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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Oct 16. 2023

화란

고향의 배신이라는 역설과 암울


김창훈 감독의 영화 <화란>은 아쉽다. 비슷한 성장 과정을 공유하고 있는 두 주인공들이 끝내 서로 다른 길을 걸어 나가는 지점을 그려내는 누아르 장르의 영화이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떨어져 가는 정교함은 작품에 대한 감상을 기대에서 아쉬움으로 변하도록 만든다. 만약 김창훈 감독이 차기작을 촬영할 기회를 얻게 된다면, 데뷔작에서의 실수들을 교훈 삼아 정교함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들었던 요소가 한 가지 있다. 주인공들이 나고 자란 땅, 고향에 대한 감독의 시선이었다. 김창훈 감독은 고향을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지옥도이자 떠나야만 하는 곳으로 묘사한다. 오랜 시간 동안 조상 대대로 같은 땅에서 살아온, 일명 토박이라고 불리는 나에게 있어 이처럼 '고향은 곧 지옥'이라는 시선을 견지하는 감독의 모습은 신기하게 다가왔다. 나는 고향을 감독과는 정반대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화란>을 인상적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아쉬움

내가 고향을 바라보는 김창훈 감독의 시선에서 느꼈던 신기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영화 <화란>의 전체적인 아쉬움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화란>의 두 주인공 연규와 치건은 같은 동네에서 아버지라는 존재에게서 당한 학대와 방치 속에서 자라왔다는, 비슷한 성장 과정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가까워진다. 치건은 연규를 다른 조직원들보다도 가까이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연규는 그런 치건을 조금씩 따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은 대체적으로 준수하다. 치건이 낚시터에서 연규에게 자신의 과거를 일일이 설명해 주는 장면에서는 감독이 관객에게 치건의 과거사를 강제로 주입하는 듯한 감상이 들어 아쉬웠지만, 이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삐걱거림은 존재했을지언정 꽤 괜찮은 관계의 빌드업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아쉬움은 후반에서 나타난다. 감독은 약간의 삐걱거림과 함께 연규와 치건의 관계를 임계점까지 끌고 가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관계의 폭발은 시시하게 끝나버린다.

 

개인적으로 영화에 대한 평가는 후반과 엔딩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화란>이 아쉬워진 이유는 후반에 일어나는 관계의 폭발에 있다. 영화는 연규가 국회의원 후보를 살해하려는 장면부터 후반으로 돌입한다. 그러나, 감독은 여기서부터 정교함을 잃어버린다. 연규의 오토바이를 고장 낸 사람을 모호하게 연출하면서도 확정을 짓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했는데, 모호하게만 연출해 버린 것이다. 물론, 연규의 오토바이를 고장 낸 사람에 대한 정체가 암시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결국, 이로 인해 관객은 끝없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심리 영화이자 갱스터 영화인 <화란>을 그저 전자의 모습으로만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연규의 오토바이를 고장 낸 사람이 모호하게 연출된 이상, 관객은 연규의 임무 실패를 두고 벌어지는 갱스터 내부의 암투 같은 장르적 요소를 놓치게 된다. 그렇다면, 관객에게 남는 것은 연규의 불안한 심리뿐이다. 하지만, 갱스터 장르와 공명하며 연출되었어야 했을 심리가 상대를 잃었으니, 갈 곳은 없다.

 

<화란>은 레퍼런스를 딛고 새로워지고 싶었던 영화이다. 하지만, 삐걱거림과 함께 도달한 임계점에서 시시하게 끝나버린 폭발은, 새로움의 시도들을 부질없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새로움의 시도였던 불안한 심리와 갱스터 장르는, 서로 공명하며 현세에 도래한 지옥도를 화면 속에 형상화해야 했다. 하지만, 후반부터 사라져 버린 정교함은 갱스터 장르의 긴장감을 조금씩 실종시키기 시작했고, 홀로 남은 불안한 심리는 공명의 상대를 잃은 채 방황하기 시작했다. 끝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되어야 했을, 연규와 치건이 벌인 마지막 사투의 의미는 퇴색되고 말았다. 연규는 지옥을 떠나려 하고, 치건은 지옥에서 눈을 돌리려 한다. 하지만, 방황하는 불안한 심리는 그 사실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의 마지막 인간성과 정은 의미불명과 함께 사라졌고, 양익준 감독의 영화 <똥파리>의 레퍼런스만이 화면 속에 남아 엔딩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는, 끝내 김창훈 감독은 자신의 영화 <화란>에 새로움을 깃들게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신기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란>은 인상적인 신기함을 느끼게 만드는 영화이다. 그 신기함은 고향을 바라보는 김창훈 감독의 시선에서 온다. 김창훈 감독은 영화 <화란>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고향을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지옥도로 바라본다. 피터 손 감독의 영화 <엘리멘탈>의 리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살고 있을 만큼 타향살이가 흔한 현대 대한민국에서, 나는 흔치 않은 토박이로 살고 있다. 그런 만큼, 고향에 대한 애정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각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농담 삼아 장래희망을 고향의 시장이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으니까. 그런 나에게 <화란>과 김창훈 감독의 시선은 신기했다. '고향을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연규와 치건, 두 사람이 자신의 고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집중했고, 알아낼 수 있었다. 연규와 치건, 두 사람은 자신의 고향을 지옥으로 생각하지만, 연규는 어떻게든 떠나려 하고, 치건은 어떻게든 순응하려 한다는 사실을.

 

연규는 갱스터의 세계로 발을 들였음에도, 어떻게든 돈을 모아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고향을 떠나서 희망이 존재하리라고 믿는 네덜란드(한자어로 화란)로 향하고자 한다. 그러나, 치건은 애초에 어디에도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갱스터로 발을 들인 후 그대로 지옥에 순응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단 고향에는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고향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저 오래 살아왔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모든 것이 고향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홀로, 때로는 함께 쌓아온 지금까지의 추억들과, 영원히 함께할 소중한 사람들은 전부 고향이 있었기에 쌓아올 수 있었고, 만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고향을 사랑한다. 나는 고향을 배신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화란>은 그 생각을 뒤집으며 질문한다. '고향이 당신을 배신한다면?'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나의 고향이 나를 보듬어주지 않고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위기로 내몰아버린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도 모르겠다.

 

<화란>은 이 질문을 통해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암울함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고향을 '희망이 뿌리내려 언젠가 결실을 맺어야 할 희망의 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화란>에서의 고향은 '희망의 씨앗조차 뿌릴 수 없는, 뿌려져도 결코 건강하게 자라날 수 없는 절망의 땅'으로 그려진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만한 역설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응당 희망적이어야 할 땅이 절망적으로 그려지는 역설의 순간,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는다. 떠날 것인가, 버틸 것인가. 치건은 버틴다. 버티고 버틴 끝에, 결국 절망 앞에서 눈을 돌린 채 다른 세상으로 떠나가 버린다. 연규는 떠난다. 절망만이 남은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깨닫고, 희망을 찾아서 떠난다. 하지만, 여기서 진정한 암울함이 드러난다. 존재유무조차 알지 못하는 희망을 찾아서 나고 자란 땅을 떠나야 한다는 것만큼 암울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를 대변이라도 하듯, 작중에서 항상 희망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화란은, 끝까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총평

김창훈 감독의 영화 <화란>은 삐걱거리기는 해도 비슷한 성장 과정을 공유하는 두 주인공들의 관계를 원하는 임계점까지 도달시키는 데에 성공하지만, 정작 폭발은 시시하다는 점에서 아쉬운 작품이다. 결국, 양익준 감독의 영화 <똥파리>의 레퍼런스만이 남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새로워질 수 없다. 그럼에도 고향에 대한 시선만은 인상적이었다. 조상 대대로 같은 땅에서 살아온 입장에서, 나는 나의 모든 것이 담긴 고향을 배신할 수 없다. 하지만, 고향이 나를 배신한다면, 상황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 지점을 파악한 순간, <화란>은 다르게 보였다. 응당 희망이 뿌리내려야 할 땅에 씨앗조차 뿌릴 수 없게 된 역설의 순간, 존재유무조차 알지 못하는 희망을 찾아서 나고 자란 땅을 떠나야 하는 암울함을 나는 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화란>을 몇 군데 나사가 빠진 작품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이자 신기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토박이라는 출신으로 항상 고정적인 시선에서 바라보았던 고향을, 다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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