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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Nov 30. 2020

조만간, 흰

 ‘어느새 한 달이 돼가나?’ 거울을 보며 시간의 속도를 실감한다. 머리카락이 달력이다. 가르마 사이로 분필 가루라도 줄 맞춰 뿌린 듯하다. 염색한 지 3주쯤 지났다. 한 주 뒤엔 지저분한 흰머리를 못 견디게 될 것이다. 40대 중반부터 갑자기 머리에서 파뿌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식구들에게 투정을 부렸다. “얼마나 내 속을 썩였으면 이렇게 흰머리가 많겠냐고! 말 좀 잘 들으라니까!” 마트에서 염색약을 사다가 눈에 띄는 데만 염색을 했다.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찌르고 눈이 따가웠다. 다시 까매진 머리를 보니 마음이 안정됐다. ‘그래, 이게 원래 내 모습이지!’ 외출도 망설임이 없어지고, 전철 좌석에 앉아도 누가 내 정수리를 내려다볼까 신경 쓸 필요 없다. ‘나, 아직 흰머리 나고 그럴 나이 아니에요, 젊다구요!’ 염색한 머리를 보란 듯이 흔들어댔다. 


 젊은 머리카락이 주는 자신감은 기껏해야 3주 남짓 동안이다. 여름날 잡초처럼 스멀스멀 자라는 흰머리는 늘어나고, 눈에 띈다 싶으면 거울보기도 꺼려진다. 정직한 세월에 눈을 흘겼다. 시간이 내게만 따박따박 징표를 건네는 것 같았다. 세상엔 머리 검은 사람들 천지였다. ‘색이 바랜’ 나는 내쳐질까 불안했다. 


 2020년 이른 봄부터 <방역대책본부>의 코로나 19 브리핑이 매일 보도됐다. 책임자인 그녀도 ‘검은 머리’였다. 그럴 나이는 지난 걸로 보였는데. TV 뉴스 앵커만큼이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등장했다. 어느 때부턴가 그에게서도 흰 분필 줄이 보였다. 이렇게 반가울 데가! 그럼 그렇지! 그의 등장이 반가울 턱이 없는 상황이지만 높으신 분도 흰머리는 비켜갈 수 없음에 안도했다. 그런데 그는 다음 주, 그다음 주에도 염색할 마음이 없는지(그보다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늘어나는 흰머리 그대로 화면에 나타났다. 사람들의 반응이 의외였다. “염색할 시간도 아껴가며 방역에 열정을 쏟는 믿음직하고 훌륭한 관료”로 평가했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그게 아니었는데… 흰머리가 보이면, “이제 나이 드나 보네, 곧 손주 보겠어.”하면서 남의 가족계획까지 참견하거나, “자기 관리를 해야지, 늙어 보이잖아. 일하는데 곤란하지 않을까?” 지적했다. 흰머리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했다. 그런 시선들이, 내 흰머리는 자기 관리 부족이지만, 그녀의 경우는 열정과 헌신이라 평가했다.


 나는 그에게 고무되었다. ‘그래, 나이 들면 흰머리 나는 거 당연한 거야. 잔뜩 나이 든 얼굴에 머리만 까만 게 오히려 이상하지. 염색하지 말아야겠다.’ 그러나 그 결심은 미용실에 가기 전 한 주 동안 벌어지는 자기 주문일뿐, 늘 실패한다. ‘사람들이 흰머리를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재계약하는 데 불이익이 생길지도 몰라. 내 나이를 알고 있어도 허연 머리가 마뜩잖을 수도 있어.’ 염색을 그만둘 수 없는 온갖 이유가 떠올라 발길은 다시 미용실로 향한다.


 갈등을 반복하는 나에 비해 동년배 남성들의 흰머리는 관대하게 받아들여진다. 오히려 “멋져 보인다.”고도 한다. 세월이 드러내는 외모의 변화가 또 다른 스펙이다. 가부장제 의식은 일터에서도 한결같다. 여성에게 들이대는 것과 너무나 다른 잣대다. 이삼십 대 젊은 모습이, 노골적으로, 또는 암암리에 깔려 있는 여성 노동 자격이다. ‘외모도 능력’이라는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말들이 버젓이 오르내린다. 그 폭력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나는 흰머리에 독한 약을 발라 검은 머리인 척했다. 나이 듦을 능력 없음의 동의어로 여기는 세상에 고개를 숙였다. 염색약이 여성의 취업시장 진출에 큰 역할을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젊은 여성을 선호하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일터의 불문율로 작동함을 보여주는 증거다. 최저시급 보수를 받는 비정규직 중년 여성이 흰머리를 그대로 두는 건 불문율에 대한 도전이다. 젊은 여성의 염색은 스타일이고, 취향일 수 있지만 일하는 중년 여성에겐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젊음만이 우대되고 칭송받는 사회에서 재력과 능력이 따라주지 않는 중년 여성이 설 자리는 없다. 검게 덮고 ‘버티거나’, ‘찌그러지는’ 거다. 여성 고위 공직자의 흰머리가 스펙이 될 수 있었던 건 전문 분야에서의 경력과 업무에 주어지는 막대한 권한 덕분이다. 그에게는 지위와 경력이 주는 권력이 있었다. 여성이 흰머리를 노출하려면 권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은 머리카락으로 하는 게 아니다. 내 몸과 능력이 노동을 가능케 한다. 내 몸엔 나의 시간이 들어있다. 팽팽한 얼굴과 찰랑이던 검은 머리카락 시절만이 아니라, 팔자 주름 깊어가고 잡티 가득한 얼굴과 흰머리로 변해가는 지금까지 모두 나다. 흰머리를 염색하는 이들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가 개인적 취향이라고 여기는 대부분에 실은 남성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치밀하게 계산된 자본의 전략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나이 들면 흰머리가 늘어나고 주름이 생기며, 물리적 능력치가 떨어지는 건 사계절의 순환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간의 보편성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젊음과 경제적 능력이 존재의 기준치인 사회에서 나이 듦이나 가난은 존재를 부정하거나 그림자로 머물게 한다. 그러니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성형을 하고, 염색을 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려는 무리수를 두는 것은 아닐까. 최소한 젊어 보이기라도 해야 퇴출당하지 않을 테니. 유효기간이 길지 않은 이런 발버둥이 세상으로부터 인간을 더욱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흩어져 발버둥 치기보다 함께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세월에 따르는 노화를 받아들이려는 마음과 젊은 외모를 지키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수시로 흔들리는 나를 마주한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 외에 다른 욕구는 본능이 아님을 안다. 학습되고 주입된 것이다. 젊음에의 욕구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진짜 바라는 게 뭘까. 그거다, 자연스러움. 그리고 자연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세상을 바란다. 그게 뭐라고 눈물까지 나는 거지? 이렇게 약해 빠져서야. 재력도 능력도 없는 데다 신체적 젊음마저 사라진 나는 외모 지상 사회에서 내모(內貌) 지상인 사회를 꿈꾼다. 조만간 하얀 머리로 당당히 거리를 누빌 내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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