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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Oct 05. 2020

찬란하고 쓸쓸한, 순두부찌개

 어디에나 ‘재수 없는 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고3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 애를 ‘재수 없는 ㄴ’으로 ‘찍은’ 건 청소시간이었다. 별생각 없이 비질을 하는데 유독 한 분단만 책걸상이 그대로였다. 당번들이 쭈뼛대며 수군거렸다. 어떤 애가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영어시험에서 ‘한’ 개를 틀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에! 한 개 틀렸다고 엎드려 울다니… 빵점이라도 맞았으면 모를까(아니다, 빵점은 백점보다 받기 어렵고, 빵점 받은 자는 책상에 엎드려 우는 따위의 유치한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거다). 그날 이후, 그 애를 (내 기준으로) 우리 반 ‘왕 재수’로 정했다.

 

 인연이 거기까지였으면 세월 지나며 잊혔으련만, 끝이 아니었다. 대입 합격 발표일, 지원한 학교에 직접 가서 합격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버스에 올랐다. 모교가 ‘될지도 모를’ 학교 앞 정류장에 내려 길을 막 건넌 순간이었다. ‘왕 재수’가 불쑥 나타나더니, 활짝 웃는 얼굴로, “얘, 너 합격이야, 합격했어! 축하해!”하고는 휙 가버리는 게 아닌가. 이런 ‘초’를 치다니! 내 딴엔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합격이면 뭐부터 해야 하나? 우선 엄마한테 전화를 해야겠지! 불합격이면 어쩌지? 재수할 형편이 아닌데… 아, 회사에 취직하는 건 진짜 싫다!’ 등등의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왕 재수’의 과한 친절로 모든 게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 버렸다. 합격자 게시판에서 내 이름을 ‘직접’ 확인할 ‘찬란한’ 기회를 그 기집애가 날려버린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과였다. 게시판에 두 이름이 나란히 올라 있었다. ‘아, 하느님, 부처님, 신령님~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다니!’였다.

 

 대학 입학식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었다. 이른 봄비가 내렸다. 운동장에서 치러진 입학식은 어수선하기만 했고, 아침밥을 거른 탓인지 뱃속에선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났다. 합격 서류를 받아 들고 교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왕 재수’가 엄마와 함께 있었다. ‘아, 왜, 또!’를 속으로 삼키며 마지못해 웃는 낯을 보일 때였다. 그 애 엄마가 “어머, 너 우리 H랑 같은 과라며! 입학식인데 혼자 왔니? 아직 밥 안 먹었지? 같이 먹자. 이제 근처 식당들도 알아 놔야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았다. 거절할 겨를도 없이 이끌려 식당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자, “뭐 좋아하니? 순두부찌개 어때? 비 오니까 뜨뜻한 국물 있는 게 나을 거야. 안 좋아하면 다른 거 먹어도 돼! 아줌마가 우리 H랑 앞으로 잘 지내라고 한 턱 내는 거야, 부담 갖지 마, 알았지!” 두 번째 속사포였다. “아, 네…”하며 얼버무리는 수밖에. 메뉴는 한 가지로 통일되었다. 

 

 순두부찌개가 등장했다. 처음 먹어보는 거였다. 작은 뚝배기 속 빨간 기름 뜬 국물에 가을 구름 같은 두부가 가득했다. 호박이랑 양파, 바지락조개 서너 알이 보이고, 막 깨뜨려 넣은 달걀도 얹혀 있었다. 꽃샘추위에 비까지, 엉거주춤 선 채 왕왕대기만 하고 잘 들리지도 않는 입학식을 마친 뒤였다. 몽글몽글한 두부는 입 안에 넣자마자 녹는 듯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이유 없이 메슥거리던 속을 칼칼한 국물이 달래줬다. 반찬엔 눈도 주지 않고 순두부찌개만 들이마시듯 먹어치웠다. 때론 어떤 음식에 대한 경험의 있고 없음이 삶의 반경을 알려주기도 한다. 스무 살 언저리 내 삶의 크기는 양 팔을 벌리고 한 바퀴 돌면 생기는 원, 딱 그만큼이었다. “어머, 너 순두부찌개 좋아하는구나! 진작 말하지 그랬어. 천천히 먹어. 이 집 음식 잘한다, 얘!” ‘네, 아줌마, 저 이거 처음 먹어봐요. 맛이 끝내주네요!’ ‘왕 재수’에서 ‘왕’ 자를 떼어 볼까 하는 생각을 하며 숟가락을 입에 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식당을 나오니 비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재수’ 엄마는 내게 사는 데를 물어보더니 기사가 차를 가지고 올 거라고, 데려다주마고 했다. 나는 다시 ‘왕’ 자를 붙이기로 했다. 가난은 꽈배기 같은 건지도 모른다. 사람을 꼬이게 만든다. 선한 의도였을 제안이 고깝게 들렸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순두부찌개는 두말할 것도 없이 맛있었지만, 기사가 딸려 있는 차에 함께 탔다가는 대학시절 내내 ‘왕 재수’의 시녀노릇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상상에 멈칫했다. 시린 발가락을 꼬무락대며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던, 지금껏 나를 둘러싸고 있던 원 밖으로 한 걸음 내딛을 참이었다. ‘프레시맨 잉글리시’를 보란 듯이 품에 안고, 강의실에선 아무 자리에나 앉을 수 있으며, 건물 전체가 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이 있는, 대학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정류장으로 달렸다. 집에 도착해서야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추서 1) H와 나는 4년 내내 짝꿍으로 지냈고, 시녀노릇 할 일은 없었다. 

추서 2) 스무 살 넘어 처음 먹어본 음식이 또 있다. 동아리 엠티 메뉴였던 ‘카레라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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