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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un 10. 2024

윤동주 시인과 함께

0000 ~ 0022

별과 함께 바람과 함께 시와 함께
윤동주 시인의 <꿈삶글>과 함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0000 프로필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꿈삶글>은 하나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 함께 길을 찾는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함께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0001 정리


나는 내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부터 나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내가 언제 죽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잘 떠나기 위하여,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나는 언제나 정리가 서툴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정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틈틈이 정리를 하려고 한다. 앞으로 잘 가기 위해서는 정리를 잘해야만 한다. 영정 사진을 찍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있다. 영정 사진을 찍는 마음으로 나의 삶과 나의 꿈과 나의 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0002 함양 방짜징


함양 방짜징 소리를 들은 다음부터 자꾸만 징소리가 들린다. 수천 번의 두드림으로 만든다는 방짜징, 그 땀나는 방짜징 소리가 해에서도 들리고 달에서도 들린다. 방정맞은 꽹과리 소리가 아니라 깊고도 멀리 가는 방짜징 소리, 징소리가 들린다. 지리산 같은 방짜징 소리가 들린다. 한라산 같은 방짜징 소리가 들린다. 오늘 아침에도 해에서 빛의 징소리가 쏟아지더니, 오늘 밤에는 달도 보이지 않는데 징소리가 쏟아진다. 나의 몸과 마음이 방짜징 소리를 달빛처럼 입는다. 


0003 꿈이더냐 삶이더냐 


요즘에 다시 꿈을 자주 꾼다

40년 가까이 떠나지 못하는

발전소에서 검은 기름 흘려

온 세상이 붉게 타오르는 꿈


요즘에는 꿈도 연작으로 꾼다

내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꿈

꿈속에서는 왜 가능한지 모른다


콩을 갈아서 두부를 만드는데

할머니 한 분이 강가의 바위들을

솔로 박박 이끼를 닦아내고 있다

그렇게 닦은 강의 길을 따라서

강물이 콩물로 변하여 흐른다


두부가 너무 많아 처치 곤란하다

하였더니 너무 걱정하지 말란다

콩물은 강물이 되어 바다로 간다

바다로 가 파래 청각 미역 다시마

온갖 해초들 키워 목장을 만든다


넓은 초원 목장으로 소풍을 간다

언덕을 굴러가는 풀 더미들 사이

우리도 서로 끌어안고 굴러간다

하늘과 땅이 한 몸 되어 굴러간다


전화벨 소리가 꿈 밖으로 부른다

해운대 바닷가로 또 오라고 한다

이것 또한 꿈속의 꿈인가 삶인가


지리산의 방짜징 소리가 들린다

함양군의 방짜징 소리가 들린다

하늘에서 들리고 땅에서 들린다


코끼리 마늘이 피터팬 모자를 쓴다

팅커벨은 어디 가고 왜 혼자이더냐

다녀오는 동안 집 잘 지키고 있거라


0004 윤동주 시인과 함께 길을 떠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윤동주 시인은

죽어서 드디어 별이 되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은 죽어서도

바로 눕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죽어서도 땅만 보고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부른다

윤동주 시인과 함께 나도

이제는 그 아득한 길을 걸어간다

예수 그리스도와 석가모니 부처님과

서불선생과 설문대할망과 마고할미와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다가,

윤동주 시인과 나는 함께

이어도 문을 열고 나와서 순례길에 나선다

설문대할망의 고향으로 간다

마고할미의 고향으로 간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으로 간다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 한라산으로 간다

지리산으로 간다 백두산으로 간다 북간도로 간다

다시 처음부터 세상을 깊이 읽으며

멀고도 긴 순례를 떠난다

30년 넘은 유배생활을 마치고

내 삶의 마지막 순례를 떠난다

제주도에서 온 영혼들이 함께 따라나선다

정방폭포에서 온 영혼들이 먼저 따라나선다


0005 윤동주 시인이 나를 읽는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읽는다
윤동주 시인이 나를 읽는다


윤동주 시인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이제 꿈속에서도 윤동주 시인이 보인다. 눈을 뜨니 방 벽에서도 눈이 보인다. 눈들이 보인다. 윤동주의 눈이 보이고 송몽규의 눈이 보이고 강처중의 눈이 보이고 정병규의 눈이 보인다. 벽에 서있는 나무판자에 눈동자가 많다. 옹이들이 죽으면 저렇게 벽의 눈이 되기도 한다. 아예 눈알이 빠져서 뻥 뚫린 구멍도 있다. 


오늘은 자꾸만 <자화상> 생각이 난다. 나의 자화상을 어떻게 그릴까.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 제목은 처음에는 <외 딴 우물>이었다가 <우물 속의 자화상>이었다가 최종적으로 <자화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자화상은 최종적으로 어떤 자화상으로 남을 수 있을까. 나 자신도 나의 자화상이 궁금해진다. 나는 이렇게 다시 윤동주 시인을 읽는다. 아니, 윤동주 시인이 나를 읽는다. 東柱(동주)와 童舟(동주)와 童柱(동주)가 나를 읽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나서 함께 길을 찾아 나선다.


0006 윤동주 시인의 거울을 보니


윤동주 시인의 거울을 보니 내가 보인다

송우혜 선생님의 <윤동주평전>을 읽는다. 윤동주 시인을 만나려면 먼저 간도로 가야만 한다. 간도는 좀 특별한 곳이다. 간도를 한문으로는, 間島(간도)라고 쓰기도 하고 墾島(간도)라고 쓰기도 한다. 청나라는 병자호란 뒤, 간도를  봉금(封禁) 지역으로 정하고 조선 사람이든 청나라 사람이든 아무도 들어가 살 수 없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간도라는 지명은 조선과 청나라 사이[間]에 놓인 섬[島]과 같은 땅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후기에 우리 농민들이 이 지역에 이주하여 땅을 새로 개간하였다는 뜻에서 ‘간도(墾島)’라고 적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윤동주 시인을 만나려면 사이섬으로 가야 한다. 개간한 섬으로 가야 한다.


"처음엔 두만강 위쪽 땅을 그냥 '간도'라고 했다. 그러나 후에 압록강 이북을 '서간도'라 하면서, 두만강 이북은 '북간도'로 구분해서 불렀다" 윤동주 시인은 북간도에서 태어났다.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이 또한 특별한 곳이다. 명동촌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마을이 아니다. 1899년 2월 18일에 생겨난 마을이라고 한다. "두만강변의 도시인 회령과 종성에 거주하던 네 명의 학자들 가문에 속한 22개 집안 식솔들로 이루어진, 총 141명의 이민단이 그날 일제히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북간도 명동촌은 학자들 가문이 두만강을 건너 이국땅에 세운 개척마을이다. 윤동주 시인은 그런 특별한 마을에서 1917년 12월 30일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명동학교 설립자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이었다.


그런데 나는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0007 몸은 아래로 정신은 하늘로


윤동주 시인의 일생은
몸은 아래로 내려가고 정신은 하늘로 향했다

윤동주 시인은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의 명동소학교를 나와 용정의 은진중학교로 진학했다.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거쳐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그리고 1938년 4월 9일 드디어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또한 1942년 4월 2일 동경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10월 1일 경도의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편입학하였다. 다음 해 1943년 7월 14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특별한 곳에서 태어나 평생 길을 찾다가 떠났다. 평생 공부를 하다가 길을 찾아 떠났다. 나는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태어났을까? 나는 전남 곡성군 삼기면에서 태어났다.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고 밤새 나를 찾아 헤매었다. 인터넷으로 주민등록표 초본을 열람하였다. 옛날에 내가 보았던 초본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간편하게 변했다. 초본에는 나의 출생지가 나와 있지 않았다. 나의 주소지 변동사항이 29번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1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 원등리 957번지, 1975년 9월 23일 전입...., 나는 그 이전의 나의 행적을 찾고 싶었다. 1번의 주소지는 지금 내 고향집이 있는 주소지였다. 내 기억 속에는 그 고향집 징검다리 건너에 유년시절이 있었다.


008 어머니의 기억과 아버지의 기억


나는 다시 제적초본을 열람하였다. 출생장소가 전남 곡성군 삼기면 원등리 1099번지로 되어 있었다. 나의 기억과 달랐다. 나는 지금껏 징검다리 건너 월경리 외딴집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 살았던 월경리 2구, 행정리(행경리)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하였다. 내 무의식적인 기억 속에는 방 벽이 기울어져 있고 방바닥도 수평이 아니고, 천정에서 빗물이 떨어져서 방에 세숫대야를 놓고 밤새 빗물을 받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껏 원등리 1099번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신고일은 1968년 10월 15일로 기록되어 있었다. 신고인은 아버지로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왜 2년도 더 지나서 출생신고를 하셨을까. 그리고 왜 2월 28일로 출생신고를 하셨을까? 어머니께서는 늘 내가 2월 24일 아침 6시에 태어났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태어나서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제적초본에 기록된 나의 출생지와 나의 기억 속의 출생지를 비교하며 밤새 고향의 길들을 둘러보았다. 


0009 늦게 쓰는 일기


1966년 참꽃 불타는 2월 29일 새벽 두 시

그믐달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의 눈썹이

떨어지고 닭도 울지 않았다 개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컴컴한 어둠을 향해

컹컹 짖었다 그리고 나는 울지 않았다

울음 없는 아이로 태어나 누워만 있었다

송아지 울음소리가 걸어 나오는 물소리

가느다랗게 들리고 핑경 같은 별들이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잠들지 못하는 그 사이로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나는

별무덤을 파헤치고 다시 태어났다

그 자리에 나의 탯줄과 함께 누워있는 어머니

무덤가 어린 쑥 잎에도 향기가 오르고

나는 어머니가 누운 만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별똥별이 떨어지고 숲이 있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 지상에

세상은 있었고 내가 태어나면서 같이 태어난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그러한 아침으로

때 아닌 비가 내리고 담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0010 생명의 숲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도 없었고 땅도 없었고

하느님도 없었고 말씀도 없었다

태초라는 말도 없었다


빛도 없고 어둠도 없는 허공에

아무도 모르는 씨앗 하나 날아왔다

그 작은 씨앗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다


처음은 그렇게 하나로 시작되었다

하나의 껍질을 벗으니 둘이 되었고

둘은 다시 하나가 되어 넷이 되었다


어느 맑은 날 문득 하늘이 생겼다

하늘은 텅 빈 없음이니 없음이

자꾸만 무엇인가를 낳기 시작했다


먼지를 낳고

바람을 낳고

구름을 낳고

어둠을 낳고

별과 달과 지구를 낳고

뜨거운 태양을 낳았다


하나가 둘이 되면서 빛과 어둠이 생겼고

둘이 넷이 되어 동서남북을 낳아 길렀다

그렇게 세상은 생겨나서 팔방으로 퍼졌다


하지만

처음의 세상은 너무나 뜨거웠다


너무 뜨거운 세상에

구름은 물이 되어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물과 흙은 생명을 낳았고

생명들은 물에서 흙으로

흙에서 허공으로 퍼졌다


세상에 태어난 것들은

따뜻함을 중심으로 모였다

손에 손을 잡고 돌기 시작했다

따뜻함은 가득한 사랑이니

사랑은 사랑을 낳아 길렀다

세상은 그렇게 사랑이 되었다


사랑은 시간을 만들고

시간은 인간을 낳았다

인간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신들을 낳았다


공간이 만든 신들은 죽고

인간이 만든 돈이 빛났다

신들의 시대는 지나가고

인간의 시대도 지나가고

화폐의 시대도 지나가고

지구는 병이 깊이 들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거나

메타버스를 타고 가상공간으로

서둘러서 떠나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죽었고

스스로 신에 등극한 돈이

인간들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과 사람과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옹달샘의 숲이 되어 숲으로 살아간다


0011 언어의 온도


강가 개울가 이지성 님의 극찬이 있어서 <언어의 온도>를 읽었다. 50대 남자가 읽어도 참 좋은 책이었다. 배울 점이 많은 책이었다. 나도 한 수 배워서 당장 적용해야겠다. 핵심은 여백이다. 그리고 정제된 언어와 쉼이다. 여백과 정제와 쉼은 시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 아닌가. 시뿐만 아니라 산문을 쓸 때에도 적용하면 좋을 것이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시와 산문의 적정한 거리 조정이 될 것이다. 나의 글은 어쩌면 너무 시에 익숙해서, 보통 사람들이 상징과 비유를 따라오지 못해서, 어렵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상징과 비유에 익숙한 시인들은 나의 글을 읽기 쉽겠지만 산문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좀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위하여 글을 쓸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0012 윤동주 시인과 함께 다시 순례를 시작한다


이어도에서 나는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어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있었고 예수님도 있었다. 윤동주 시인도 있었고 바다에서 죽은 제주도 사람들도 있었다. 정방폭포는 한라산 남쪽 최대의 학살터였다. 75년 만인 2023년 5월에 비로소 작은 4.3 희생자 위령공원이 마련되었다. 내가 일전에 서복선생과 함께 다녀왔던 서복 전시관 곁에 위령공간을 마련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영혼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도 함께 가겠다고 길을 나선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 뿐만 아니라 모든 죽은 것들까지 사랑하는 나와 윤동주 시인이 함께 길을 나선다. 이번 기회에 정방폭포도 둘러보고 제주도의 여러 곳들을 둘러보기로 한다. 주로 죽음의 장소들을 위주로 둘러보기로 한다. 


정방폭포와 소남머리, 무등이왓과 큰넓궤, 곤을동, 북촌리, 다랑쉬굴, 터진목, 표선해변, 섯알오름, 주정공장, 이덕구산전, 관덕정..., 여수와 광주와 대전의 학살터까지 둘러보려고 한다. 정방폭포에서 백두산까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고향 북간도까지 긴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0013 뻐꾸기와 뻐꾹채와 엉겅퀴꽃 


요즘 뻐꾸기는 알을 낳지 않는다

요즘 뻐꾸기는 잘 울지도 않는다

옛날 뻐꾸기는 집 없어도 바빴다

젖동냥으로 키워도 그냥 낳았다

전쟁 통에도 아이를 낳아 길렀고

집이 없어도 새끼를 낳아 길렀다

뒷일은 생각도 않고 그냥 낳았다

그 바람에 뻐꾸기는 피를 흘렸다

밤낮없이 피 울음 토하며 울었다


뻐꾹채에는 뻐꾸기 피가 묻었다


요즘 뻐꾸기는 알을 낳지 않는다

요즘 뻐꾸기는 잘 울지도 않는다


뻐꾹채는 보이지 않고 엉겅퀴만,


먹을 것이 없어서

뻐꾸기 울음소리  먹고 자란

나는 오늘도 울음소리가 고프다


* 내가 어린 시절에는 인구가 너무 많다며 아이들을 조금만 낳으라고 하였다. 보건소에서 피임약과 콘돔을 매달 나누어주었다. 나는 보건소에서 30알짜리 피임약과 콘돔을 대신 받아오곤 하였다. 학교에서는 지구 밖으로 아이들이 밀려나 떨어지는 포스터를 그리곤 하였다. 배가 고픈 우리들은 골목에서 콘돔을 불어서 놀았다. 뻐꾸기가 자주 울었고 뻐꾹채가 많이 피던 시절에는 콘돔이 질겨서 가장 좋은 풍선이었다.


0014 윤동주 시인의 프로필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 간 젊은 시인으로,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얼마 되지 않는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 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 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 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 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鄭炳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柳玲)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 <초한대>를 썼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少年)》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遺作)인 <쉽게 씌어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인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1968). 윤동주(尹東柱) 탄생 백주년을 넘기면서 많은 자료들과 영화 등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0015 연어의 종착역과 징검다리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이다. “뭣이 중한디? 뭣이 중하냐고!”라는 대사로 유명해진 <곡성>이란 영화의 무대인, 바로 그 곡성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지금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부끄럽게도, 정말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잘 모르고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중학교까지 다녔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연어의 종착역’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곡성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에 나오면서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옛날의 곡성역이 그 영화에 나오고 기차마을로 조금씩 알려진 이후에 세워진 표지석이다. 


나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삼기천이 흐른다. 비가 많이 오면 삼기천의 물이 우리 집에까지 들이닥칠까 싶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된 다음에 가보니 ‘의동 마을, 원등 1구’라는 이름과 함께 ‘연어의 종착역’ 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누가 지은 이름인지 몰라도 꼭 나를 위해서 지어준 이름인 듯, 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내가 살았던 삼기천에서 아직껏 연어를 한 번도 직접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연어의 종착역’이라는 이름은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연어와 속성이 비슷한 은어는 많이 보았고 많이 잡아보기도 했다. 또한 연어와 은어와는 정 반대의 속성을 지닌 장어도 많이 잡아보았다. 


연어와 은어는 강에서 태어나고, 연어는 먼바다에서 살고, 은어는 가까운 바다에서 살다가, 다시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서 새끼를 낳고 죽는다. 하지만 우리들이 민물장어라고 말하는 뱀장어들은 강에서 태어나지 않고 모두가 바다에서 태어난 놈들이다. 


0016 뱀장어를 아시나요


많은 사람들은, 연어와 은어의 산란과 죽음에 대한 지식은 많은데, 장어의 산란과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민물에서 자라는 민물장어들의 산란 장소를 아직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필리핀 인근의 깊은 바다에서 짝짓기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700~1,200만 개의 알을 낳고 죽는다고만 알려져 있다. 알은 부화하여 렙토세팔루스라 불리는 버들잎 모양의 유생기를 거쳐 실 모양의 어린 실뱀장어로 탈바꿈하며, 2~5월 사이에 무리를 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민물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고 알려져 있다.  

  

주) 뱀장어

민물장어는 뱀장어라고 한다. 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뱀장어는 뱀장어목 뱀장어과에 속하는 민물고기로, 장어류 가운데 유일하게 바다에서 태어나 강으로 올라가 생활하는 회류성 어류이다. 그러나 다양한 서식환경과 염분농도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때로는 일생을 강이나 바다 어느 한쪽에서만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들이 식용으로 소비하는 뱀장어는 주로,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실뱀장어를 그물로 잡아 양식을 통해 얻으며, 여름철 스태미나 음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몸에는 타원형의 미세한 비늘이 있지만 살갗에 묻혀서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래턱이 위턱보다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등지느러미와 뒷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끝이 뾰족하며, 배지느러미는 없다. 옆줄에 있는 감각공(감각을 느낄 수 있는 구멍)이 뚜렷이 보인다. 


몸 색깔은 사는 장소나 시기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난다. 민물에서 바다로 이동할 때에는 짙은 검은색으로 변한다. 따뜻한 민물에서 살며, 육식성으로 게, 새우, 곤충, 실지렁이, 어린 물고기 등을 잡아먹는다. 낮에는 돌 틈이나 풀, 진흙 속에 숨어 있다가 주로 밤에 움직이는 야행성이다. 


간혹 밤에 뭍으로 올라와 이동한다는 보고도 있다. 물의 온도가 낮아지면 굴이나 진흙 속에 들어가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 다시 활동한다. 수컷은 3~4년, 암컷은 4~5년 정도 지나면 짝짓기가 가능해지고, 8~10월에 짝을 짓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다. 이때에는 생식기관이 발달하고 소화기관이 퇴화하면서, 굶은 상태로 산란장소를 찾아 이동한다. …,   


0017 나의 고향집은 


내가 나의 고향집이라고 말하는 그 집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식구들이 직접 지은 집이다. 마을 뒷산인 심산에서 소나무를 베어와 껍질을 벗기고 대패질로 다듬어서 서까래로 쓰고, 그전에 살던 집 뒤꼍에서 자라던 거대한 미루나무를 잘라 대들보와 상량 목으로 만들어 올렸다. 나의 고향집은 마당이 손바닥만 한 아주 작은 집이고 우리 식구들의 첫 번째 우리 집이었다.


우리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삼기천 바로 맞은편, 둑 너머에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하천 국유지에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기천을 경계로 하여 면소재지 쪽이 원등리이고 맞은편 마을이 월경리였다. 원등리는 삼기천과 바로 붙어 있었으며 1구에서 5구까지 마을 다섯 개가 모여 있었고, 월경리는 삼기천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호남고속도로 공사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래방천에 붙어있는 왕산을 깎아내리는 공사가 가장 큰 난공사였는데 그곳에서 가져온 나무뿌리로 뿌리 탁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포클레인이 없어서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에 가로로 장착된 긴 쟁기삽날로 흙을 밀어내는 방식이어서 더욱 공사가 어려웠던 것 같다. 불도저는 그 후로도 가끔 신작로 흙길을 판판하게 다듬어주는 공사를 하기도 하였다. 요즘에는 대부분 포클레인으로 흙을 푹푹 파내는 방식으로 공사를 하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분 쟁기 형식으로 흙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공사를 하였다. 그러니 큰 산을 밀어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공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호남고속도로는 월경리 쪽에 붙어 있었다. 또한 월경리는 1구와 2구가 있었는데 2구는 더 깊은 산속에 뚝 떨어져 있어서 따로 ‘행경’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0018 징검다리 건너 외딴집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삼기천 둑 공사를 하면서, 물길을 반듯하게 만들면서, 둑 너머에 공터가 좀 생겼던 모양이었다. 정미소를 하시다가 잦은 고장과 큰 사고로 망한 아버지께서 그 공터에 불법으로 대강 슬레이트 지붕을 올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집은 외딴집이었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월경리에 속해 있었지만 거리상이나 생활상의 영역은 원등리 1구에 더 가까운 생활권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고향집과는 징검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다. 지금은 그 옛날 집터도 둑 높이까지 매립이 되어 그 위에 새로운 집이 지어져 있다. 물론, 남의 집이 지어져 있다.    


나의 기억은 징검다리 건너 그 옛날 외딴집에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나는 또 그 바로 전에 살았었다는 ‘행경’이란 마을에서 더 작은 정미소를 할 때 태어났다고 전해 듣기도 하였다. 원등리 2구에 있는 큰 정미소에서 망하고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아주 작은 정미소를 하였는데 바로 그때 내가 태어났다고도 하였다.


0019 방물장수 혹은 봇짐장수(황아장수, 보부상, 행상)


그러니까 월경리 1구 시절, 마당뿐만 아니라 집 전체가 깊은 외딴집이었던 바로 그 옛날집에서는 많은 기억들이 흘러넘친다. 마당의 높이는 둑 너머 삼기천 바닥과 같았다. 그러니까 둑이 무너지면 외딴집은 바로 물에 잠기게 되어있는 구조였다. 우리 식구들은 그렇게 위험하고 외로운 집에서 꽤 오래도록 쓸쓸하게 살았다. 


그 시절 어머니는 튼튼하고 커다란 미원박스에 각종 생활용품을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시며 봇짐장사를 하셨다. 먼 마을까지 다니시는 바람에 밤늦게 돌아오시기 일쑤였고 다음날 돌아오시는 날도 많았다. 내가 아기였을 때에는 나를 등에 업고 머리에 봇짐을 이고 다니셨다고 하셨다. 멀리 장사를 나갈 때에는 잠자리가 불편하여 가장 힘이 들었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비교적 잘 울지 않아서 다행이었으나 동생은 잘 우는 바람에 주인집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먼 밖으로 나가 동생을 안고 많이 울기도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0020 장마철에는 둑이 자주 무너지고


그리고 장마철에는 둑이 자주 무너지기도 하였다. 월경리로 건너가는 다리 아래쪽이 자주 무너졌다. 그럴 때마다 무서운 물살이 넘어와 흙탕물이 우리 집을 덮쳤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들은 원등리 1구 회관으로 피신하여 며칠씩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외딴집에는, 대문도 없고 담장도 없어서 아무라도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특히 월경리에 사신다는 ‘꽃 본 듯이’라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밤마다 우리 집 시멘트 마루에서 남몰래 주무시는 바람에 많이 무서웠다. 그 할아버지는 정신이 좀 이상해서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나에게는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어느 날, 동네 청년들에게 끌려가 산에서 얻어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서 좋았는데 그때부터는 다시 동냥아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팔이 없거나 눈알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쇠갈쿠리 손을 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지금,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면 참 불쌍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저 무섭기만 하였었다.


0021 오리와 호롱불


그리고 많은 집들이 함께 모여 있는 동네에는 이미 전기가 들어왔는데 외딴집이었던 우리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불법건축물이어서 전기 신청도 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때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날마다 징검다리를 건너 다니며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원등리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월경리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하였다. 나의 위치와 소속이 애매해서 나는 외톨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짐승들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특히 물가에서 사는 바람에 오리를 많이 길렀다. 오리뿐만 아니라 닭과 토끼와 염소 그리고 나중에는 돼지와 소와 말까지 길렀다.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오리가 한 마리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오리는 낮에 냇물에 나가서 먹이를 잡아먹고 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알도 낳고 잠도 자고 또다시 새벽에 물가로 나가 놀았다. 오리는 닭보다 훨씬 빨리 자랐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자꾸만 동네사람들을 불러와 오리를 잡아서 함께 드시기 시작하셨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빨래 줄에 오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오리 피가 몸에 좋다고 오리를 산 채로 빨래 줄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목을 잘라서 오리 피를 그릇에 받아내고 계셨다. 그때 정말 화가 많이 났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가 많이 울었다. 


그리고 또한 어느 날 아침에는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내가 사서 내가 기른 돼지를 잡아가버렸다. 그 전날 밤 아버지께서, 노름판에서 내 돼지를 잡히고 돈을 빌려 노름을 하시다가 다 잃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 많은 이야기들은 평생 말해도 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0022 물고기들아 미안하다


우리 식구들은 물가에서 살아서 그런지 물고기들을 많이 잡아서 먹었다. 장어를 잡아먹고 미꾸라지를 잡아먹고 참게를 잡아먹고 자라까지 잡아서 먹었다. 물론 피라미와 붕어와 중태기와 민물새우도 많이 잡아서 먹었다. 특히 저수지 물을 빼는 날이면 그야말로 물고기 천지였다. 


저수지 바닥이 드러나면 장어와 잉어들이 수두룩했고 미꾸라지는 처치가 곤란할 정도로 너무 많았다. 그리고 가끔 아버지께서는 섬진강에 가셔서 은어들을 잡아오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투망질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 투망질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불법이어서 함부로 할 수가 없다. 투망질뿐만 아니라 어른들은 자동차 배터리를 등에 짊어지고 대나무 끝에 장착한 구리선으로 전기를 관통시켜서 물고기를 잡았고 아이들은 자전거 바퀴로 돌리던 작은 발전기를 이용하여 물고기들을 잡았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까지 민물낚시는 기본으로 하였고 겨울에는 주로 해머로 물속의 돌을 두들겨서 물고기를 잡곤 하였다. 그리고 족대라고 하는 작은 그물로도 잡고 맨손으로도 돌 속이나 풀 속을 뒤져가며 물고기들을 잘도 잡아서 먹곤 하였다. 


그때는 워낙 식량이 부족한 시절이어서 물고기들 뿐만 아니라 새들이며 산짐승들도 닥치는 대로 잡아서 먹곤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동물학대죄로 모두 잡혀갈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뱀이며 개구리까지 잡아서 먹고, 고라니며 산토끼며 꿩들까지 잡아서 먹던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프로필 1917.12.30 ~ 1945.2.16
배진성 시인의 프로필 1966.0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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