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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줌 Nov 27. 2021

장흥한우 앞에서

(시)백만 년쯤 잠들었다 깨어나고 싶다


<장흥한우 앞에서>




기다려줘

한 마디 던져놓고

먼 길을 달려 너에게 간다

이 도시 외곽을 빙 둘러 그렇게 먼 길이 있는 걸 처음 알았다

네비를 찍고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익숙한 건물과 거리 풍경이 도로 옆으로 지나간다



아, 익숙하구나

한때 가깝게 지낸 그들이 살던 곳

지금은 멀어진 그들이 살고 있는 곳

멀리,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시냐고

집에 좋은 일 있다고 들었는데 못 가봐 마음에 부담으로 남아있다고

언젠가 좋은 날 얼굴 보자고



그리고 촌분을 다투는 일이라도 되는 냥,

서둘러 급히 그에게 달려간다

도착했다고

천천히 오라고

여기는 장흥한우 앞이라고

문자를 보내고, 기다린다



장흥한우?

지금 갈 테니 거기서 기다리라고

깔끔한 대답이 마음에 든다



5분, 10분, 20분...

이상하다

못 올 일이 생긴 건가?

오다가 마음이 변한 건가?



다시 전화를 한다



여기 장흥한우 앞인데?

나도 장흥한우 앞인데?



거기가 어디쯤?

여기는 강남 마트 앞 장흥한우

여기는 강남 진마트 옆 장흥한우



허걱

오늘은 인연이 아닌가 봐요

다음에 다시 약속 잡읍시다

우리의 인연도 아닌가 봐요

다음 번 인연으로 넘겨봅시다



기다리지 마

왔던 길 되짚어 다시 길을 간다

그들이 사는 익숙한 동네를 지나

그들이 사는 익숙한 길을 지나

먼 길 돌아 집으로 간다



오늘 나는 귀엽게 물이 빠진 청바지에 브라운 깔끔 슈트를 입었다고

오늘 나는 늘 입던 스판 진에 오래되어 낡은 셔츠를 입었다고



너를 만나기 위해 일주일 전부터 기다렸다고

너를 만나기 위해 피곤한 몸 질질 끌고 기다렸다고



아,

오늘 인연이란

내가 정하는 것도 아니고

네가 정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시간 앞에 무력하여 한가로이 흘러갈 뿐이다

어제 익숙한 길을 오늘 낯설게 지나가듯

말없는 달도 무심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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