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한우 앞에서
(시)백만 년쯤 잠들었다 깨어나고 싶다
<장흥한우 앞에서>
기다려줘
한 마디 던져놓고
먼 길을 달려 너에게 간다
이 도시 외곽을 빙 둘러 그렇게 먼 길이 있는 걸 처음 알았다
네비를 찍고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익숙한 건물과 거리 풍경이 도로 옆으로 지나간다
아, 익숙하구나
한때 가깝게 지낸 그들이 살던 곳
지금은 멀어진 그들이 살고 있는 곳
멀리,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시냐고
집에 좋은 일 있다고 들었는데 못 가봐 마음에 부담으로 남아있다고
언젠가 좋은 날 얼굴 보자고
그리고 촌분을 다투는 일이라도 되는 냥,
서둘러 급히 그에게 달려간다
도착했다고
천천히 오라고
여기는 장흥한우 앞이라고
문자를 보내고, 기다린다
장흥한우?
지금 갈 테니 거기서 기다리라고
깔끔한 대답이 마음에 든다
5분, 10분, 20분...
이상하다
못 올 일이 생긴 건가?
오다가 마음이 변한 건가?
다시 전화를 한다
여기 장흥한우 앞인데?
나도 장흥한우 앞인데?
거기가 어디쯤?
여기는 강남 마트 앞 장흥한우
여기는 강남 진마트 옆 장흥한우
허걱
오늘은 인연이 아닌가 봐요
다음에 다시 약속 잡읍시다
우리의 인연도 아닌가 봐요
다음 번 인연으로 넘겨봅시다
기다리지 마
왔던 길 되짚어 다시 길을 간다
그들이 사는 익숙한 동네를 지나
그들이 사는 익숙한 길을 지나
먼 길 돌아 집으로 간다
오늘 나는 귀엽게 물이 빠진 청바지에 브라운 깔끔 슈트를 입었다고
오늘 나는 늘 입던 스판 진에 오래되어 낡은 셔츠를 입었다고
너를 만나기 위해 일주일 전부터 기다렸다고
너를 만나기 위해 피곤한 몸 질질 끌고 기다렸다고
아,
오늘 인연이란
내가 정하는 것도 아니고
네가 정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시간 앞에 무력하여 한가로이 흘러갈 뿐이다
어제 익숙한 길을 오늘 낯설게 지나가듯
말없는 달도 무심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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