠났을 것이다. 지금도 모래의 영역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용천수가 나오는 문수물 숨구멍이 두 곳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높은 곳에 있었던 숨구멍 하나는 완전히 막혀서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머지 한 곳도 머지않아 막혀버릴 것만 같다. 그리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다. 어쩌면 바로 곁 바다를 매립해서 만든 이호랜드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호랜드 말등대를 보고 좋아하지만 내 눈에는 그 말 등대가 트로이목마로 보인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트로이목마 안에서 무엇이 쏟아져 나올지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이 문수물 앞에서 자신들의 삶을 연출하고 있다. 석양을 배경으로 단체로 뛰어오르기도 하고 연인인 듯한 두 남녀가 웨딩촬영을 하듯이, 지는 태양을 함께 다시 꺼내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멀리 보면서 휴대폰 메모장에 메모를 하기도 하고 오래전에 했던 메모를 다시 읽어보기도 하면서 나의 삶도 함께 연출해 보려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아, 개 한 마리가 사내의 목줄을 끌고 간다. 사내가 개의 목줄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개가 사내의 목줄을 끌고 가고 있다. 그렇게 목줄에 묶여 끌려가면서도 사내는 개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다.
얼마 전까지 문수물의 숨구멍은 두 개였었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 보니 숨구멍 하나가 없다
문수물 이름표도 모래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아, 어느 날 갑자기 모래가 덮쳐버린 마을이여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모래는 끊임없이 쌓인다
저 남은 숨구멍도 언제 막힐지 모르겠다
나도 이렇게 시간의 모래에 서서히 묻히리라
고양이들의 눈빛이 그 다리를 건넌다
https://youtu.be/pnC9nkRCfjk?si=kImDLJyGKAjqlwmq
https://youtu.be/s0cnpfPV9EI?si=mnjXHqV9PKstxZOn
https://youtu.be/Pq2yiLLYvEU?si=6cCg8FeMiAtHUF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