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리 파이터가 위험한 이유...
올 여름에는 ‘셰익스피어’ 의 작품을 일주일에 한 편씩 완독할 예정이다. 초딩 시절 그룹 과외를 통해 처음 접한 극작가 ‘셰익스피어’. 지금도 5대 희극은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지만, 많은 이들에게 명확히 박혀있는 4대 비극. 이것부터 시작하는게 그의 극 세계에 들어가기엔 좋겠지.
아무래도 <민음사 세계문학> 을 많이 추천하겠지만, ‘최종철 교수’ 의 번역은 뭔가 너무 고전 그대로 가려는듯한 난해함이 느껴져 <열린책들> 버전으로 읽었다. 40대를 앞두고 있는 지금, 무엇을 얻겠다고 원문에 가까운 버전을 굳이 난해함을 느껴가며 읽어야 할지. 편한게 좋은 것이다. 어차피 이 모든걸 평생 기억하기란 어려울 테니..
4대 비극의 첫 작품.. <햄릿> 은 무엇 때문에 금수저 인생에서 비극적인 결말로 삶을 마감하게 됐을까.
죽은 덴마크 국왕의 유령인 듯한 존재가 나타나 ‘햄릿’ 에게 자신이 죽은 진짜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동생인 ‘클로디우스’ 가 낮잠 자는 중 몰래 귀에 독약을 넣어 살해함으로써 권력과 아내까지 얻었다는 것. 이에 분노한 ‘햄릿’ 은 복수에 불타오른다. 그러나 마음과 말로는 이미 복수의 상대를 수 없이도 갈가리 찢어놓은 그는 실질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건 삶과 죽음의 세계에서 겪게 될 갖가지 고민 때문.
이러는 와중 그는 자신의 복수심을 숨기려 일부러 미친 척을 하고, 국왕을 포함한 대신들은 모두 그를 걱정하지만.. 과연 ‘햄릿’ 은 아가리 파이터에서 벗어나 레알 복수의 화신으로써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모두가 알고 있듯 결국 아가리 파이터에서 멈추고 말았다..
얼마 전 tvn의 교양 프로 <책 읽어드립니다> 에서도 언급했던 부분인데, ‘셰익스피어’ 의 작품을 읽을 때 뇌의 많은 부분이 붉은 색으로 표시, 즉 그만큼 사고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의 대사는 비유로 가득 차 있다. 신화와 자연 등을 적절히 섞어가며 인생의 참된 진리를 꿰뚫는 그의 표현은 문학 장르의 상상력이 장착된 사람이라면 잘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어린 학생들을 위한 번역본은 쉽게 표현되어 있지 않을까 (정작 나도 기억이 잘 안 난다). ‘셰익스피어’ 의 놀라운 점은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신화를 끌어다 쓰는데도 지금 화자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거의 근접하게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자연의 소재를 끌어다 자신의 분노, 슬픔, 기쁨, 호기심 등을 표현하는 방법은 단순히 나의 기분이 어떠하다고 나열하는 것보다 더욱 선명한 이미지가 그려진다.
희곡이 익숙치 않은 독자들은 혼자 과도한 감정을 담아 연기하는 듯한 대사 하나 하나가 부담스럽거나 잘 와 닿지 않기에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먼저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직관적으로 와 닿지는 않지만 조금만 상상을 가미하면 와 닿는 모든 인물들의 감정. 이것이 ‘셰익스피어’ 의 작품을 읽으면 뇌 사용량이 많아지는 이유가 아닐까. 적절한 소재를 활용하고, 이를 명확하게 와닿는 묘사로 인해 그의 <소네트> 작품에도 관심이 생겼다. 인생의 참된 교훈을 각 주제에서 어느 것에 비유하여 어떻게 표현했을지 그 묘사법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머니의 심장을 비비꼬아 드릴 겁니다. 빌어먹을 습관이 강철처럼 굳혀놔서 감정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요새만 아니라면 내가 뚫고 들어가 후벼놓을 작정입니다
나 또한 ‘라떼’ 운운하며 꼰대가 된 거 같은데, 어른들 말씀 틀린게 없다. 나이 먹으면 다들 이렇게 되나 보다. 그 동안 살아온 과정에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후회되는 것. 그렇기에 내 주변의 누군가에게 나의 경험을 들려주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거나, 나의 잘된 점을 뽐내는 등 사람이 꼰대가 되는 이유가 다 있는듯 하다.
‘셰익스피어’ 가 활동하던 시대로부터 몇 백년이나 지났음에도 그가 다루는 메시지는 현대에도 통용된다. 그것은 인물의 성별, 나이에 관계하지 않고 읽는 내내 꽤 많은 부분에서 ‘그래, 이게 진짜 인생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나의 마음이기도 한데’ 라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곁에 누가 있지 않아도 청춘은 스스로를 배신하는 법이다
시대는 더욱 복잡하게 변했어도 근본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은 변하지 않은 듯 하다. 인간이란 결국 비슷한 본성을 갖고 있되, 그 중에서 무엇을 자신의 메인 테마로 삼을 것인지에 따라 인간의 특성이 결정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전 시대를 관통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감정이 있기에 다양한 형태의 갈등과 모습이 나오는 것 아닐까. 그런 가장 기본적인 성질을 명확하게 건드리는게 ‘셰익스피어’ 의 역량인 듯 하다. 비극이라는 큰 테마를 보이되 이 안엔 비극을 유발시키는 온갖 감정들과 상황이 섞여 있기에 ‘언어와 묘사의 마술사’ 라는 별명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문학가임에 분명하다.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의지를 마비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알지 못하는 저승으로 달려가기보다 이승의 질곡을 참고 살게 하는것 아니겠는가
<햄릿> 의 가장 큰 테마는 ‘행동하라’ 일 것이다. 작품 속 ‘햄릿’ 의 라이벌은 ‘레어티즈’ 일 것이다. 비슷한 또래에 사람들이 추켜 세우는 능력도 엇비슷하고 (물론 최대 강점은 다르겠지만). 둘 다 비극적인 계기로 아버지를 잃었고, 얼마 동안 감정적으로 변하며, 결국 비극적으로 어이없게 죽는다. 그러나 ‘햄릿’ 이 말만 번지르르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 하는 반면, ‘레어티즈’ 는 적극적으로 나선다. 이는 노르웨이의 ‘포틴브라스’ 와도 대조적이다.
비록 얻을 수 있는건 코딱지만한 땅일 뿐이라해도 명예를 위해 적극 군대를 일으켜 움직이는 ‘포틴브라스’, 사람들까지 모아 아버지의 죽음과 부조리한 상황에 맞서는 ‘레어티즈’. 그에 반해 모든 걸 비밀로 하면서 대체 언제 제대로 터뜨릴지도 모르는 ‘햄릿’ 의 아가리 파이터 정신. 그가 생각했던 대로 재빠르게 실행에 옮겼다면 비극적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을.
입 다물고 가만히 살자니 죽을 때까지 보게 될 온갖 꼴깝스러운 장면들, 죽음을 택하자니 어떤 모습일지 모르는 지옥과 후세에까지 치욕스럽게 전해 질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카더라 통신. 이 사이에서 두려워한 나머지 ‘아버지의 죽음과 복수’ 라는 가장 원초적인 테마를 정의의 명분이 있음에도 실행으로 옮기지 못 하는 그는 보는 내내 답답하면서 입을 당장 찢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말은 정말 잘한다.
숙고는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고 자연스러운 결단의 색깔은 뻗어나가는 생각과 더불어 창백하게 변하는구나
우리의 결심이란 기억의 노예라 요란하게 태어나지만 버틸힘은 약하다오. 과일이 설었을적엔 나무에 매달려 있지만 영글면 저절로 땅에 떨어지는 법이오
뛰어난 묘사를 써가면서 자신은 꽤 논리적이면서 이성적이고, 절제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자위하지만 결국 그는 입과 마음으로만 그럴 뿐이었다. 그래서 왕국도 이어 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친구인 ‘호레이쇼’ 에게 자신의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하였지만 과연 그가 올바른 진실을 전했을지는 모르는 일. 참된 진실은 자신이 직접 알렸어야 했으며 게다가 그것이 남도 아닌 친아버지와 엮이면서 왕국의 존폐를 다루는 일이 었기에 그의 임무였기도 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말을 참 잘한다. 그리고 삶의 진리를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는 없다, 정작 본인의 성품은 어떠하고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듯한 그들은 신이 정해 놓은 비극적인 결말에 이끌려 갔을 뿐이고, 이를 통해 우리는 ‘햄릿’ 의 최대 고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결단력 있게 행동으로 옮겨야 할 필요도 있음을 강력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햄릿> 이라 생각한다.
박우수 교수가 열린책들에서 번역한 ‘셰익스피어’ 의 작품이 대체로 잘 읽혔다. 주석 뿐만 아니라 후반의 해설까지. 어렸을 적 필독서로 접했지만 막연한 기억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 아가리 파이터로 살아가면 안 되는 이유를 느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