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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인 Mar 30. 2020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해?"

좋아하는 계절에 관하여.

 

 

 나와 마주 앉은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하는지 가볍게 묻는다.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해?



 대답은 보통 둘로 나뉜다.

 첫 번째, "아, 여름!" 질문에 대답만 하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사람.

 두 번째, 뜬금없는 질문에도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계절의 좋고 싫음에 관하여 상세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나는 봄! 봄 좋아해. 나무에서 잎이 막 연두색으로 피어날 때랑 꽃이 필 때, 참 예뻐. 밖에 놀러 다니기 좋은 날씨이기도 하고.", "가을이 좋아. 여름은 딱 질색이야. 봄은 여름이 다가와서 싫은데, 가을은 여름이 사라지는 느낌이라 좋아해."라고 친절하게 이유도 덧붙여 준다. 이런 사람과 함께라면 앞으로 어떤 주제로든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풍경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에게 풍경이란 파란 하늘이든 노을이든 꽃이든 상관없이 그저 배경에 불과하다. "하늘이야 뭐 맨날 떠 있는데 뭐가 그렇게 대수야. 하늘 보고 감탄할 시간도 있고 넌 참 속도 편하다.", "저걸 보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냥 나무가 저기 있구나 싶은데."라고 말하는 사람. 이런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내가 너무 감상적인가? 나만 유별난가? 나, 아무래도 좀 이상한가?' 하며 나를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아름다운 걸 같이 느끼고 싶었을 뿐인데, 마음이 이내 지쳐버린다. 입을 꾹 다문다.

 

 모름지기 좋은 것은 함께 나누면 더 커지는 법. "우와- 그러게. 정말 멋지다." 라며 내가 본 풍경을 멋지다고 말해줄 때면, 그 대상에 애정이 샘솟는다. 그 말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그 사람이, 그날이, 추억으로 기억된다.






 한겨울에 태어난 탓일까. 한여름만 제외하면 다른 계절도 각각의 이유로 좋아한다. 그래도 좋아하는 계절을 하나만 고르라면 단연코 겨울이다. 추위도 심하게 타면서, 눈이 올 때면 밖에 나가 눈을 맞고 싶다. 진눈깨비나 우박만 아니라면 우산도 두고 밖으로 부랴부랴 나간다. 어쩌다 속눈썹에 내려앉은 눈의 감촉도 시원하다. 흩날리는 눈송이를 잡아 보기도 하고, 그저 멍하니 눈 내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기도 한다.

 

 눈이 오면 하늘을 향해 속으로 외친다. '더 펑! 펑! 와라!' 이 말을 듣는 누군가는 저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눈이 와서 길이 막히는 것마저도 좋다. 눈이 오는 날에만 겪을 수 있는 귀찮음이다. (눈이 펑펑 오는 날이면 저를 의심하세요. 하루 종일 '더 와라, 계속 와라, 쌓여라.' 주문 외우고 있거든.)


 연말, 연초의 그 오묘한 분위기도 좋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 코와 귀가 빨갛게 얼고 손도 시리지만, 가족과 연인과 함께하는 그때만 느낄 수 있는 따스한 분위기가 있다. 새빨갛고 달달한 딸기와 손끝이 노랗게 변할 때까지 까먹는 상큼한 귤도 좋다. 겨울에만 입을 수 있는 기모 후드티도, 커다랗고 포근한 니트도, 단정한 코트에 맞춰 신는 투박한 워커도 애정 한다. 겨울이 좋은 이유는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눈썰매장, 스키장, 전기장판, 담요, 목도리, 수면양말, 손난로, (찐빵 말고) 호빵, …….





 

 겨울이면 눈이 오기를, 아니, 눈이 펑! 펑! 오기를 바랐던 나에게, 횡성에 집이 생겼다. 횡성은 "강원 영동 영서 산간 지역에는 대설주의보가..."의 그곳, 영서 지방이다. 영동 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눈이 덜 오지만, 아무래도 산 중턱에 구름이 걸리기 때문인지 눈이 툭하면 온다.


 심지어 같은 횡성 내에서도 다르다. 횡성 읍내와 우리 마을의 기온은 보통 5도 정도 차이가 난다. 커다란 마트가 있고, 버스 터미널과 SRT역이 있는 횡성 읍내는 여타 지역과 비슷하게 대체로 겨울에도 눈이 잘 오지 않는다. 횡성 읍내에서 차로 30분, 산을 따라 구불구불한 1차선 길을 가다 보면 나오는 작은 마을에, 우리 집이 있다. 안흥 찐빵마을로 이사 온 첫 해에는 눈이 참 많이 왔다. 자고 일어나 밖에 나가 보면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마을 이웃 분이 우리 집 앞을 지나가며 이야기하신다. "어떡하나, 눈이 좀 왔네. 앞으로 더 올 거야. 허허허, 아직 봄 오려면 멀었어." 2월 중순이었다.

 

 횡성에서 사계절을 모두 겪어보고, 가족들이 모여 횡성의 계절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통상 3개월씩 12월~2월을 겨울, 3월~5월을 봄, 6월~8월을 여름, 9월~11월을 가을로 나누는 사계절과 다르게, 우리가 정의한 횡성의 사계절은 이러하다. 5월~6월은 봄, 7월~8월은 여름, 9월~10월은 가을, 11월~4월은 겨울. 물론 우리가 나눈 6개월의 겨울 중 11월과 4월은 다른 달에 비해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그래도 매 11월 4월이면 눈이 오고, 여전히 패딩을 옷장 속으로 집어넣을 수 없기에, 겨울로 치기로 했다.






  횡성으로 이사 오게 되면서 예전보다 '자연' 그 자체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전봇대에, 전깃줄에, 높은 건물에, 미세먼지에 가려져 있던 하늘에서 벗어나, 그곳에만 가면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드넓은 하늘을 볼 수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낯설기 만한 서울에서 내내 지내다, 이따금 횡성에 갈 때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창문 밖 풍경 그리고 우리 집에 다녀간 고양이 손님의 흔적.



 한 달에 한 번 횡성에 가는 날과, 눈이 많이 오는 날이 우연히 겹치면 그만한 행운이 또 없다. 횡성에서 보내는 어느 날 아침, 아직 사람 발자국 하나 없는 새하얀 도로 위에 고양이 발자국이 폭, 폭, 폭, 폭, 찍혀있다. '요 녀석, 앞집에서 나와서 우리 집에 잠깐 들렀다가 산으로 올라갔구나?' 고양이가 걸어온 경로를 짐작해본다. 겨울과 눈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에게 이곳의 겨울은 천국인 셈이다.


 집 앞에 쌓인 눈을 뭉치고 굴려 엄마 키 만한 눈사람을 만든다. 저장고에 넣어둔 당근을 꺼내와 코에 꽂고, 돌멩이 두 개와 나뭇가지를 주워 눈과 팔을 만들어준다. 한 번 만든 눈 사람은 그늘에 두면, 봄의 냄새가 나기 전까지는 웬만해서 녹지 않는다. 어렸을 적 아파트에서 만들었던 눈사람은, 몇 시간만 지나도 누군가가 짓밟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사라졌었는데.



우리의 눈썰매 코스.



 기다란 눈썰매 끈을 손에 쥐고 눈썰매를 질질 끌며 저벅저벅 산에 오른다. 이곳으로 이사 온 첫 해, 눈이 오는 모습을 보고 연두색 눈썰매 두 개를 바로 구매했다. 현관문에서 나가 왼쪽으로 10미터만 걸어가면 산으로 올라갈 수 있다. 평소에는 걸어서 오르내렸던 길을, 눈썰매를 타고 10초 만에 쏜살같이 내려온다. 또다시 올라간다.


 바람이 불지 않아 포르르 포르르 직선으로 내리는 커다란 눈송이, 눈이 소복이 쌓인 나무들, 사방으로 나를 빙글빙글 둘러싼 설산, 장난감처럼 내려다 보이는 하얀 마을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나 혼자 보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면, 두툼한 패딩 속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어 보낸다. 우리 같이 이 풍경을 보면 좋겠다는 마음도 함께 담아서.




시골과 도시를 오가는 삶,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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