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다육이 그리고 나의 첫 나무.
기억에 남는 교수님이 한 분 있다. 이름은 마케팅이지만 실은 통계를 배우는, 마케팅 조사론의 첫 수업 시간이었다. 첫 수업은 어떤 강의든 으레 간단한 오리엔테이션만 진행하고 일찍 끝나곤 했는데, 교수님 말씀을 들어보니 수업은 일찍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설문조사를 통해 얻은 자료를 분석해 가설을 검증하고, 실험 결과가 유의미한지 여부를 판단할 거예요. 이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대상을 연구할지 그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에요."
다들 순응하고 노트를 펼쳐 든다.
"그래서 제 취미가 초점 맞추기, 사진 찍기입니다. 제가 좀 사진을 잘 찍거든요."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며 책상을 바라보던 학생들의 눈빛이 교단을 향한다. 교수님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아, 물론 모든 사진을 다 잘 찍는 건 아니에요. 저는 제 아내 사진을 잘 찍습니다. 대상을 좋아해서 계속해서 바라보면요, 그 마음이 사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에요."
한때 내 취미는 홈 가드닝이었다. 친구들은 새로운 취미에 빠져든 나에게, 집에 꿀을 발라놨느냐고, 왜 자꾸 집에 가냐고 보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오기 시작하면 식물을 볼 수가 없다. 해가 지기 전까지만 가능한 일이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서 베란다에 앉아 식물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한두 시간은 훌쩍 흘렀다. 가족들이 베란다로 모여하는 "새로 잎 난 거 봤어?", "걔 요즘 참 예쁘더라." 등의 식물 토크는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가족들의 식물 사랑은, 엄마가 지인에게서 얻어온 다육이 잎 하나로 시작됐다. 잎을 떼어냈는데 시들지 않고, 오히려 떼어낸 잎에서 뿌리가 자랐다. 잎을 흙 위에 올려 물을 주고 몇 주만 지나면, 뿌리를 내리고 새로 자라난다니. 정작 나 자신은 왜 사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얘들은 이렇게 살겠다고 난리였다.
식물은 살아 있는 존재라, 예쁜 말을 해주고 사랑을 주면 더 잘 자란다고 한다. 나쁜 말을 듣거나 방치되면 병든다고 했다. 식물이 말을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부터는, 예쁘다 예쁘다 말해주고 아픈 곳은 없는지 매일 살폈다. 시든 잎은 떼어내고, 미처 떼어내기도 전에 떨어진 잎은 주워서 정리한다. 분갈이 때가 된 식물은 큰 화분으로 옮겨 심는다. 물을 줄 때가 된 식물들은 모아서 화분 아래로 물이 빠져나올 때까지 물을 충분히 준다.
새 잎이 연두색이라서, 일 년 만에 힘겹게 꽃대를 틔운 아이가 예뻐서, 한참 사진을 찍는다. 나는 음식 사진을 찍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지만 식물 사진은 잘 찍는다, 좋아하니까. 문득 교수님의 말을 떠올려본다. 그 말이 맞았다. 내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그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려고 노력을 하니, 사진에서도 애정이 드러났다. 친구들이 각자의 계정에 음식 사진을 올릴 때 난 식물 사진들을 한 가득 올렸다. 애가 감성이 아줌마라고 놀림을 들어도 꿋꿋했다, 좋아하니까. 꽃이 핀 기념으로 한 장, 분갈이 한 기념으로 또 한 장, 꽃시장에서 새로 사 온 식물 또 또 한 장.
횡성으로 이사 갈 쯤에는 100개도 넘는 화분이 베란다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사 갈 때에 우리는 마치 귀중품을 옮기듯 식물들을 직접 날랐다. 하지만 애지중지 키웠던 우리의 친구들은 추운 횡성으로 이사를 간 이후 10개 남짓을 제외하고 모두 차갑게 얼어 죽었다. 따뜻한 곳에서 자란 식물들은 베란다를 벗어나 노지에서 겨울을 날 수 없었다.
다육이에 대한 상실감은 몇 년이 흘러 어느 정도 치유되었다. 이제는 산이나 밭에 씨앗을 뿌리고 모종이나 나무를 심는다. 횡성에는 봄이면 나무 시장이 열린다. 그곳에서 처음 구매한 나무는 주목나무였다. 드림 컴스 트루. 어릴 적 봤던 영화 속 주인공은 눈 내린 '진짜' 트리 나무를 꾸미고 있었다. 나란 사람은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진짜 트리 꾸미기를 여전히 꿈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주목나무는 잎이 뾰족한 침엽수로 사계절 잎이 푸르러 트리 나무로 제격이다. 트리트리 노래를 불렀는데 정말 현실이 됐다.
많은 친구들을 잃었지만, 그 이후로 키우게 된 주목 나무가 있고, 매실나무가 있고, 블루베리 나무가 있다. 추운 날씨 탓에 열매를 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야망을 품고 사과, 복숭아, 자두, 포도 등 과일나무도 심었다. 비싼 화분은 이제 더는 필요 없다. 밖으로 나가 적당한 자리를 찾아 심으면 그만이다.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횡성의 나무와 꽃을 기대한다. 서울에는 벚꽃이 진 지 2주가 넘었는데, 횡성에는 이제 막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집으로 가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 예쁘다 예쁘다 말해주고 사진으로도 그 모습을 담아둘 것이다, 좋아하니까.
시골과 도시를 오가는 삶, 네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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