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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가레보시 Jun 23. 2024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

최고의 경의란 무엇인가


소라 네오 감독의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감상하면서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위대한 예술가를 향하여 표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는, 예술을 형식을 통하여 표하는 경의인 것이라고. 소라 네오 감독은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연주를 영화 예술의 총체인 카메라 안에 담아 영화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자신의 아버지이자 위대한 예술가인 그를 향하여 제의를 올리고, 끝내 경의를 표한다. 토에이 애니메이션과 코가 고 감독의 영화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죽어가던 일본의 요괴 문화를 되살린 만화 <게게게의 키타로>를 향한 애정을 담아 그려진 작품이라고 이야기하거나, 과거의 일본이 추구했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향한 날선 비판을 그려낸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확신을 담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앞서 거론된 모든 것을 포괄하여 그려낸 위대한 예술가, 미즈키 시게루를 향한 경의의 영화일 것이라고.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분인 태평양 전쟁의 남방전선에서 왼팔을 잃은 채 살아돌아온 군인이었다. 이후 미즈키 시게루의 삶은 만화라는 예술을 통하여 전쟁의 기억을 되돌아보며  끝내 그것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하여 설파해내는 것이 되었다. 만화 <게게게의 키타로>는 그러한 미즈키 시게루의, 예술가로서의 삶의 시초에 있는 작품이다. 미즈키 시게루는 <게게게의 키타로>를 통해 인기 만화가의 반열에 오른 다음 <전원 옥쇄하라!> 같은 작품을 펴내는 것으로 일생을 건 설파를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은 이 아름다운 일생에 아름다운 경의를 표한다. 그리하여,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의 예술사는, 생각해보면 만화라는 정지된 화상을 재해석하여 끝내 움직이도록 그려내는 것으로 그 연장선상을 창조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예술의 형식을 통하여 아름답게 존중되기 시작한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은 그 존중을 위하여 미즈키 시게루 예술사의 시작이었던 만화 <게게게의 키타로>의 주인공 ’키타로‘의 기원을 다루는 영화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의 이야기에 미즈키 시게루의 기억과 이를 설파하고자 한 예술가로서의 시작을 녹여내고자 한다. 그 총체는 본 작품의 주인공 ’미즈키‘를 통하여 은유된다. (여기서부터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와 영화의 주인공 ’미즈키‘를 구분하도록 하겠다) 미즈키는 미즈키 시게루처럼 태평양 전쟁의 남방전선에서 살아남아 일본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그러한 미즈키가 상사의 명령을 받고 찾아간 마을 ‘나구라’는 자신이 겪었던 전쟁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권력의 정점에 존재하는 류가 일족과 추종자들의 모습은 마치 일전의 제국과도 같다. 또한, 그들을 따르는 주민들은 신민과도 같으며, ‘M’의 제조를 위하여 희생되는 유령족들의 모습은 피식민지의 은유처럼 다가온다.


심지어, 일족의 일원인 사요와 마을과는 관련없는 외부인들마저 일족의 유지를 위하여 희생된다는 점에서, 제국의 유지를 위하여 전쟁터로 내몰린 일본인들의 모습마저 떠오른다. 결정적으로, 아랫 사람들에게는 명예를 들먹이며 죽음을 강요했지만, 정작 자신은 명예의 결과를 보고할 ‘권위’를 들먹이며 살아남고자 한 전쟁 당시 고위층들의 모습과 자신들의 욕망을 위하여 아랫 사람들을 제물로 삼으면서까지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고자 하는 류가 일족의 모습은 서로 닮아있다. 그들은 과거의 망령들이다. 일전에 손에 쥐어보았던 ’권위‘에 취하여, 그것을 잊지 못하고 과거를 향하여 맹목적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미즈키는 이처럼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형상화한 마을에서 유령족 ‘게게로‘와 만나 비밀을 파헤치는 모험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오버랩 되는 전쟁의 트라우마와, 이와 겹쳐지는 마을의 비밀은 미즈키의 인간성을 일깨우게 된다. 그렇기에 손자와 손녀를, 자신의 혈족마저 유린하면서까지 권위의 정점에 서고자 하는 당주에게 일격을 날리는 것은 게게로가 아니라 미즈키이다. 전쟁이라는 과거로부터 살아남아 현재에 똑바로 서서 광기를 기억하는 미즈키만이, 과거에 사로잡힌 채 그것을 영광이라고 믿으며 재현하고자 미래마저 제물로 바치고자 하는 자를 타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미즈키 시게루의 삶과 예술적 의지에 상응한다. 그리하여, 예술가 미즈키 시게루의 삶과 의지는 애니메이션 예술 속에 의인화된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두고 보면 이 영화는 요괴물이라는 장르와 미즈키 시게루의 일생을 빌려 과거의 체제를 비판하는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탄생의 순간과 그 목도의 순간까지 목격해야만 한다. 물론, 영화는 그 순간까지 우리을 확실하게 초대한다.


현재에 서있는 미즈키와 게게로는 대모험 끝에 과거의 망령들을 물리치고 미래를 구해낸다. 그 순간 속에서 키타로가 탄생한다. 우리는 그 탄생을 목도하는 자가 게게로도, 키타로의 어머니도 아닌 미즈키라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 미즈키가 키타로의 탄생을 목도하는 엔딩을 기점으로 우리는 미즈키와 미즈키 시게루, 두 인물의 차이를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전쟁에서, 그와 다를 바 없는 마을에서 살아남아 키타로라는 미래의 ‘탄생‘을 목도하고 두 팔로 들어올린 미즈키와, 역시 전쟁에서 살아남아 과거를 기억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키타로를 ’탄생‘시킬 펜을 들어올렸던 미즈키 시게루, 두 인물은 애초에 동일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요괴물의 근본에 대한 탐구적 존경과 군국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지나서 끝내 ‘경의’의 영역에 들어선다.


영화 속 키타로 탄생과 현실의 키타로 탄생은 미즈키와 미즈키 시게루, 두 인물의 동화를 통하여 동질성을 띠게 되면서, 또한 그 탄생이 미즈키 시게루라는 예술가의 발자취와 그 시작을 알리는 은유처럼 연출되면서 자연스럽게 미즈키 시게루라는 예술가의 시간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예술 속에 담기게 된다. 나는 이 지점에서 경의를 느낄 수 있었다. 광기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미즈키 시게루의 ‘과거’가, 키타로를 탄생시키며 만화라는 예술에 들어서게 된 미즈키 시게루의 ‘현재’가, 그리하여 예술로서 평화를 호소할 수 있게 될 미즈키 시게루의 ‘미래’가, 영화 속에는 전부 은유되어 있음을, 키타로의 탄생을 목도하는 미즈키의 모습이 담긴 엔딩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순간, 관객마저도 미즈키 시게루라는 예술가에게 저절로 경의를 표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영화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를 극찬할 수밖에 없다. 미즈키 시게루의 삶과 의지가 ‘그려지는’ 것으로 살아 ‘움직이게’ 되면서 탄생하는 순간, 끝내 예술가에게 표하는 최고의 경의, 예술로서의 경의는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총평

영화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는 훌륭함의 세 박자를 지나 경의를 향해 나아가는 명작이라고 할 수 있다. 광기의 마을에서의 모험이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하여 요괴물의 근본으로 다시금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엔터테인먼트의 첫 박자, 장르적인 이야기 속에 숨겨진 체제의 은유와 그 단죄로 이루어지는 비판의 두 박자, 끝내 이들을 전부 융합하면서 전설이 된 탄생으로 이루어지는 포괄의 세 박자. 그 끝에서 느껴질 수밖에 없는 예술적 경의가 이 영화의 최종적인 주제를 결정지으며, 그것은 결국 아름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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