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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국 마늘 Jan 07. 2024

선물 주지 마세요

생일날 뭐 하고 싶냐고 남편이 계속 물었다.


'그냥 알아서 준비해 주면 안 되나?'


이제 결혼한 지 6년 차. 로맨틱한 써퍼라이즈를 기대하긴 힘든 걸까. 결혼 후 2~3년간 나름 이런저런 써퍼라이즈를 준비한 남편이었다. 그런데 이젠 생일 이벤트조차 기대하기가 힘들어졌다. 내가 소홀해진 남편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자, 남편이 불쑥 이야기했다.


"2년 전 밸런타인데이 기억나? 내가 식당 예약했는데 자기가 실망해서 엄청 뭐라고 했던 날. 그 이후로 써퍼라이즈 준비 안 하는 거잖아."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당시 남편이 예약한 펍(Pub)의 식사가 정말이지 별로였다. 실망한 나머지, 남편에게 미리 어떤 식당인지도 알아보지 않고 예약했냐고, 툴툴거렸던 것이다.


그때 남편이 많이 속상했구나 싶어 좀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동안의 서운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말했다.


"이번 생일에 미역국 만들어 줘."


남편은 좀 당황하는 듯 보였으나, 곧 알겠다고,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생일날 남편이 만들어 준 미역국


엎드려 절 받기로 받은 미역국이고, 내가 간을 맞춘 미역국이었다. 그래도 한국 음식이라곤 전혀 만들 줄 모르는 남편이 애써 만들었다는 게 기뻤다.




교회에서 만난 티베트 사람인 리샤는 나보다 나이는 10살 정도 어리지만 2살짜리 아들이 있다. 리샤가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아 가까워졌지만, 공통점이 많지는 않았다.


그런 리샤가 얼마 전 티베트에 다녀오면서 기념품을 선물했다. 그때가 때마침 리샤의 생일이었는데 선물을 받고 나니, 그냥 넘어가기가 미안했다. 톡으로 물었다.


'리샤,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거 있어?'


리샤는 양초를 좋아한다고 했다. 양초와 와인 한 병을 선물로 준비했다. 생일 선물로 충분한가 싶었지만, 큰 선물로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리샤가 물었다.


'좋아하는 색깔이 뭐야?'


회색이라고 답하자, 이번엔 리샤가 내 생일 선물로 회색 목도리를 준비했다. 문제는 목도리가 무척 올드해 보인다는 것. 고민 끝에 준비했을 그 선물을 앞에 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년엔 서로의 생일 선물을 같이 고르자고 하던지 해야겠다.'




4년 전쯤으로 기억이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에서 만난 카렌은 당시 외로워하는 나를 알게 모르게 많이 챙겨 주었다. 나도 그런 카렌에게 많이 의지했고, 그런 카렌이 참 좋았다.


그런데 내 생일날, 카렌에게서 카드 한 장이 도착했다. 나름 카렌을 가깝다고 느꼈던 나는 솔직히 실망했다. 작게나마 선물을 받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달 뒤 돌아온 카렌의 생일날, 난 카렌이 좋아하는 커피를 선물로 보냈다. 난 카드만 받았지만, 그렇다고 카드만 보낸다는 게 영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솔직히 난 당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국 사람들이 주고받는 카드 문화가.


'아니, 형식적으로 주고받는 카드가 무슨 소용이람.'


카드 한 장에 몇 천 원 하는데, 차라리 그 돈으로 초콜릿을 하나 사서 주는 게 낫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카렌과 생일날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내가 선물을 보내도, 카렌에게서 이렇다 할 선물을 받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해를 거듭하면서 나 또한 카렌에게 카드만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리샤와 같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깨닫는 부분이 있었다. 선물을 주고받는 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서로 마음이 잘 맞는 친구라면 물론 자연스럽게 선물을 주고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애매한 관계의 친구들이 있다. 그런데 한 번 서로의 기념일을 챙기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챙겨야 할 것 같은 부담이 생긴다. 그것도 상대방에게 받은 것을 계산해, 비슷하거나 그보다 나은 선물을 줘야 할 것 같은 부담.


영국에 온 뒤로, 자연스레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짐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가까운 친구를 사귀려고 애를 써 보았으나 말처럼 쉽지 않았다. 상대에 대한 호의만으로 친밀한 친구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관계는 정체되고 그러다 소멸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 연령을 불구하고, 친밀한 관계가 생기기도 하는데, 나에게는 카렌과의 관계가 그러했다. 카렌은 사실 나에게 엄마뻘 되는 나이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카렌에게서 우편으로 생일 카드를 받았다. 카렌의 세심함에 한 번 더 미소 짓게 되는 그런 카드였다.


이제는 이렇게 매해 내 생일을 잊지 않고 카드를 챙겨 보내 주는 카렌이 고맙다. 서로에게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전달되는, 이 정도의 거리가 참 좋다.




남편에게 생일날, 비싼 선물을 받거나, 레스토랑에 가고 싶은 게 아니다. 나에겐 그보다 미역국 하나 끓여주는 정성이 더 기쁘다. 남편이 내 생일을 생각하며, 뭔가를 애쓰는 모습이 보고 싶다. 내년에는 다른 한국 음식도 만들어 준다고 했는데 진짜 만들어 주려나.


친구들을 사귀고 간혹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돈독히 한다. 하지만 그것이 부담이 되면, 안 하느니만 못한 '행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난 이제 영국 사람들이 주고받는 카드 문화가 이해가 된다. 이제는 누군가의 카드 한 장이 참 마음에 와닿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나도 카렌에게 생일 카드를 준비해 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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