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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인 Mar 13. 2020

이별, 그리고 시작!

부모님은 언니와 나를 보고 잘 살라며, 우리 곁을 떠났다.



 엄마 아빠는 이제 안흥으로 갈 거야.



 코 끝에 겨울의 찬 기운이 조금씩 느껴져 오는 12월의 어느 날, 아빠는 거실 탁자에 온 식구를 모아 앉히고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아빠가 오랜 해외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한국에 돌아오신 이후, 정확히 1년 만의 일이었다.

 


 

 언니랑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고등학생도 중학생도 아닌 어린 꼬마 시절부터 부모님은 말했다. 마치 이번 여름휴가에 가까운 곳 어딘가로 여행을 떠날 거라는 듯 가볍게,


"너희들 커서 스무 살 되면 엄마 아빠는 떠날 거야. 딱 스무 살까지 만이야."


 이 말을 매년 한두 번,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돌림노래처럼 듣고 자란 꼬마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키도 쑥쑥 자라, 외관상으로는 제법 어른의 태를 갖추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는 아이가 어른이 된 이후에도 경제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는 '캥거루 족'이 늘어나는 추세였으나, 우리 집에는 그 세계적인 트렌드가 발 디딜 틈이 애초에 없었다.

 

 해마다 들어왔던 말이기에 나중에는, 부모님이

"이 녀석들, 스무 살만 돼 봐라-" 까지만 말해도

"아, 우리 스무 살 되면 엄마 아빠 떠날 거라고? 어디로? 아이고 어떡하나, 나는 꼭 붙어 살 건데?"

웃으며 장난치듯 말을 받아치기에 이르렀다.


 '스무 살은 독립', 너무도 당연한 등식이라고 생각하며 스무 살을 맞이했으나, 두려울 건 없었다. 나보다 먼저 스무 살이 되었던 언니가 아직 나랑 같이,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역시 장난으로 하신 말씀이었구나, 우리를 독립적으로 키우고 싶으셨구나,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두 자매는 세계적인 트렌드에 따라 부모에게 캥거루처럼 딱 붙은 채 전 세계 청년들과 발을 맞춰 걸었고, 부모의 능력으로 대학 졸업까지 무사히 마친 그 시점에, 듣게 된 것이다. "엄마 아빠는 이제 안흥..." 어느 날, 갑자기, '안흥'이라는 두 글자가 내 귀로 흘러 들어왔다.


"안흥? 찐빵? 그게(안흥) 어디에 있는데?"

물으니, '말로만 들었던 그 안흥 찐빵'이 횡성에 있단다.

"횡성? 한우? 그건(횡성) 또 어디에 있는데?"

"강원도."

 아하 그렇구나. 그랬구나. 횡성은 강원도에, 안흥은 횡성에 있었구나.

 

 위치를 듣고 나니, 이제 언니랑 나는 어디에서 먹고살아야 하는지 걱정이 된다.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지금 우리, 사는 여기,  집은 그대로 두는 거지?"

"아니지.  집은 팔고 가는 거지." 

 당연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빠 옆에 앉은 엄마는 아무런 말이 없다. 입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엄마도 아빠를 말릴 수 없었다는 듯한 표정을 우리에게 지어 보인다.

 



 30년 하고도 6개월. 쉼 없이 달려왔던 회사 생활 끝에 아빠가 얻은 것은, 끊이지 않는 찌르는 듯한 편두통 그리고 몸 안에 작은 돌 하나.

 우리가 한국에서 보내는 다양한 종류의 편두통 약은, 슬프게도 아빠에게 큰 효과가 없었다. 좀 더 명확한 검진을 받아 보기 위해 잠시 한국에 들어왔던 아빠는, 몸속 어딘가에 자그마한 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일을 잠정적으로 쉬어 가기로, 당분간 한국에 머물기로 했다.

 일을 쉬는 동안 집에는 며칠간 어색한 나날이 이어졌다. 한국에 계실 때면 내가 눈을 뜰 때쯤 이미 출근하시고 없던 아빠가, 보통은 해외에 계시느라 몇 달씩 얼굴 한 번 못 보고 하루에 전화 한 번으로 만족해야 했던 아빠가, 맨날 집에 있었다. 처음 한 달은 문자 그대로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셨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11시 취침, 5시 반 기상은 변하지 않는 진리인 양, 여전한 채로.

 

 아빠가 집에 계신 나날들이 익숙해질 때 쯔음이었을까. 지금 아니면 언제 또 강의를 듣겠냐며, 쉬는 겸사겸사 농수산물무역진흥센터(AT센터)에서 진행하는 귀농 프로그램을 신청해 강의를 들으러 양재와 수원을 바삐 오가셨다. 아빠가 은퇴할 나이쯤, 짧으면 10년 길면 15년 이후의 노후 대비를 위한 강의였다. 그저 먼 훗날의 일일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안흥이라니.

 



 부모님이 언젠가 시골로 가리라는 건 짐작했던 일이다. 우리 자매가 스무 살이 되면 어디 산 구석으로 들어가서 둘이 알콩달콩 살 거라고 심심찮게 말하셨으니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두 분이 중국 남부에 위치한 덥고 습한 도시, 심천(深圳)에 사실 때였다. 매주 주말이면 버스로 한 시간을 가야 나오는 산으로 둘이 등산을 간다고 일상을 전해 주셨었다. 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에는 드넓은 딸기 밭이 있는데, 그 밭에서 딸기 따기 체험을 할 수 있어서 매번 산에 갈 때마다 딸기를 각자 한 바구니씩 따서 들고 오는 게 행복이자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 그냥도 사 먹을 수 있지만 직접 따서 먹으니 더 맛있다고 하면서.

 그뿐이랴. 엄마의 고향, 전라북도 무주에 갈 때면 두 분은 홀연히 사라져서는 몇 시간이 지나서야 등장하곤 했다. 집에 돌아온 부모님의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는데, 동네 뒷산에 올라 고사리를 한 움큼 따왔다고 꽃다발처럼 모아서 보여주는 그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아빠의 고향, 강원도 영월로 성묘를 갔던 어떤 날엔, 깊은 산속에서 두 분이 신나게 둥굴레를 캐왔다. 직접 땅 속에서 캐낸 둥굴레로 차를 만들겠다며, 그 많은 양을 씻고 다듬고 볶고 무척이나 힘든 과정을 여러 번 반복했는데 애걔- 정작 먹을 수 있는 양은 조금밖에 안 돼서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게 또 재미가 있었더란다.




 아빠의 다소 충격적인 통보를 듣고 머릿속엔 크고 작은 물음표가 연달아 떠다녔지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며 서서히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모님은 귀농 결정을 내린 지 두 달만에 수원의 집을 처분했다. 부모님이 각자의 고향을 떠나 둘이 처음 만난 그곳, 수원은 그들과 내가 20년 넘게 정 붙이고 살아왔던 동네였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다는 말을 이때 몸소 체감했다. 부동산에 시세에 맞춰 아파트를 내놓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횡성에 땅을 사고, 이사 업체와 계약을 하고, 평생 간직할 것처럼 쌓아두었던 물건들을 버리고, 새로 필요한 물건을 사들이고, 이사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한우와 찐빵의 본고장으로, 언니와 날 보고 잘 살라며 우리 곁을 떠났다. 그렇게 부모님의 횡성 살이가, 두 자매의 횡성과 서울을 오가는 삶이 시작되었다.

 

 


가을, 집 앞 풍경. 우리 마을 은행나무의 마지막 잎이 떨어지기 전.


"나는 호빵이 좋지 찐빵은 싫은데-" 툴툴대던 나는, 현재 해발 600미터 산속 횡성군 안흥면 어딘가에서 여유롭게 앉아 과거를 회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부모님이 계신 횡성과 서울을 오간 지 어느덧 4년이 되었다.




시골과 도시를 오가는 삶,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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