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 2

세상의 끝에서 사랑을 외치다

by 나가레보시


영화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 1>은 독립적인 한 작품으로서 세상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멸망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라는 주제를 SF 장르와 결부 지어 흥미롭게 전개하면서 충분히 재미있는, 독립적인 한 작품으로 거듭났음과 동시에, 세상의 멸망을 확정 짓는 엔딩을 제시하여 후편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 2>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연작 기획의 '파트 1'로서도 맡은 바를 다한,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이를 이어가는 영화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 2>는 세상이 멸망하는 과정을 인간의 시점과 외계인의 시점, 그리고 교차의 시점을 반복하면서 SF 장르를 활용한 날 선 비판과 함께 제시함과 동시에, 끝내 멸망한 세상에서 떠나간 소수의 의로운 사람들의 의지와 이를 이어받아 서로를 절대적으로 사랑하며 살아나가는 존재들을 화면 속에 담아내면서, 멸망한 세상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갈 수 있는 원동력의 존재마저 제시하며 지금까지 이어온 주제를 훌륭하게 관철한다.

이기적인 전체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전편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 1>의 리뷰에서 나는 세상을 멸망시키는 원인으로 각각 전체와 이기의 모습으로 어긋난 사회와 개인의 존재를 제시했다. 후편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 2>는(이하 '데데디디') 이를 이어감과 동시에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끝내 세상을 멸망시키고, 생존자들만을 남긴다. 우리가 이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 주목해야 할 단어는 '노골적'이다. 전체적인 사회와 이기적인 개인은 더욱 노골적으로 어긋난 끝에 최종적으로 이기적인 전체(혹은 집단)가 된다. 저마다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대변하는 집단이 출현하고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혼돈에 빠지고 서서히 멸망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진행될 영화의 내용은 멸망을 멈추고 광기 어린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주인공들의 모습이겠지?' 하지만 당혹스럽게도 그대로 세상은 멸망한다. 물론 멸망을 막아보려는 인물은 존재하지만, 메인 주인공인 카도데와 오란은 그저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이기적인 전체의 모습으로 돌아가보도록 하자. 여전히 사회는 집단적이고, 개인은 이기적이다. 어느새 그들은 이기적인 전체가 되어 다양한, 극단적인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높으신 분들의 집단은 세상의 멸망을 숨기고 자신들만 살아남고자 정보를 통제한 채 몰래 방주를 만들어 띄우고, 밑에서 서서히 광기에 휩싸이며 형성된, 저마다의 입장을 대변하는 집단들은 극단적인 양익으로 나뉘어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나는 이전부터 그런 것이 싫었다. 자신들만이라도 살아남아보고자 주어진 책임을 유기하는 ‘이기적인’ 가짜 귀족들의 가짜 귀족정과, 그 밑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혹은 알고 있으나 철저히 왜곡한 채 극과 극은 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상론자인 자신의 모습에 취할 뿐인 ‘이기적인’ 좌익과 생각하기를 그만둔 채 자신만이 깨어있다고 망상하는 ‘이기적인’ 우익, 이들이 영화 속에서는 결국 일부를 제외한 세상을 멸망시켜 버렸고, 현실에서도 세상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가짜 귀족정도, 그들에게 놀아나는 극단주의도 싫었다.

이는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역사'의 모습으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외계인과 인간은 같은 모습으로 어긋난다. 외계인들 역시 오래전 멸망하기 시작하는 지구를 버리고 도망쳐 다른 행성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인구가 불어나자 높으신 분들의 집단은 행성 인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사실상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모함에 국민들을 태워 이주시키며 자신들의 책임을 유기한다. 아무것도 몰랐던 이주민들은 이윽고 인간들과 대치하기 시작하고, 내부에서도 역시 항복파와 강경파가 생겨나 서로 대립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외계인과 인간이 어긋나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복되는 역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의 선주민이었던 외계인들이 어긋나고, 뒤이어 지구를 차지한 인간 역시 어긋나 버리는 모습은 결국 반복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멸망 역시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결국 이기적인 전체가 주도하는 극단주의가 판치는 이상 멸망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막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세상은 극단주의자들에 의하여 멸망할 것이다. 아니, 멸망한다. 하지만 나 역시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단주의를 실행하며 세상을 멸망으로 이끄는, 책임을 유기하고 도망치는 가짜 귀족정도, 비현실적인 이상론을 설파할 뿐인 좌익과 멍청한 망상론을 설파할 뿐인 우익도 전부 싫다고 이야기하는 나는 정작 가열찬 비판의 말만을 외칠 뿐 무언가 행동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이기적으로 미쳐버린 끝에 책임을 유기하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극단주의자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고는 있지 않은가? 결국 비판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나는 세상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하고 타인을 탓할 뿐인 이기적인 회색인의 집단에 속해있는 것은 아닌가? 영화는 그러한 나를 끝내 구원한다. 좌익의 비현실적인 이상론과 우익의 멍청한 망상론은 써먹을 수 없는, '이기적인' 망언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를 배제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기적이지 않은 이상론과 망상론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

그 해답으로 등장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이상이자 망상이다. 사랑은 모든 인간이 바라는 이상임과 동시에 늘 떠올리는 망상이다. 멸망으로부터 살아남는 주인공들은 바로 그 상징이다. 물론 사랑한다고 해서 전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하며 떠나간 존재는 살아남은 존재에게 사랑을 심어주어 앞으로의 삶의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다. 그렇기에 오란의 오빠 히로시는 사랑하며 떠나가고, 살아남은 카도데와 오란, 오바는 성별을 뛰어넘는 사랑과 진영을 뛰어넘는 사랑을 하며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기에 '데데디디'는 흥미롭다. 세상의 멸망은 확정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염세적임과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면 멸망한 세상이라도 분명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 역시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올바름과 어긋남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올바른 자와 어긋난 자 모두 이상과 망상을 품고 있다. 또한 삶과 죽음의 차이는 그것이 올바르게 지켜지는가 아닌가, 혹은 사랑하고자 할 마음을 품고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나를 사랑하라! 타인을 사랑하라! 모두를 사랑하라! 이상적인 망상이자, 망상적인 이상의 외침이다. 하지만 적어도 허언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란 확실하게 존재하는 위협이라는 현실을 철저히 무시하는 자기 과시적인 공존론도, 현실을 교묘하게 왜곡하고 받아들인 채 이를 긍정하는 자를 깨어있는 자로, 부정하는 자를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는 철 지난 임의적인 구분론도 아니다. 사랑은 모두가 바라지만 모두가 이루어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상적임과 동시에 망상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순수하다. 순수란 태초적이며 시작의 기준이 된다. 그러한 순수야말로 지금의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멸망했거나 멸망하는 중이다. 결국 다시 시작해야 할 때는 왔고, 온다. 그 시작으로서 이상하고 망상적인, 순수한 사랑을 해보자. 손을 뻗어보도록 하자. 영화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 2>는 바로 이 깨달음을 연작 기획의 마무리로서 염세적이지만 동시에 희망적인 이야기로 아름답게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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