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이 먼저다
코로나가 터졌고 내 모든 신경은 살아가는 것에 몰렸다. 즉, 생존이 먼저였다.
한국에서 코로나가 터질 때만 해도 필자는 미국에 있었기에 남일이라고 생각했다.
"여기 코로나 터지고 아주 난리도 아니야, 미국에 있다니 너무 부럽다!"
한국에 있던 친구는 당시만 해도 코로나와 한 발자국 떨어져 있던 미국에 있는 나를 몹시 부러워했다. 당시만 해도 먼 대륙, 중국과 한국 정도 혹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 정도라 생각했고 미국까지 번질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시카고를 시작해 모든 전역이 락다운 즉 봉쇄되기 시작했다.
당시 인턴을 하라 함께 온 친구들 대부분은 미국도 락다운이 되자 결국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얼떨결에 미국에 남기로 했다. 사실 돌아갈 비행기 값도 없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도 말하자면 사연이 좀 있었는데, 비행기를 예약했다가 사정이 있어서 다시 취소했는데, 환불된 돈이 통장으로 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400만 원이나 되는 항공편을 다시 예매할 돈은 수중에 없었기에 결국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샌디에이고 안에서 사막지역까지 꽤 멀지 않은 곳에 머물렀던 나는 미국에서 별로 할 게 없었다. 미국에서의 멋진 인턴 생활을 꿈꾸며 갔지만 코로나와 함께 인턴생활은 집에서 재택으로 바뀌었고, 거리에는 좀처럼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기에 내가 생각했던 미국 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집 근처 마트는 멕시칸들이 주로 가는 곳이었는데, 월마트 같은 깔끔한 느낌은 아닌 동네 슈퍼 마트 같은 곳이었다. 거기서 종종 하루하루 먹을 끼니를 챙겼다. 내가 주로 샀던 것은 미고랭이라는 인도네시아 라면과 베이글 정도였다. 미고랭은 크기도 작고 가격도 적어서 여러 개 사서 해 먹었다. 그래도 굉장히 저렴한 편이어서 제한적인 식비 안에서 매우 요긴한 식량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살이 점점 쪘다. 나는 한국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몸이 굉장히 마른 편이었는데, 어느 순간 체중이 불어나서 한 15kg를 찌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밖에 좀처럼 나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라면과 과자, 미국식 음식들에 절여지다 보니 어느새 체중이 크게 불어났었다. 그렇지만 체중이 중요한 게 아닌 생존이 중요했던 시기였다. 당장에 집 근처 마트에는 모두가 고기며 과자, 심지어 휴지까지 싹쓸이를 해가는 바람에 텅 빈 진열대를 바라보며 돌아오곤 했다. 한국에서는 마트에서 진열대가 동나는 경우는 나는 사실 많이 보진 못했다. 그러나 그곳에선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트 진열대가 텅 비어 있었다.
그런 코로나는 빈민층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마트에서 나올 무렵 한 무리의 멕시코계 가족들을 볼 수 있었다. 중년 부부와 어린 자녀 2~3명 정도가 한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내용을 보니 일자리가 없어 음식을 나눠달라는 팻말이었다. 아마 그들은 필시 불법 이민자들이었을 것이고, 코로나 시기 정부가 지원하는 지원금 대상에서는 제외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런 데다가 일자리가 없으니 정말 생존이 달린 일이었다. 어린 그 아이들은 그때의 경험을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했다. 난 잠시 그 가족들을 지켜보았다. 의외로 미국 사람들은 그 가족들을 마주칠 때 큰 봉투로 산 빵을 주며 서로 잘 이겨내자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어찌 보면 그게 미국 사람들의 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길거리의 푸드뱅크(우리나라로 치면 무료 급식소)에는 길게 줄은 선 광경이 연출되었다. 미국은 푸드뱅크가 정말 정말 많았다. 한국에서 무료 급식소는 직접 찾아가야지 만날 수 있는 곳인데 미국은 정말 길 가다 보면 종종 푸드뱅크를 마주치곤 했다. 아마 복지가 한국만큼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이렇게 푸드뱅크라는 시설을 통해 해당 부분을 채우는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줄이 이렇게 길게 늘어서지도 않았을 것이고 대체로는 행색이 남루한 사람들 위주로 서있었는데, 이제는 자가용을 끌고 온 가족들까지 푸드뱅크에 길게 늘어서서 음식을 받았다. 나 역시도 줄을 한번 서볼까 하다가 이건 아닌 것 같아서 구경만 하다가 왔다. 생존이 걸린 혼란한 시기였다.
사실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아플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혹시라도 코로나에 걸리거나, 아니면 다리라도 부러지는 날에는 우리 집안의 전재산을 아득히 뛰어넘는 치료비를 내야 할 수도 있었다. 당시 인턴을 주최하는 측에서는 내가 미국에 남겠다고 하니 혹시라도 아프면 모든 치료비는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며 각서까지 받았다. 코로나라도 걸리면 기본 1억 원은 훌쩍 뛰어넘는 미국의 의료비는 사실 거주하는 내내 가족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요소였다. 운 좋게도 미국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아프지 않고 잘 지냈다.
살이 찌는 와중에도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곤 했다. 홈스테이로 지내던 숙소에서 나온 크게 원을 한 바퀴 돌며 달렸는데 한 한 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그렇게 매일 아침 달렸는데 늘 마주치는 사람 둘이 있었다. 백인아저씨와 흑인 아저씨였다. 백인 아저씨는 판초 우의 같은 것을 덮어쓰고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달렸다. 반면 흑인 아저씨는 웃통을 모두 벗고 이어폰과 선글라스를 끼고 걸었는데, 워낙 상체 근육이 발달한 몸이어서 내가 보아도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처음 조깅을 할 때는 서로 어느 정도 경계심 내지는 거리를 두고 뛰려 했다.
당시 분위기는 특히 동양인 곁으로 갈려는 사람이 정말 없었고, 심지어 집으로 초대되었던 한 백인은 나와 악수하자마자 손을 씻고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아주 난리도 아닌 일도 있었다. 어쨌든 매일 그렇게 달리고 서로 여러 차례 마주치다 보니 알게 모르게 라포(일종의 친밀감이라고 보면 된다) 같은 것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거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뛰었지만 서로를 향해 V자를 하며 인사했다. 서로 함께 이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보자는 의미였다. 백인 아저씨와 흑인아저씨의 이름도 모르지만 셋은 매일 서로 간격을 둔 채 조깅을 했다. 나름 힘이 되는 시간이었다. 사람이라는 게 참 신기한 게 별일 없을 때는 가족이더라도 귀찮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는 모르는 사람의 따뜻한 언행하나가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코로나 초기, 생존이 급했던 시기에는 라면과 빵, 아침 달리기, 그리고 트럼프의 뉴스 브리핑만 보면 지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무래도 사람들과의 교류가 없다 보니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대다수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 한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아서 샌디에이고에는 나만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샌디에이고에 한국인들이 아직 나 말고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