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에게 마음을 맡긴 내국인들에 대한 이야기
나는 미국에서 정신과 전문의이자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의로 일하고 있다.
비자와 영주권 스폰이 필요한 외국인 노동자 신분이기에
현재는 규정에 따라 의료 낙후 지역 또는 의사 부족 지역으로 지정된 곳에서만 환자 진료를 보고 있다.
내가 미국에 이르게 된 과정은 언젠가 글로 남길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내 20-30대의 대부분의 시간을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되고 싶은 의사가 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의사가 되는데 썼으므로 이 과정을 소개하는 것은 마치 대하소설을 쓰는 일과 같이 여겨진다.
나는 미국에서 일하고자 하는 한국의사들을 위해 매년 작은 세미나를 주최하는데, 그때 한국의사들에게 꼭 해주는 말이 있다. 미국 의사 면허 시험(United States Medical Licensing Examination)을 시작하기 위한 원서를 내고, 총 네 번의 시험을 치르고 좋은 성적으로 합격한 뒤, 의사로서 수련을 받기 위한 원서를 미 전역의 병원에 내고, 서류전형을 통과한 뒤, 미 대륙을 동서남북으로 면접을 다니며 (이때 미국이 얼마나 큰 나라인지 처음으로 절감했다), 결국 원하는 병원의 레지던트 과정에 매치되는 과정은 마치 내가 주인공인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짧게는 1-2년, 길게는 수년 동안 이 과정을 한 번 또는 여러 번 겪으면서 생긴 나만의 고생담들이 하나뿐인 인생 영화로 탄생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힘들고 어렵고 눈물겹고 감동적이며 또 짜릿한 시간들이다. 도전하고 겪어낸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상처 같은 거라고 해도 좋겠다.
미국에서 정신과 레지던트 수련을 받는 동안 제대로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중독이다.
정신과 입원병동에서 일을 시작한 첫 주에 중독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맡았는데, 임신하여 배가 부른 상태에서 마약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여자 환자들을 보면서, '어떻게 임신한 몸으로 마약을 할까?' 라며 감히 내 기준으로 그들의 삶을 잣대질 하고 평가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정신과 전문의로 일한 경험이 있던 나는, 일반 정신과 질환들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마약 중독 환자들을 치료한 경험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한국은 알코올 중독 전문병원들은 부족하나마 조금은 자리 잡고 있지만, 마약중독 치료는 아직 체계적이지 않다. 약물 치료 측면에서만 본다면, 마약 중독을 적절히 치료할 수 있는 보조 치료제들의 국내 사용허가가 되어있지 않아서, 그 약제들로 환자를 치료해 본 경험이 있는 정신과 의사들이 없고, 그러므로 의대생들이나 신입 정신과 의사들을 교육할 수 있는 시스템도 마련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알겠지만, 교과서로만 배운 내용은 실전과는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특히 의료 현장에서는 더욱 그런 법이다.
현재 내가 일하는 병원에 오는 대부분의 환자는 가난 또는 질병으로 인해 국가에서 보조금을 받으며 생활하고 국가에서 지원하는 의료보험 서비스를 받는다. 많은 환자들이 마음 놓고 쉴 집이 없고, 가족들로부터 소외되었으며, 정서적 지지를 받을 친구들이 없고, 직업이 없으며, 만성 통증에 시달리고, 그리고 마약을 한다. 마리화나가 합법이 된 주에서 일하고 있는 까닭에 대부분의 환자가 마리화나로 통증을 불면증을 우울감과 불안감을 자가 치료하고 있으며, 또 많은 경우에서 필로폰으로 알려진 메스암페타민과 마약성 진통제를 동시에 또는 따로 수시로 소비하고 있다. 국가로부터 생활비 보조금을 받으면 그 돈을 전부 마약을 사는데 소진하는 경우도 많아서, 돈이 떨어져서 금단 증상이 나타날 때쯤 응급실에 나타나서 치료를 받고 퇴원한 후에 보조금을 타고 다시 마약을 하는 등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환자들도 많다.
많은 중독 연구를 통해 현재 통용되는 이론은, 마약중독은 뇌의 질환이지 개개인의 인성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 질환에 대한 스티그마, 즉 편견이 그렇듯, 마음이 강하지 못해서 우울증에 걸렸다는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있다. 마약 중독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마약을 사용한 모든 사람이 중독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쉽게 누군가를 나의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하기 쉽다. 더 쉽게 마약 중독이 되는 유전자와, 가정환경과, 성장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며 이것 또한 한 개인의 잘잘못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약중독에 대한 공부를 하고 치료를 하면서 가장 충격적으로 내게 와 닿은 것은,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의 뇌는 작고 소소한 일상으로부터는 더 이상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름다운 풍경, 노을, 밤하늘의 빛나는 별, 아이들의 미소,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 마음을 흔드는 감동적인 음악, 사랑한다는 말, 누군가의 작은 친절.. 이런 것들을 더 이상 즐거움으로 느낄 수 없고 오직 마약을 통해서만 그나마 '정상적인 기분'을 느끼게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많은 마약 중독자들이 내게 비슷한 말을 해주었다. "마약을 한다고 더 이상 즐겁지가 않아요. 그저 우울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마약을 하지 않을 때는 아무 에너지도 없고 그저 죽고 싶은 마음만 들어요." 마약에 중독된 이상 그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것이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더 많은 마약을 소비하고, 결국 마약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환자들을 본다. 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어 고민도 하고, 미약하나마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매일 고민한다. 중독 질환의 특성상 재발과 호전을 반복하기에, 한참을 잘 지내다가도 다시 재발해서 오는 환자들을 보면 무기력감과 좌절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럴 때일수록, 중독은 이 사람의 문제가 아닌 뇌의 질환이며, 어쩌면 이 사회의 문제이고, 일관되고 따뜻한 태도로 환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이 지금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중독의 재발로 인해서 누구보다도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이는 환자 본인이며, 상처 받은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일은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약물 중독자 그룹 치료 마지막에 환자들과 둥글게 손을 잡고 함께 외는 구절을 소개하고자 한다.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th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바꿀 수 없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이는 중독자들이 버텨내야 하는 고된 삶에 길잡이가 될 뿐 아니라, 예측 불허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두고두고 유용할 글귀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