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남자 목욕탕은 저쪽인데요?

by 연두

작고 까맣던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죽순 자라듯 키가 쑤욱 커버렸다. 갑자기 커버린 아이는 불쑥 자란 몸이 낯설어도 여전히 활동적이고 긍정적인 아이였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맞춘 교복 치마가 어색하고 학교 교칙에 따라 짧게 자른 머리 때문에 뒤통수가 허전하긴 했지만 점차 여학생들만의 공간인 그곳 분위기에 익숙해지던 때, 누군가가 그런다.

“너 뒷모습이 남자애 같아. 이번 수학여행에 패션쇼 같이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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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활발하고 집안에 남자애들이 많아 거칠게 놀아 ‘덜렁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긴 했어도, 남자애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없는데 여고생들 사이에서 키 크고 머리 짧고 까만 내 모습은 영락없는 총각 모습 인가보다. 80년대 유행하는 팝송을 배경음악으로 소위 잘 나가는 언니들이 패션모델처럼 워킹을 하면, 나는 그저 잠자리모양의 라이방(선글라스보다는 훨씬 구체적인 표현 일 것 같다)을 쓰고는 나무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역할을 다하는 쉬운 퍼포먼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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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팀은 나를 신식병기 다루듯, 비밀리에 보자기를 씌워가며 보안유지에 힘을 쓰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본인도 알 수 없는 행사에 그렇게 마루타처럼 이리저리 끌려가다 수학여행의 피날레로 등장하게 되었다. 하얀 바지에 머플러를 휘날리며 등장하는 내 모습에 모여 있던 여고1학년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바닥을 구르며 도대체 어느 학교에서 공수한 남학생이냐고 신상 털기에 나섰다. 정작 아이들의 반응에 놀란 건 작고 까맣다고 생각했던 꼬맹이 나였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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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파악을 하지 못한 건 그날만이 아니었다. 여고생의 감성이 그리 하듯, 말랑말랑한 내 순수감성은 어느 순간부터 엄마에게 몸매를 감추고자 홀로 덜렁거리며 수건과 비누를 챙겨 들고 대중목욕탕으로 향한다. 누가 볼세라 얼른 계산을 하고 여탕으로 입장하려는데 다급하게 뒤에서 부른다.

“저기요, 남탕은 저쪽이에요!”

시쳇말로 헐이다. 내 모습이 어떻다고 남탕을 운운하는 건지, 이해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여행 이후의 내 학교생활은 온갖 동급생들의 홍안을 띈 촉촉한 눈길에 무너지고 있었다. 책상 위엔 핑크빛 편지봉투와 쪽지들이 나도 모르는 새 놓여있고, 함께 다니는 친구들은 본의 아니게 동급생들에게 눈총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때 내게 종이학을 접어 선물한 친구는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면,

“내가, 미쳤지.”

라며 박장대소를 하지만, 그 당시 나로서는 내가 미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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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졸업 후, 내가 연애나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걱정과 고민이 많았지만 여전히 활발한 성격의 내 모습은, 은근히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색깔 있는 여자로 눈에 띄게 되었다. 콤플렉스로 갖고 있었다면 나는 아직도 그곳에 매어 헤어 나오지 못했을 수 있을 정도의 성 정체성 불안. 그런 특별한 경험과 고민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려 깊은 아이로 만들어 주었다.


내가 좋다고 내 감정을 표현하기 이전에 상대방의 처지와 상황을 잠깐만 고려해 보는 역지사지의 마음가짐, 그건 ‘삼인행 필 유아사’라는 옛 문구를 잊지 않으려 하는 내 생활철학과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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