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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Sep 28. 2020

흰 복도, 물비늘

 날 데리고 그곳에 갔던 이가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큰 병원이었는데, 하얀 복도에 바퀴 달린 침대가 늘어서 있었다. 얼떨결에 이끌려 들어간 병실엔 침대와 링거 줄, 기계가 뒤섞여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곳이란 느낌이었다. 침상 앞으로 다가간 어른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어린 눈에도 병이 깊어 보이는 환자였다. 살집이라고는 전혀 없는 검붉은 얼굴에 광대뼈가 살을 뚫고 나올 듯 도드라졌다. 입술엔 허연 더께가 앉았고 목에 호스가 꽂혀있었다(호흡부전으로 인한 기관 절개관 삽입이란 걸 한참 뒤에 알았다). 아버지라고 했다. 내 눈엔 절대 아버지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무서운 모습에 울음을 터뜨렸었다. 


 그 무렵 우리 삼 남매는 외가에서 지내고 있었다. 방학이어서 그런 줄 알았다. 병원에 다녀온 며칠 후, 골목이 울음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통곡 소리는 외갓집 철 대문을 넘어 들어왔고, 마당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이는, 엄마였다. 놀라서 뛰어 내려간 나를 끌어안은 엄마는 온몸을 들썩이며 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울어서, 울었다. 엄마가 우니까 슬펐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건 실감이 나지 않았고,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알기엔 어렸다. 여덟 살이었다. 말 귀를 알아들을 만큼 자랐을 때, 아버지 고향인 강화도 가는 길목 강가에 유골을 뿌렸노라고 엄마가 지나가듯 알려줬다. 

 



 ‘아버지 없는 아이’가 어떤 것인지는 ‘아버지 없이’ 살면서 차츰 알아갔다. 아침에 스스로 일어나야 하고, 끼니 정도는 당연히 알아서, 식은 밥은 투정 축에도 끼지 못한다. 더운 날 긴팔 옷을 입어도 사는 데 지장 없으며, 하교 길 소나기에도 우산 들고 달려올 이가 없으니 비 맞는 것쯤은 그러려니 해야 한다. 생계를 잇느라 지친 엄마에게 ‘따뜻하고 세심한 보살핌’을 기대하는 건 욕심이다. ‘아버지 없는 아이’는 어머니도 ‘거의’ 없다. 엄마 역시 몰랐을 거다.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남편(남성) 없이, 가진 것도 없이 고만고만한 아이 셋을 키우며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살아가면서 세상으로부터 강펀치를 맞을 때마다 온몸으로 알아 가지 않았을까. 


 엄마가 혼자된 후, 우리는 외가와 가깝게 지냈다. 트럭 운전수였던 둘째 외삼촌 덕에 추석 성묘는 우리에게 소풍이었다. 차례를 지낸 뒤 제수 거리와 정종 됫병을 꾸리고 돗자리며 차렵이불을 챙겨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트럭 짐칸에 오르면 출발이다. 짐칸 바닥에 돗자리를 펼치고 둘러앉는다. 무릎까지 이불을 덮고, 달리는 트럭 위에서 햇빛과 바람을 맞는 기분은 최고다. 산소까지 가는 동안 노래자랑, 장기자랑에 트럭이 들썩인다. 당연히 교통법규 위반이겠지만 명절이니 ‘봐준’ 건지도 모르겠다. 짐칸에 실려 떠들썩하게 놀다가도 운전석에서 “고개 숙여!”하면, 일제히 무릎에 덮었던 이불속으로 숨었다가, “이제 나와도 돼!”하면 다시 ‘짐칸 축제’를 이어갔다. 

 

 산자락에 도착해 개울가에 트럭이 멈추면 외삼촌들이 제수음식 보따리를 들고 돗자리를 옆구리에 낀 채 남자 외사촌들을 데리고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엄마와 외숙모들, 여자 사촌들은 가지 않는다. 제사는, 신성한, 남자들만의 의식이었다. 준비는 당연히(?) 여자들이 했다. 하지만 그까짓 거 상관없었다. 개울가에서 노는 게 훨씬 재밌었기 때문이다. 추석 무렵엔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해도 낮엔 아직 볕이 따갑다. 우리, 여자들은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붙이고 바지는 허벅지까지 말아 올리고는, 개울에 들어가 물싸움을 하고 다슬기도 잡으며 놀았다. 물이 차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입술이 파래지면서 아래윗니가 딱딱 부딪치고 몸이 덜덜 떨리면, 개울가 모닥불 위 양은솥에서 끓고 있는 누룽지 한 그릇으로 몸을 녹이면 된다. 언덕 위 산소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관심 없다. 그렇게 놀다 남자들이 언덕길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면 짐칸에 올라 엄마들이 미리 챙겨 온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돌아오는 길, 아이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이따금씩 깔깔거리는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꿈인 듯 들렸다.

 



 사촌들이 물장난을 하는 동안 나는 주로 개울가에 쪼그려 앉아 놀았다. 물에 잠겨 퉁퉁 불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거나 물속에서 헤엄치는 피라미들을 눈으로 좇으며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비늘을 보고 있으면 정강이에도 못 미치는 얕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 추석에 만난 죽음(외조부모의)은 소풍이었다. 죽음이 가져다준 눈부신 가을 소풍. 


 내게 유년의 기억은 두 개의 죽음으로 떠오른다. 소소하고 애틋했을 다른 기억들은 그저 희미할 뿐 또렷이 눈앞에 그려지는 장면은 죽음과 이어진다. 아버지의 죽음은 불시에 마주친 막다른 골목 같았다. 그러나 성묫길 천렵은 실은 그 골목이 꺾인 골목이며, 모퉁이를 돌면 밝은 길을 만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했다. 죽음은 늘 내 곁에 있다. 나의 유년도 나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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