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닷물 소리 듣고 싶어
- 바닷물 소리 듣고 싶어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개껍데기
여긴 여긴 북쪽 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닷물 소리.
_ (1935년. 12월. 봉수리에서. 윤동주 19세)
요즘 다시 동시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시인들 중에서도 동시를 함께 쓰는 시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갈수록 시집은 팔리지 않고 그나마 동시집은 어느 정도 팔리는 상황이다. 또한 시를 쓰는 사람들 중에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을 하는 시인들이 많아서 그러는 면도 많은 것 같다. 시대에 따라서 혹은 필요에 따라서 달라지는 듯하다. 80년대의 화려했던 시의 시대는 다시 오기 힘들 것이다. 이제 어른들은 시를 읽지 않지만 자식들에게는 시를 읽게 하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많아서 그나마 동시나 동화는 어느 정도 팔리는 듯하다.
나는 날마다 바닷가를 걷는다. 나는 날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조개껍데기를 본다. 조개껍데기는 보통 날개를 펴고 있다. 살아있을 때에는 입을 꼭 닫고 살던 조개껍데기는 죽어서 비로소 날개를 펴고 살아간다. 많은 조개껍데기는 한쪽 날개를 잃고 한쪽 날개로만 살아가는 조개껍데기들도 많다. 조개껍데기는 죽어서도 바다를 품고 있다. 조개껍데기는 죽어서도 파도소리를 먹고 자란다. 나는 날마다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은 바닷가의 조개껍질이 아니라 북쪽 나라에서 조개껍질을 노래한다. 언니가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개껍질을 노래한다. 북쪽 나라에서 귀여운 선물, 조개껍데기를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면서 노래한다.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가 한 짝을 잃어버렸다. 남아 있는 한 짝은 잃어버린 한 짝을 그리워한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는 잃어버린 한 짝을 그리워하고 조개껍데기의 고향인 바다를 그리워하고 나에게 조개껍데기를 주어다 준 언니를 그리워한다.
윤동주 시인은 시뿐만 아니라 동시와 동요도 많이 쓴 시인으로 유명하다. 이 동요는 1935년 12월.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윤동주 시인이 맨 처음으로 쓴 동시로 알려져 있다.《정지용 시집》에 실린 동시를 읽고 감탄해서 이때부터 연희전문학교 1학년 때까지 많은 동시를 썼다고 한다. 이 동시는 한 짝을 잃은 조개껍데기를 노래하고 있다. 또한 바다를 떠난 조개껍데기가 자신의 고향인 바다를 그리워하듯이 나 또한 바닷물 소리를 그리워한다.
윤동주 시인은 바다에서 먼 북간도에서 살았다. 그리고 이 시는 윤동주가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하고 얼마 뒤인 1935년 12월에 쓴 작품이다. 윤동주의 최초의 동요라고 알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의 육필 원고 제목에는 '(童謠) 조개껍질'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아이들이 부르기 위한 동요(童謠)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북쪽 나라에서 잃어버린 다른 짝을 그리워하는 조개껍데기에 투사된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의 끝에 달린 메모에는 '一九三五年十二月、鳳峀里에서.'라고 적혀있다. 봉수리(鳳峀里)는 현재 평양의 봉수동을 말한다. 당시 봉수리에는 문익환이 봉사하던 숭실 YMCA 종교부에서 운영하는 주일학교가 있었는데, 문익환의 절친한 친구인 윤동주 시인이 주일학교 일을 돕는 과정에서 아이들과 어울리며 만들어진 동요로 추정되기도 한다. 4·5/3·5/3·5조의 규칙적인 운율과 적절한 의성어 및 의태어 사용이 돋보인다. 윤동주 시인이 애용하는 되풀이법이 사용된 작품으로 '조개껍데기', '그리워하네' 등이 반복된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윗입술과 아랫입술처럼 함께여야 의미가 있는 조개껍데기, 하지만 이 시에서 조개껍질은 한쪽이 없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가 그립지만 찾을 수 없다. 바다 물소리가 저 멀리 시원하게 들리고, 파도가 앗아가는 모래 속에서 조개껍데기를 찾아보지만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조개껍데기처럼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분명, 너무나 많이 있다. 기억 저편에서 끄집어내야 하는 켜켜이 먼지 덮인 오래된 기억의 조각들과 단번에 생각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가장 생각이 많아지는 그리운 것. 나에게는 그리운 조개껍데기가 이렇게 있구나. 다시 떠오르는 바다 물소리. 쏴아아, 쏴아아, 하고 사라지는 조개껍데기 같은 그리운 기억들. 이젠 현실에는 없는 조개껍데기.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그리운 기억들. 바닷속으로 멀리 사라져 간다. 윤동주 시인이 중학생 시절에 썼던 시를 낭송해 본다. 바다가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바다를 그리워하는, 누나를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이 잔잔하게 전해진다. 나는 그래도 문만 열고 나가면 바다를 만날 수 있어서 참 좋다. 나는 날마다 바다에 젖을 수 있어서 참으로 좋다. 나는 아직 살아있어서 참 좋다. 그리운 것들을 그리워할 수 있어서 오늘도 행복하다.
* 원문표기:
- '껍데기' -> '껍대기'
- '바닷가에서' -> '바다가에서'
- '주워 온' -> '주어온'
- '북쪽 나라요' -> '북쪽나랴요'
- '장난감' -> '작난감'
- '아롱아롱' -> '아릉아릉'
- '바닷물 소리' -> '바다물소리'
* 윤동주 시인은 '누나'라고 호명하지 않고 '언니'라고 호명했다. 그래서 더욱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조개껍데기를 선물 받은 사람이 나일 수도 있고 내가 아닐 수도 있도록 복선을 깔아놓았다. 또한 내가 여성화자의 탈을 쓰고 노래한 것으로 해석해도 가능하다. 여기에서 '누나'라고 호명하지 않고 '언니'라고 호명한 경우처럼 시인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시적진실'이라고 한다.
https://youtu.be/8oCGc-Mne2k?si=HqAEv9g0avTh69gc
번거롭던 사위가 잠잠해지고 시계소리가 또렷하나 보니 밤은 저윽이 깊을 대로 깊은 모양이다. 보던 책자를 책상머리에 밀어 놓고 잠자리를 수습한 다음 잠옷을 걸치는 것이다. 「딱」 스위치 소리와 함께 전등을 끄고 창녘의 침대에 드러누우니 이때까지 밖은 휘양찬 달밤이었던 것을 감각치 못하였댔다. 이것도 밝은 전등의 혜택이었을까. 나의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보담도 오히려 슬픈 선창이 되는 것이다. 창살이 이마로부터 콧마루, 입술 이렇게 하여 가슴에 여민 손등에까지 어른거려 나의 마음을 간지르는 것이다. 옆에 누운 분의 숨소리에 방은 무시무시해진다. 아이처럼 황황해지는 가슴에 눈을 치떠서 밖을 내다보니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소리가 날 듯하다. 들리는 것은 시계소리와 숨소리와 귀또리 울음뿐 벅적거리던 기숙사도 절간보다 더 한층 고요한 것이 아니냐? 나는 깊은 사념에 잠기우기 한창이다. 딴은 사랑스런 아가씨를 사유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상화도 좋고, 어린 적 미련을 두고 온 고향에의 향수도 좋거니와 그보담 손쉽게 표현 못할 심각한 그 무엇이 있다. 바다를 건너온 H군의 편지사연을 곰곰 생각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이란 미묘한 것이다. 감상적인 그에게도 필연코 가을은 왔나보다. 편지는 너무나 지나치지 않았던가. 그 중 한 토막, 「군아! 나는 지금 울며 울며 이 글을 쓴다. 이 밤도 달이 뜨고, 바람이 불고, 인간인 까닭에 가을이란 흙냄새도 안다. 정의 눈물 따뜻한 예술학도였던 정의 눈물도 이 밤이 마지막이다.」 또 마지막 켠으로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은 나를 영원히 쫓아버리는 것이 정직할 것이오.」 나는 이 글의 뉘앙스를 해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에게 아픈 소리 한 마디 한 일이 없고 서러운 글 한 쪽 보낸 일이 없지 아니한가. 생각컨대 이 죄는 다만 가을에게 지워 보낼 수밖에 없다. 홍안서생으로 이런 단안을 나리는 것은 외람한 일이나 동무란 한낱 괴로운 존재요 우정이란 진정코 위태로운 잔에 떠놓은 물이다. 이 말을 반대할 자 누구랴, 그러나 지기 하나 얻기 힘든다 하거늘 알뜰한 동무하나 잃어버린다는 것이 살을 베어내는 아픔이다. 나는 나를 정원에서 발견하고 창을 넘어 나왔다든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든가 왜 나왔느냐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두뇌를 괴롭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귀뚜라미 울음에도 수줍어지는 코스모스 앞에 그윽히 서서 딱터 삘링쓰의 동상 그림자처럼 슬퍼지면 그만이다. 나는 이 마음을 아무에게나 전가시킬 심보는 없다. 옷깃은 민감이어서 달빛에도 싸늘히 추워지고 가을 이슬이란 선득선득하여서 서러운 사나이의 눈물인 것이다. 발걸음은 몸뚱이를 옮겨 못가에 세워줄 때 못 속에도 역시 가을이 있고, 삼경이 있고 나무가 있고, 달이 있다.(달이 있고……)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꼿꼿한 나뭇가지를 고나 띠를 째서 줄을 메워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https://youtu.be/7rU4JDrh6u4?si=af62oPAJXtv3LiJ7
https://youtu.be/cBOGl2b4Gzk?si=fZHebZqk0a8B7N4L
박상훈 기자2024. 8. 8. 11:00
“15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8월 4일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 에트나 화산이 폭발하고 있다./Antonio Treccarichi
15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용암 분출이 시작됐고, 그날부터 매일 아침 일어나 베란다로 나가 에트나 화산을 확인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죠. 몇가지 앱을 통해 진동의 크기와 주기를 확인하고 화산이 언제 터질지 예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8월 3일 토요일 밤을 지나 4일 새벽 대부분이 잠든 시간에 10km가 넘는 높이의 거대한 용암 분출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고된 시간들 후에 찾아온 혼자만의 시간이었습니다.
/ Antonio Treccarichi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에트나 화산 폭발 모습.(저작권 Antonio Treccarichi 허가된 내용 외 사용금지)/ Antonio Treccarichi
카타니아 출신의 현지 사진작가인 안토니오 트레카리치(43)가 시칠리아섬에 있는 에트나 화산이 폭발하는 모습을 촬영한 과정을 설명하며 소회를 밝혔다.
인스타그램 검색을 통해 그의 사진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각종 외신, 그리고 뉴스 에이전시 사진에서도 보지 못했던 사진이었다.
정말 용암의 불꽃 높이만 10km는 돼 보이는 거대한 폭발을 잡아낸 것이었고, 폭발하는 화산을 급하게 있는 자리에서 찍은 사진이 아니라 카타니아 마을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뷰포인트에 자리를 잡고 제대로 포착한 사진이었다.
메시지를 통해 연락을 취했고 온라인 인터뷰와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7월 2일 이후부터 화산폭발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면서 용암과 화산재가 산의 높이 3300미터의 3배인 10km 넘게 하늘로 솟구쳤다는 기사는 많이 봤지만 그것을 기록한 사진은 찾기 힘들었는데, 유일하게 그의 사진이 그러했고 밀집된 마을의 모습과 대비되는 장관을 보여줬다.
/ Antonio Treccarichi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인 에트나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과도 가까워 많은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17세기에는 강진을 동반한 강력한 화산활동으로 당시 에트나와 가까운 카타니아의 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됐고, 그래서 이 지역의 건물 대부분은 17세기 이후에 다시 건축된 것들이다.
2019년부터 화산활동이 더욱 활발해져 해마다 한두차례 이상의 분화가 일어나는데, 최근 한 달 넘게 크고 작은 폭발이 있어 주민 대피령이 있거나 공항이 종종 폐쇄되곤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트레카리치와 카타니아 현지인들은 에트나를 친절한 거인이라 부르며 그것이 우리를 해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화산재를 근거로 공항이 열리고 닫힐 뿐이라고.
/ Antonio Treccarichi
/ Antonio Treccarichi
전기공이자 사진가인 그는 열정을 가지고 다음 작업을 이어나갈 생각이라고 한다.
에트나 강을 배경으로 하는 시칠리아의 또 다른 마을에서의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림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https://v.daum.net/v/20240808110022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