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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Aug 07. 2024

남(南)쪽 하늘



남(南) 하늘



제비는 두 나래를 가지었다.

시산한 가을날―



어머니의 젖가슴이 그리운

서리 내리는 저녁―

어린 영(灵)은 쪽나래의 향수(鄕愁)를 타고

남(南)쪽 하늘에 떠돌 뿐―


 _ (1935.10. 추정, 평양에서, 윤동주 19세) 


* 어떤 사람들은 남쪽 하늘을 3연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초고에는 분명히 2연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나는 2연으로 읽는다.  


1935년 10월 평양에서 쓴 작품으로 시의 제목인 '남쪽 하늘'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한반도가 아닌 만주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시인은 본국인 조선을 그리워하는 조선인으로서 향수를 머금고 남쪽 하늘을 향하여 날개를 펴는 제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 시인은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조국을 그리워하는 모습은 1936년에 쓰인 작품인 <고향집>에서도 잘 확인된다.


윤동주 시인은 저렇게 남쪽 하늘을 그리워하는데 나는 윤동주 시인의 고향 북간도를 그리워한다. 우리들의 고향인 백두산 천지를 그리워한다. 요즘 <건국전쟁>이란 다큐멘터리 영화가 화제인 모양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조명을 다시 시도하는 다큐멘터리라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공과는 있을 것이다. 공산화를 막은 것은 공이 될 것이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한 과 또한 있을 것이다. 다만 이를 계기로 좌우 분열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인 평화통일에 대한 의지를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윤동주 시인이 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갈 때 타고 갔던 기차를 타고 백두산으로 가고 싶다.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가고 싶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징검다리 건너서 걸어가고 싶다. 윤동주 시인의 고향 명동에도 걸어서 가보고 싶다.   


'시산한'은 '스산한'의 방언이다.

'쪽-나래'는 '작은 날개'를 뜻한다.


* 원문표기

- '가지었다.' -> '가지엿다.'

- '서리 내리는 저녁' -> '서리나리는 져녁'          


https://youtu.be/5HqUzEOjkbY?si=R-eePDvvOxFBrgRX


종시 / 윤동주 


종점이 시점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 아침, 저녁으로 이 자국을 밟게 되는 데 이 자국을 밟게 된 연유가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살았을 듯한 우거진 송림 속, 게다가 덩그러니 살림집은 외따로 한 채뿐이었으나 식구로는 굉장한 것이어서 한 지붕 밑에서 팔도 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모아놓은 미끈한 장정들만이 욱실욱실하였다. 이곳에 법령은 없었으나 여인금납구였다. 만일 강심장의 여인이 있어 불의의 침입이 있다면 우리들의 호기심을 저윽이 자아내었고, 방마다 새로운 화제가 생기곤 하였다. 이렇듯 수도생활에 나는 소라 속처럼 안도하였던 것이다. 사건이란 언제나 큰 데서 동기가 되는 것보다 오히려 적은 데서 더 많이 발작하는 것이다.  눈 온 날이었다. 동숙하는 친구의 친구가 한 시간 남짓한 문안 들어가는 차시간까지를 낭비하기 위하여, 나의 친구를 찾아 들어와서 하는 대화였다. 「자네 여보게 이 집 귀신이 되려나?」 「조용한 게 공부하기 작히나 좋잖은가」 「그래 책장이나 뒤적뒤적하면 공분 줄 아나. 전차 간에서 내다볼 수 있는 광경, 정거장에서 맛볼 수 있는 광경, 다시 기차 속에서 대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생활 아닌 것이 없거든. 생활 때문에 싸우는 이 분위기에 잠겨서, 보고, 생각하고, 분석하고, 이거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아니겠는가. 여보게! 자네 책장만 뒤지고 인생이 어드렇니 사회가 어드렇니 하는 것은 16세기에서나 찾아볼 일일세. 단연 문안으로 나오도록 마음을 돌리게」 나한테 하는 권고는 아니었으나 이 말에 귀틈 뚫려 상푸둥 그러리라고 생각하였다. 비단 여기만이 아니라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이 한낱 오락이요, 오락이매 생활이 될 수 없고, 생활이 없으매 이 또한 죽은 공부가 아니랴. 하야 공부도 생활화하여야 되리라 생각하고 불일내에 문안으로 들어가기를 내심으로 단정해 버렸다. 그 뒤 매일같이 이 자국을 밟게 된 것이다.  나만 일찍이 아침거리의 새로운 감촉을 맛볼 줄만 알았더니 벌써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에 포도는 어수선할 대로 어수선했고, 정류장에 머물 때마다 이 많은 무리를 죄다 어디 갖다 터뜨릴 심산인지 꾸역꾸역 자꾸 박아 싣는데, 늙은이, 젊은이, 아이 할 것 없이 손에 꾸러미를 안 든 사람은 없다. 이것이 그들 생활의 꾸러미요, 동시에 권태의 꾸러미인지도 모르겠다. 이 꾸러미를 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씩 뜯어보기로 한다. 늙은이 얼굴이란 너무 오래 세파에 짜들어서 문제도 안 되겠거니와 그 젊은이들 낯짝이란 도무지 말씀이 아니다. 열이면 열이 다 우수 그것이요, 백이면 백이 다 비참 그것이다. 이들에게 웃음이란 가물에 콩싹이다. 필경 귀여우리라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수밖에 없는데 아이들의 얼굴이란 너무나 창백하다. 혹시 숙제를 못해서 선생한테 꾸지람들을 것이 걱정인지 풀이 죽어 쭈그러뜨린 것이 활기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내 상도 필연코 그 꼴일 텐데 내 눈으로 그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만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듯 그렇게 자주 내 얼굴을 대한다고 할 것 같으면 벌서 요사하였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기로 하고 단념하자! 차라리 성벽 위에 펼친 하늘을 쳐다보는 편이 더 통쾌하다. 눈은 하늘과 성벽 경계선을 따라 자꾸 달리는 것인데 이 성벽이란 현대로써 캄플라지한 옛 금성이다. 이 안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졌으며 어떤 일이 행하여지고 있는지 성 밖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알 바가 없다. 이제 다만 한 가닥 희망은 이 성벽이 끊어지는 곳이다. 기대는 언제나 크게 가질 것이 못되어서 성벽이 끊어지는 곳에 총독부, 도청 무슨 참고관, 체신국, 신문사, 소방조, 무슨 주식회사, 부청, 양복점, 고물상 등 나란히 하고 연달아 오다가 아이스케이크 간판에 눈이 잠깐 머무는데 이 놈을 눈 나린 겨울에 빈집을 지키는 꼴이라든가, 제 신분에 맞지 않는 가게를 지키는 꼴을 살짝 필름에 올리어 본달 것 같으면 한 폭의 고등 풍자만화가 될 터인데 하고 나는 눈을 감고 생각하기로 한다. 사실 요즈음 아이스케이크 간판 신세를 면치 아니 치 못할 자 얼마나 되랴. 아이스케이크 간판은 정열에 불타는 염서가 진정 아수롭다. 눈을 감고 한참 생각하느라면 한 가지 꺼리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도덕률이란 거추장스러운 의무감이다. 젊은 녀석이 눈을 딱 감고 버티고 앉아 있다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번쩍 눈을 떠본다. 하나 가차이 자선할 대상이 없음에 자리를 잃지 않겠다는 심정보다 오히려 아니꼽게 본 사람이 없었으리란 데 안심이 된다. 이것은 과단성 있는 동무의 주장이지만 전차에서 만난 사람은 원수요, 기차에서 만난 사람은 지기라는 것이다. 딴은 그러리라고 얼마큼 수긍하였댔다. 한자리에서 몸을 비비적거리면서도 「오늘은 좋은 날씨올시다.」「어디서내리시나요」 쯤의 인사는 주고받을 법한데, 일언반구 없이 뚱한 꼴들이 작히나 큰 원수를 맺고 지내는 사이들 같다. 만일 상냥한 사람이 있어 요만쯤의 예의를 밟는다고 할 것 같으면, 전차 속의 사람들은 이를 정신이상자로 대접할 게다. 그러나 기차에서는 그렇지 않다. 명함을 서로 바꾸고 고향 이야기, 행방이야기를 꺼리낌없이 주고받고 심지어 남의 여로를 자기의 여로인 것처럼 걱정하고, 이 얼마나 다정한 인생행로냐. 이러는 사이에 남대문을 지나쳤다. 누가 있어 「자네 매일같이 남대문을 두 번씩 지날 터인데 그래 늘 보곤 하는가」라는 어리석은 듯한 멘탈 테스트를 낸다면은 나는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본달 것 같으면 늘이 아니라 이 자국을 밟은 이래 그 모습을 한번이라도 쳐다본 적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하기는 그것이 나의 생활에 긴한 일이 아니매 당연한 일일 게다. 하나 여기에 하나의 교훈이 있다. 회수가 너무 잦으면 모든 것이 피상적이 되어버리나니라. 이것과는 관련이 먼 이야기 같으나 무료한 시간을 까기 위하여 한 마디 하면서 지나가자. 시골서는 제로라고 하는 양반이었던 모양인데 처음 서울 구경을 하고 돌아가서 며칠동안 배운 서울 말씨를 섣불리 써가며 서울 거리를 손으로 형용하고 말로서 떠벌여 옮겨 놓더란데, 정거장에 턱 내리니 앞에 고색이 창연한 남대문이 반기는 듯 가로 막혀 있고, 총독부집이 크고, 창경원에 백 가지 금수가 봄 직했고 덕수궁의 옛 궁전이 회포를 자아냈고, 화신 승강기는 머리가 힝―했고, 본정엔 전등이 낮처럼 밝은데 사람이 물 밀리듯 밀리고, 전차란 놈이 윙윙 소리를 지르며 지르며 연달아 달리고― 서울이 자기 하나를 위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우쭐했는데 이것쯤은 있을 듯한 일이다. 한데 게도 방정꾸러기가 있어 「남대문이란 현판이 참 명필이지요.」 하고 물으니 대답이 걸작이다. 「암 명필이구말구. 남자 대자 문자 하나 하나 살아서 막 꿈틀거리는 것 같데.」 어느 모로나 서울자랑 하려는 이 양반으로서는 가당한 대답일 게다. 이분에게 아현 고개 막바지기에, - 아니 치벽한 데 말고 - 가차이 종로 뒷골목에 무엇이 있던가를 물었더라면 얼마나 당황해 했으랴. 나는 종점을 시점으로 바꾼다.  내가 내린 곳이 나의 종점이요, 내가 타는 곳이 나의 시점이 되는 까닭이다. 이 짧은 순간 많은 사람 사이에 나를 묻는 것인데 나는 이네들에게 너무나 피상적이 된다. 나의 휴머니티를 이네들에게 발휘해낸다는 재주가 없다. 이네들의 기쁨과 슬픔과 아픈 데를 나로서는 측량한다는 수가 없는 까닭이다. 너무 막연하다. 사람이란 회수가 잦은 데와 양이 많은 데는 너무나 쉽게 피상적이 되나보다. 그럴수록 자기 하나 간수하기에 분망하나보다. 시그널을 밟고 기차는 왱―떠난다. 고향으로 향한 차도 아니건만 공연히 가슴은 설렌다. 우리 기차는 느릿느릿 가다 숨차면 가정거장에서도 선다. 매일같이 웬 여자들인지 주룽주룽 서 있다. 제마다 꾸러미를 안았는데 예의 그 꾸러미인 듯 싶다. 다들 방년된 아가씨들인데 몸매로 보아 하니 공장으로 가는 직공들은 아닌 모양이다. 얌전히들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판단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하나 경망스럽게 유리창을 통하여 미인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피상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될지 모른다. 투명한 듯하나 믿지 못할 것이 유리다. 얼굴을 찌깨놓은 듯이 한다든가 이마를 좁다랗게 한다든가 코를 말코로 만든다든가 턱을 조개턱으로 만든다든가 하는 악희를 유리창이 때때로 감행하는 까닭이다. 판단을 내리는 자에게는 별반 이해관계가 없다손 치더라도 판단을 받는 당자에게 오려던 행운이 도망갈는지를 누가 보장할소냐. 여하간 아무리 투명한 꺼풀일지라도 깨끗이 벗겨버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윽고 터널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데 거리 한가운데 지하철도도 아닌 터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 이 터널이란 인류역사의 암흑시대요, 인생행로의 고민상이다. 공연히 바퀴소리만 요란하다. 구역날 악질의 연기가 스며든다. 하나 미구에 우리에게 광명의 천지가 있다.  터널을 벗어났을 때 요즈음 복선공사에 분주한 노동자들을 볼 수 있다. 아침 첫차에 나갔을 때에도 일하고 저녁 늦차에 들어올 때에도 그네들은 그대로 일하는데 언제 시작하여 언제 그치는지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다. 이네들이야말로 건설의 사도들이다. 땀과 피를 아끼지 않는다. 그 육중한 도락구를 밀면서도 마음만은 요원한 데 있어 도락구 판장에다 서투른 글씨로 신경행이니 북경행이니 남경행이니 라고 써서,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밀고 다닌다. 그네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이 고력에 위안이 안 된다고 누가 주장하랴. 이제 나는 곧 종시를 바꿔야 한다. 하나 내 차에도 신경행, 북경행, 남경행을 달고 싶다. 세계일주행이라고 달고 싶다. 아니 그보다 진정한 내 고향이 있다면 고향행을 달겠다. 다음 도착하여야 할 시대의 정거장이 있다면 더 좋다.


https://youtu.be/KNVBfEoZJdg?si=EykkAcQAxeGlBGHm


https://youtu.be/A1SbYM8gYD8?si=Hwq7YOyjunY312ly

자연이 직접 그린 그림을 보여드립니다 : 제주도 제주시 이호테우 해변에서


https://youtu.be/grx_dkxima4?si=uqg2GRgiCueQlmNV



* 지난 번에 쓴 글입니다


요즘 육지에는 폭설이 내리기도 하고 봄비가 내리기도 한다. 설악산 쪽에는 폭설이 내려 눈꽃을 피운다고 하고 남쪽 마을에는 매화꽃이 한창 피어난다고 한다. 백매와 홍매가 아름답게 피어난다고 한다. 이 좁은 땅에서도 어느곳에서는 폭설이 내려 겨울꽃을 피우고 어느곳에서는 따듯한 봄비가 내려 봄꽃을 피운다고 한다. 나는 따뜻한 나라 제주도에서 오늘도 산책을 한다. 제주도는 요즘 고사리 장마처럼 계속되는 비의 나날이다. 비가 오는 날에도 가끔은 빗물을 말리는 해가 가끔 나타난다. 


나는 언제 다시 비가 내릴 지 몰라서 우산을 들고 산책을 한다. 어느 구름에 비가 들어있을 지 몰라서 우산을 준비해서 낮게 내려앉은 구름 아래를 걸어가고 있다. 천막처럼 낮게 내려앉은 구름 아래에서도 나는 안다. 저 구름 위에는 맑고 밝게 빛나는 햇빛이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구름을 밟고 건너가는 햇발의 발자국소리를 듣는다. 세상에는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들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세상에는 보인다고 꼭 그것이 진실이 아니며 보이지 않는다고 꼭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텃밭이 있다. 연대포구 곁에 있는 작은 집 앞마당을 좋아한다. 다른 집들처럼 잔디를 깔지 않고 무와 배추와 상추와 쪽파와 포도나무까지 심어놓고 마당이 온통 식탁인 집이 있다. 보리수나무를 보살피는 할아버지께 여쭈었더니 증조할아버지때부터 살았으니 180년이 넘었다고 말한다. 180년이 넘게 한 곳에서 살았다는 한 가족의 내력을 더듬어본다. 점점 도심에 가깝게 다가간 마을의 내력을 생각한다. 이제는 도심이 되어버린 마을을 생각한다. 연대마을에는 이제 빈 연대와 파도소리를 끌어안은 카페들과 모텔들이 솟아오른다. 


그런 마을에서 집은 더욱 키를 낮추고 집보다 넓은 텃밭의 무와 배추들이 꽃대의 높이를 발돋움하고 있다. 


산책을 하다가 느닷없이 빙하기를 생각한다.  제주도가 육지와 하나였던 시절을 생각한다. 이어도가 제주도와 한 몸이었던 시절을 생각한다. 이어도가 온전히 몸을 드러내고 살았던 시절을 생각한다. 제주도까지 걸어왔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매머드를 따라서 서귀포 사계해변까지 따라왔던 사람들의 발자국을 생각한다. 화석이 되어버린 발자국들을 생각한다. 새발자국도 사슴발자국도 사람발자국도 화석이 되어버린 사연을 생각한다. 암모나이트 화석을 생각한다. 호모 사피엔스를 생각한다.


윤동주 시인이 보았던 제비의 후손이 이제 곧 제주도에도 날아올 것이다. 내가 사는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에도 올 것이다. 퍼물논에서 흙을 물어와서 집을 지으리라. 흥부의 박넝쿨도 지붕으로 올라가 박꽃을 환하게 피우고 달덩이 같은 박도 둥그렇게 열리리라. 무는 무답게 자라고 배추는 배추답게 자라고 쪽파는 족파답게 푸르게 자란다. 바랭이는 바랭이답게 쇠비름은 쇠비름답게 명아주는 명아주답게 자라리라. 환삼덩굴은 환삼덩굴답게 자라리라.  물피·물달개비·쇠털골·밭뚝외풀·방동사니·알방동사니·바람하늘지기·마디꽃, 바랭이·뚝새풀·돌피·강아지풀·쇠비름·반하·갈퀴덩굴·명아주....,


사람들은 많은 들꽃들을 잡초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잡초가 따로 없다. 사람들이 그저 자신들이 사랑하지 않는 풀들을 잡초라고 뽑아버린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작물만을 위하여 많은 다른 풀들을 뽑아버린다. 그런 사람들의 폭력성은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생명들을 대하는 면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세상은 인간들만의 세상이 아니다. 다른 모든 생명들과 함께 살아가야할 우리들의 공유재산이라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 우리 인간들은 먼저 욕심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콩밭짓거리를 아시나요? 건국전쟁을 아시나요? 이승만을 아시나요? 권력욕과 희생정신을 아시나요? 염천을 아시나요? 놀란흙을 아시냐요? 내가 좋아하는 텃밭을 아시나요? 잔디 마당보다 더 좋은 텃밭을 아시나요? 

날마다 차려내는 자연의 식탁을 아시나요? 꽃대 올라오는 봄날을 아시나요? 환하게 배부른 아침을 아시나요? 


파리·딱정벌레·매미·날도래·하루살이·벌·잠자리를 먹고 사는 제비를 아시나요? 이제 곧 제비가 올 것만 같습니다. 파리 닥정벌레 매미 날도래 하루살이 잠자리를 먹으려고 돌아오는 강남 제비를 아시나요?



https://youtu.be/YcntT4ZYrrQ?si=Wl5ZjZ4N_u4o4Vsd


https://brunch.co.kr/@yeardo/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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