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거칠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쓴 티가 역력하다. 논리적인 설득이나 감동이 있어야 좋은 글이라는데, 그렇지 못하다. 다듬어 풀자니 몇 자 쓰자마자 한계에 부딪힌다. 그럴 거면 쓰지 말아야 하는 건가? 내가 도움을 받은 책의 저자들처럼 수년 여에 걸친 자료조사와 답사를 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자료는 주변에 널려 있다. 필요한 건 그 자료와 사실을 통해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나는 ‘비건’이 됐다.
동물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나와 상관없는, 그저 지구를 함께 빌려 쓰는 존재라는 정도. 코끼리나 사자, 사막여우와 북극곰, 긴꼬리원숭이나 비단뱀은 길거리에선 만날 일이 없는 ‘동물원용’ 존재들이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갔던 동물원 나들이는 세상엔 이런 존재도 있다는 걸 알게는(?) 해 주어야 할 거 같은 의무감에서였다. 게다가 나와 다른 존재가 있다는 건 지구 생물의 다양성을 깨우쳐주기보다, 인간이, 내가 아주 우월한 존재라는 ‘뻐김’을 지탱하는 도우미 그 이상은 아니었다. 북극에 살아야 하는 곰이 겨울이라곤 두어 달이 전부인 나라에, 초원을 달려야 할 퓨마가 철창에 갇힌 채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에 아무런 미안함이나 슬픔이 없었다. 어린 시절 살던 다가구 셋방 작은 수돗가에 불쑥불쑥 출몰하던 팔뚝만 한 시궁창 쥐 나, 풀숲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내 앞을 휙 가로지르던 길고양이는 징그럽고 불편한 침입자에 불과했다. 거기까지였다, 동물과 나의 관계는.
웰시 코기 강아지 토리가 입양된 지 일 년쯤 되었을 무렵, 산책하다 발가락뼈가 부러져 뼈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았다. 사람 같았으면 아프다고 난리가 났을 텐데 토리는 그러지 않았다. 걷다 멈춰서 가자고 채근하면 다시 몇 걸음 걷기를 반복하는 게 전부였다. 수술 후 마취가 덜 풀려 휘청대면서 다가오던 모습과 안아 들자 가쁘게 몰아쉬던 숨소리가 고스란히 기억난다. 그때쯤부터가 아니었을까. 동물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왜 어떤 동물은 먹고, 또 어떤 동물은 제 식구처럼 보살핌을 받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육식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소고기나 돼지고기 몇 점, 삼계탕이나 프라이드치킨도 두어 번 손이 가는 정도였다. 그러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면서 찾아 읽은 책에선 도저히 믿기 어려운 사실들이 드러나 있었다. 특별 식이나 야식으로 별생각 없이 먹어댄 소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가 먹을거리가 되는 과정, 오로지 잡아먹기 위해 사육하는 공장식 축산은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선호하는 고기 맛을 위해 종(種)의 특성을 무시한 채 이루어지는 종자개량이나 살아남은 게 이상할 정도로 열악한 사육환경, 가위로 종이 오리듯 거리낌 없이 자행되는 도살 과정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유나 달걀은 동물을 죽여 얻은 식재료가 아니니 괜찮은 게 아니었다. 우유를 얻기 위해서 젖소에게 끊임없이 인공수정을 시키고 정작 그 우유를 먹어야 하는 송아지는 어미와 분리시켜 대체식(代替食)을 먹인다. 젖소의 원래 수명은 15년에서 20년 정도지만 이렇게 학대를 당하면 5~6년 정도에 만신창이가 되어 더는 젖을 생산할 수 없게 되는데 그러면 ‘육우’로 도살된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부리와 발톱을 잘라낸 닭을 움직일 수조차 없이 좁은 양계장에 가두고 조명을 조절하고 항생제를 퍼부어 달걀을 얻는다. 학대의 잔인함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알을 낳지 못하는 수평아리는 다른 부산물들과 함께 산 채로 폐기(분쇄)되어 사료로 쓰인다. 초등학교 앞 길거리에 종이박스에 담겨 ‘삐약삐약’ 하던 노랑 병아리를 귀엽다고 바라보다 저녁엔 프라이드치킨에 즐거워하는 모습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라는 식으로 합리화할 수 있을까. ‘특가 판매’하는 달걀 한 판을 사다 구워 식구들 오가며 먹으라고 식탁에 올려두곤 했다. 달걀이 ‘그렇게까지’ 해서 얻어진 줄 몰랐다. 아니다, 몰랐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모르고 싶었을 뿐이다. 마당을 뛰어다니던 닭과 아침마다 닭장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아직 따뜻한 달걀을 손에 쥐고 조심스레 돌아 나오던, 어린 시절의 감상에 여전히 기대고 싶었을 뿐. 눈에 보이지 않는 불편한 진실은 모른척하면 되는 거였다.
동물을 학대하고 도살해서 얻은 붉은 고깃점이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께름칙’을 넘어 진저리가 쳐졌다. 그렇게까지 해서 단백질을, 그것도 꼭 동물성 단백질을 보충하고 영양섭취를 해야 할 만큼 인간이, 내가 존재할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구잡이 공장식 축산이 아닌, 동물 복지를 지키며 생산된 고기들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동물복지 인증은 ‘육식 허가증’이 아니다. ‘복지’의 수준은 누구의 기준일까? 건강에 이롭다고, 학대하며 기르지 않아 괜찮다고 여기며 집어 드는 동물복지 제품들은 ‘공장식 축산’을 간신히 벗어난 수준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상품 포장지에 인쇄된, 푸른 초원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소와 돼지, 닭을 연상한다면 미디어에 세뇌되었거나 ‘바라는 대로(?)’ 믿는 순진한 소비자다. 죽는 순간까지는 ‘행복하게(?)’ 사니 괜찮은 걸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학대당하는 삶과, 잡아먹히는 건 기정사실이지만 그때까지는(육계의 경우 30일 ~ 45일) 그나마 나은 복지를 누리는 삶 중에서 어느 것이 나은지 선택할 자유가 동물에게는 없다.
토리 덕분에 동물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의사소통이 꼭 말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이제는 토리의 기분을 얼추 알 수 있다. 식구가 모두 외출한 동안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다 뜯어 놓고는, 돌아온 우리 앞에 두 귀를 잔뜩 내리고 고개를 숙인다. 잘못한 걸 아는 게다. 일어나자마자 물을 마시는 내 습관을 아는 토리는 나보다 먼저 냉장고 문 앞에 앉아 있다. 우리 식구의 기분은 물론, 일상적으로 움직이는 동선까지 모두 알고 있다. 식구들은 토리가 ‘사람’이라고 한다. 신기하고 기특하다. 함께 지낸 시간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토리 덕분에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한 나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분명히 하게 됐다. 육식은 육식이고, 반려동물은 그와 다른 존재라고? 내 눈엔 똑같이 보인다. 내 반려 견을 복날이라고 보신탕 하자는 소리를 들으면…? 본 적 없는 강아지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돼지가 몸에 분변을 묻히고 있는 건 원래 지저분한 동물이어서가 아니다. 바닥의 흙이나 볏짚에 몸을 마찰시켜 체온을 조절하는 습성을 무시하고 흙도 짚도 깔아주지 않고 변을 치워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돼지의 높은 지능과 예의바른 공동체 생활에 대해 안다면 절대로 그렇게 해선 안된다. 상 위에 오른 붉은 고깃점에서 동물의 생전 모습이 겹쳐진다. 따뜻한 양모 코트와 반지르르한 모피, 가벼운 덕다운 점퍼가 얻어지는 과정을 알게 되자, 겨울의 길거리는 동물 시체들이 걸어 다니는 듯 섬뜩함마저 들게 한다. 게르만의 우월성을 앞세워 유대인을 학살했던 히틀러와 별반 달리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극단적인 비교일까? 우유를 얻기 위해 쉼 없이 인공수정을 하고, 더 많은 고기를 위해 틀에 가둬 움직임을 제한하고, 일조량을 인위적으로 조절해서 생산량을 늘리고, 그렇게 학대하다 원하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도살시켜 소시지와 탕으로 소모하는 것, 어느 것이 더 잔인한 걸까? 인간의 우월성이 다른 동물을 학대하고 도살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현대의 공장식 축산은 21세기 인간이 자행한 것들 중 가장 부끄러운 역사다. 종이 위에 이렇게 울분을 토해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육식을 그만두는 것뿐이다. 동물을 학대하고 도살해서 얻은 혀끝의 쾌락(고른 영양 섭취라는 그럴듯한 이유로 합리화된)과 편의를 거두는 것뿐이다.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는 어찌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일 수 있다. 식이조절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람들이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자유롭게 먹는 것은 당연하다. 모두가 비건이 되길 기대할 수 는 없는 것이다. 다만 내가 먹고 있는 이 음식이 어떤 과정과 경로를 거처 여기가지 이른 것인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입 맛을 만족시키고 포만감을 주는 재료들이 적어도 다른 대상의 희생이나 착취로 얻어진 것이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아시아 끝자락에, 분단되어 늘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며 사는 변두리 한 인간의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래도, 식단을 바꾼다는 건 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을 바꾼다는 것이다. 바꾼다는 것은 다르게 산다는 것이다. 나는 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은 아주머니들이 ‘연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얼마 전에 개업한 마트에서 연어를 파는데 싱싱하고 맛있단다. 예전엔 비쌌지만 이젠 사 먹을 만 해졌다고 한다. 세상 좋아졌다고도 한다. 연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바꿔놓는 모양이다. 그들을 째려볼 마음은 없다. 하지만 지금 연어가 어떻게 양식되고, 어떻게 ‘개량’되었는지 아시려나. 이제 적어도 우리 식탁에 오르는 불그스름하고 탱탱한 연어 중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